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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강준의 목사 (장로교)

Joyfule 2009. 6. 8. 23:30

순교자 강준의 목사 (장로교)

 

순교자 강준의 목사(1893- 1950)


강준의목사(백낙준박사와 동창)는 1893년 6월 26일 평북 선천에서 9남매중 4남으로 태어났다. 신성중학교 보성전문을 졸업한 후 평양신학교 1924년 제17회로 졸업하고 장로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욕을 먹으면서도 지적하고 시정해야 마음이 풀리는 대쪽같은 성격의 소유자이면서도 사랑이 넘치는 부드럽고 인자한 그의 모습앞에서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게 마련이었다.

그분의 불같고 뜨거운 정렬은 일제당시 독립운동과 관련하며 항일투쟁에 앞장서게 했으며 이것 때문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1926년 문맹퇴치 운동을 통해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영명학원(보통중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15년간 봉사하였고 기독교 실업인들의 많은 후원을 받으며 교육에 힘썼다.

수업에 앞서 모든 학생과 함께 애국가를 불렀기 때문에 일본 경찰에 의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수난을 겪어야 했고 1939년 강목사가 출타한 틈을 타서 일경의 사주를 받은 비류들에 의해 영명학원은 불타버렸다. 그는 중국어에 능통하여 중국에 지하교회를 설립하여 복음을 전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1940년에 노량진 흑석동에 조선기독교장로교회를 개척하고 1944년 신사참배 반대로 교회를 사임하고 강원도 영월 마차리 탄광촌 골짜기로 가서 노동자로 들어가 같이 일하며 복음을 전하고 마차리 교회를 개척하였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서울로 복귀하여 3백만 부흥운동에 손양원목사와도 손을 잡고 혼신의 힘을 다했다.

 

 "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말씀대로 자신의 일을 전혀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다. 아내도 자녀도 심지어 목숨까지도 복음을 위하여 배설물처럼 여겼다. 6.25동란중에도 쉬지않고 복음사역에 앞장서 활약하던 중 공산당에게 수난을 받게 되었으며 6.25사변 당시 신임하던 장로의 아들이 자신의 부친과 강목사를 밀고하여 강경으로 체포 부여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복음을 전하다가 인민군 패잔병들에 의해 몸이 결박된채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1950년 9월 20일 장남 강태문(하바드 신학대학 졸업반)에 의하여 시신이 모시밭에서 발견되었을때에 손과 발목이 잘려 있었다. 충남 논산군 광석면 서울에서 1시간 가량 가면 이사리 신촌동 비석도 없이 풀만 무성한 묘지를 만나게 된다. 살아생전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한 그는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토레이 박사의 "완전한 사람" 이란 말이 생각난다. 우리 하나님은 피의 소리를 들으시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순교한 순교자들의 피가 오늘날 발전된 한국교회의 터전의 역할을 하였 음을 우리는 깊이 명심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