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텐카 라진 (Stenka Razin)/볼쇼이 합창단
넘쳐 넘쳐 흘러가는 볼가강물 위에
스텐카 라진 배 위에서 노래소리 들린다.
페르샤의 영화의 꿈 다시 찾은 공주의
웃음 띄운 그 입술에 노랫소리 드높다.
동편 저쪽 물 위에서 일어나는 아우성
교만할 손 공주로다 우리들은 주리다
다시 못 올 그 옛날의 볼가강물 흐르고
꿈을 깨친 스텐카 라진 장하도다 그 모습
Russian Folk song
“주인에게 버림받은 자여, 예속을 강요받은 자여, 봉기하라!
우리 코사크는 항상 그대들과 함께 하리라.”
1670년 러시아의 농민 반란 지도자 스텐카 라진은
알렉세이 1세의 학정과 봉건 영주들의 수탈에 맞서 봉기를 일으킨다.
러시아 전역을 뒤흔든 농민봉기는 황제의 매수에 넘어간 동지의 배반으로
스텐카 라진이 체포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에서 두 팔이 잘리고,
두 다리가 잘리고 마침내 목이 잘려 처형됨으로써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나 러시아 농민들은 그의 죽음을 믿지 않고 스텐카 라진이
언젠가 다시 나타나 그들을 이끌고 폭정과 수탈을 쳐부수리라 생각하면서
그 유명한 러시아 민요 <스텐카 라진>을 만들어 노래하면서 전설을 이어갔다.
<스텐카 라진>은 바리톤 솔로로 들어도 좋지만,
역시 압권은 굵직하고 묵직한 러시아 남성 합창단의 합창이다
영화
러시아 영화사의 전설적 거장 에이젠슈타인의 동명의 영화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는 합창 <스텐카 라진>은 그야말로 전율을 느끼게 한다.
스텐카 라진의 농민군은 볼가강가 차리진을 점령한다.
그런데 그 성 영주의 딸인 공주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스텐카 라진과 농민군 모두 공주의 아름다움에 빠져
서로가 서로를 질투하고 의심하는 등 한때 군기가 혼란에 빠진다.
다시 볼가강을 건너 탐욕과 압제의 다른 봉건 영주를 공격해야 하는데...
스텐카 라진과 공주 그리고 농민군들은 배를 타고 볼가강을 건너기 시작한다.
배가 강 한가운데에 이르자
스텐카 라진은 공주를 두 팔에 안고 농민군들 앞에 선다.
"나는 공주를 사랑한다.
그리고 압제와 굶주림에 시달려온 여러분인 농민들을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내 조국 러시아를 더 사랑한다."
스텐카 라진은 연설을 마치고는 뚜벅뚜벅 뱃전으로 걸어가
공주를 볼가강으로 던진다.
슬로모션으로 팔랑팔랑 공주가 떨어져내리고, 공주의 몸이 강물에 닿는 순간
우렁찬 남성 합창 <스텐카 라진>이 들려오고, 말을 탄 농민군 수만명이
전속력으로 성을 향해 질주하는 모습이 오버랩된다.
Stenka Razin
부유한 돈 카자크 집안 출신으로,
가난한 폴란드·러시아의 농노들이 돈 카자크에 정착하기 위해
계속 도망해옴으로써 사회 불안이 팽배한 분위기에서 자랐다.
1667년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이주자와 모험가 들로 이루어진
작은 무리의 지도자가 되어 볼가 강 근처 돈 강 상류 지역에
새로운 카자크 전초기지를 세웠다.
그뒤 3년 동안 차르에게 보내는 재물을 운반하는
거대한 볼가 강 소함대를 약탈하는가 하면,
야이크(지금의 우랄) 강 연안의 야이크 시(市)를 정복했고(1668),
바다 건너 페르시아의 카스피 해 연안에 있는 이슬람 정착지인
데르벤트·바쿠·라슈트 등을 파괴했으며, 페르시아 왕이 파견한
함대를 격퇴하는(1669) 등 과감하게 러시아와 페르시아 정착촌들을 습격했다.
재물과 명성을 얻고 돈으로 돌아온 라진은 1670년 다시 볼가 강 연안의
차르 요새 정벌에 나서 7,000여명의 카자크군을 이끌고
차리친(지금의 볼고그라드)과 아스트라한을 함락시켰다.
두 도시에서 라진과 그 부하들은 연회를 벌이고 귀족과 장교들을
무참하게 살해하는 야만적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또한 그 지역 정부들을 카자크 자치기관들로 대체했다.
이러한 성공에 용기백배한 그는 볼가 강까지 진격하기로 결정하고
도중에 농민과 도시하층민 들을 선동해 귀족과 관료를 타도하기 위한
(그러나 차르에는 대항하지 않았음) 반란군에 가담시켰다.
2만 명으로 늘어난 병력을 이끌고 사라토프를 정복했으며
심비르스크까지 진출하여 그의 반란군은 볼가 강 전지역 및 돈 강과
도네츠크 강 인접지역뿐만 아니라 러시아 중부지방까지 진출했다.
라진의 반란에 놀란 차르 알렉세이(1645~76 재위)는 황태자
유리 바리야틴스키에게 군대를 내주어 심비르스크를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서유럽의 군사기술을 익힌 황태자의 군대는 허술한 장비에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라진의 군대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
(1670. 10). 라진은 돈으로 도망쳤으나 1671년 4월 24일(구력 4. 14)
왕당파 카자크에게 체포되어 차르에게 보내졌다.
모스크바로 이송되어 심한 고문을 받은 라진은
붉은광장에서 능지처참형을 당했다.
차르의 군대는 반란군의 마을을 불사르고 폭동을 진압하면서
반란군 지도자들을 처형했으며,
1671년 12월 반란군 최후의 거점 도시인 아스트라한을 탈환했다.
라진의 봉기는 서로 다른 두 세력인 카자크와 농민을 결합시켰다.
카자크들이 나선 것은 소위 무정부주의에 대한 그들의 이상 때문이었으며,
농민은 1649년 마침내 입법화된 '농노제'에 대한 증오가
봉기에 나서게 된 주요동기였다.
사회적 저항의 요소가 반란으로 표출되긴 했지만 반란은
단순히 전리품과 파괴를 목표로 하는 무정부적 성격을 띠었다.
이 때문에 역사가들은 러시아 역사에서 라진에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의 마음속에 라진은 민중의 영웅,
즉 사회와 자연의 힘에 맞서 승리한 자유인의 화신으로 남아 있으며
그의 영웅적 행위는 수많은 민중가요와 전설 속에 살아 있다.
-자료 출처/다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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