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무슬림들은 논리적 입장보다는 직접적, 현실적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 다섯기둥의 실천과 종교의식의 거행, 예배의식과 일상생활에서 알라의 '약속 및 위협'을 통해 알라의 현존을 신비적으로 체험하는 것, 알라를 진정으로 믿는 인간의 삶과 인격 속에서 이슬람의 생명력과 현실성을 확신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인격적, 감정적 체험의 욕구룰 반영한다.
초기 신비주의자들
초기의 신비주의자들은 이슬람이 시리아로 확산될 무렵 출현했다. 신약의 영향을 받았으며, 초기 신비주의자들은 금욕주의적 측면이 강했다. 수피 Sufi(수프, 양모)란 양털로 된 누더기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을 의미했다. 이는 금욕적 성격의 운동이었음을 반증하는 명칭이다. 수피들은 8세기에 출현했는데, 지옥의 공포에 대한 영향으로 참회, 금욕의 기풍을 진작시켰다. 중심 개념은 나프스(저급한 영혼)와 끊임없이 씨름하는 지하드(聖戰)였다. 이 나프스와의 투장은 가난, 단식, 침묵, 지속적 자기반성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생각과 행위를 일일이 또 끊임없이 통제하는 기술은 그 자체가 하나의 과학으로 연마되어 개인의 삶 전체를 완전한 이흘라스(순수한 헌신)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체계적 명상을 실천했으며, 금욕주의는 메소포타미아, 이란 동부 호라산 지역에서 발전했다. 동부지방 최초의 금욕주의자는 이브라힘 이븐 아드함(777년 사망)이다. 그는 종교적 삶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타와쿨)라고 믿었다.
청빈주의도 중심주제였다. 파크르(가난)에 대해 "나의 가난은 나의 자랑이다."(파크리 파흐리) 라고하면서 지상적인 어떤 것에 대한 소유도 멀리할 것을 요구했다. 후대에는 이 타와쿨, 파크르 모두 내면화된다. 즉 "가난이 완벽해지면 곧 하느님이다."라는 관념이었다. 따라서 파크르는 모든 좋은 것을 포기하는 의미로, 더 나아가 저승에 대한 바람과 희망을 포기하는 의미가 되었다. 절대적 가난 속에 있는 피조물은 그의 모든 것이 되어주는 창조주의 영원한 풍요로움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신비주의자들은 명예와 칭송에 대한 애착도 부정했다. 다른 사람의 반응에 신경 쓴다는 것은 진정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리다(만족), 즉 무엇이 주어지든 그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수용하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 되었다.
수피즘은 쿠란에 근거하지만 철학적 면에서는 신플라톤주의와 영지주의, 조직적 면에서는 기독교 수도원 제도의 영향을 받았다. 정기적 명상과 철야기도, 금욕적 생활 하다가 12세기에는 독특한 음악과 의식 갖춘 공동의 종교의식을 행하는 단체로 발전했다. 이들의 관심은 현세에서 알라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집트의 무슬림 둘-눈 알-미스리 Dhul-Nun al-Misri(859 사망)의 영향도 컸다. 그는 "이집트에서 온 어부"라 불렸는데, 인간은 신비적 합일에 의한 결혼으로 알라에게 먹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알-미스리와 추종자 수피들은 영혼이 알라에게 먹히기 위한 준비단계를 상정했다. 수피는 진리로 향하는 길을 가는 순례자이다. 회개,금욕,자제,가난,인내,알라에 대한 신뢰,만족의 단계가 있으며, 마지막으로 진리와 지식의 초월적 영역에 도달하면 알라의 자비를 확신하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도취의 체험을 한다.
사랑의 신비주의
바스라의 라비아(801년 사망)로 대표된다. 그는 물동이와 횃불을 들고, 사람들이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나 천국에 대한 희망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영원한 아름다움을 사모하여 기도하도록, 지옥에는 물을 붓고, 천국에는 불을 질르겠다고 선포했다. 즉 지옥의 형벌이나 낙원의 기쁨과 무관한 절대적 사랑을 추구한 것이다. 라비아 사후 1세기 반 경과하며 사랑의 이론 더욱 정교화되고 확대되었다.
다양한 신비주의자들
바그다드의 심리학자 무하시비(857년 사망)는 냉철하게 자신의 영혼(무하시바)을 탐색했고, 하라즈(896년 사망)는 신비주의적 신앙고백으로 "오직 하느님만이 '나'라고 말할 권리를 지니셨다."고 주장했다. 그는 더 포괄적이고 신비주의적인 후기의 타우히드(하느님의 유일성 고백), 즉 "하느님 외에는 달리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말의 기초를 닦았다. 둔-눈(859년 사망)은 마리파(그노시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식)를 언급했고, 자연을 하느님의 놀라운 활동을 증거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는 피조세계의 가치를 부여한 최초의 수피였다. 바예지드 비스타미(874년 사망)는 페르시아 출신으로 수브하니(나에게 찬미를, 나의 위엄은 얼마나 위대한가!)를 외쳤다. 세상과 자신으로부터 결별한 인간의 神化를 표현한 것인데 인도 베단타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브라흐만과의 합일에 이르기까지 아트만을 확장시켜야 한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적인 모든 흔적을 지우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는 한편 자신이 체험한 황홀경을 묘사함에 있어 천상으로의 여행이라는 상징을 최초로 사용했고, 파나를 향한 갈구, 자신의 체험끝의 알 수 없는 실망감을 시적 언어로 그려냈다. 여기에서 파나는 우선 윤리적 개념이다. 즉 인간적 요소가 점차 소멸하고 영성이 증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윤회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려는 노력이 아니다. 즉 니르바나와 무관하다. 오히려 자신이 존재하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피조물의 노력과 관련된다. 바그다드의 주나이드(910년 사망)는 정신의 신비주의를 주창하여 이란과 후기 수피주의, 특히 마그립(북아프리카) 지역의 수피 전통에 뚜렷한 영향을 끼쳤다. 한편 불교의 영향으로 무신론적 신비주의도 존재했다. 이런 입장은 자아 헌신이나 진정한 존재에의 완전한 몰두를 궁극의 목표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보수적 무슬림들은 무신론적 신비주의자들 zindig 과 극단적 수피들 ecstatics 까지 이단으로 취급하여 박해했다.
알-할라즈 al-Hallaj
페르시아의 수피로 922년 체포되어 "나는 진리이다" al-Haqq 라고 외치며 참수형을 당했다. 그는 알라와의 신비적 합일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고, 하느님과 자신 사이의 베일 거두어주기를 청했다. '키탑 앗-타와신'이라는 시에서 등잔불에 자신을 던지는 나방의 비유를 구사했다. 그는 드디어 "나는 신이다, 나는 진리(하크)이다."라고 외쳤다. 할라즈의 죽음은 主意主義的 신비주의라 할 수 있는 1기 고전적 수피주의 시기를 마감한 사건이었다. 그후 온건한 수피들은 다음 2세기동안 수피의 입장이 쿠란과 하디스에 근거한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며 정통주의자들과 타협을 추구하며 수피즘을 체계화했다.
후기 수피 시인들
잘랄 알-딘 루미 Jalal al-Din Rum는 쿠란을 페르시아어로 번역했다. 그는 알라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하나라고 생각했고, 어떤 종교이든 근본적 문제는 종교적 체험이라고 확신했다.
알-가잘리 al-Ghazali
신비주의자들이 내재성과 편재성을 강조하는 입장은 정통주의자들이 알라의 초월성 전능성을 강조하는 입장과 상반되므로 절충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것을 대표한 사람은 알-가잘리이다.
무이 알-딘 Muhyi al-Din(종교부흥가)이라고 불리우기도 한 알-가잘리는 페르시아에서 1058년 출생하여 샤피 학파의 법학을 공부했고, 알-아샤리를 추종하는 이맘의 지도 아래 신학을 공부했다. 아샤리의 사상이 지배적인 니잠이야 Nizamiyah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4년간의 강의 중 정신적 위기 맞아 회의주의를 거쳐 수피즘에 빠져들었다. 그후 대학을 떠나 시리아로 가서 2년간 명상과 기도를 했으며, 정통주의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수피 신비주의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헸다.
알-가잘리는 무함메드가 받은 계시에 근거하고 있는 한 법과 이성도 인정했다. 그러나 이성과 역사, 실천의 용어로 표현할 수 없으며 오직 시적 상징적 언어로만 표현할 수 있는 직관적인 통찰력의 타당성도 주장했다. [알-문키드 민 앗-달랄](과오로부터의 구원자)은 철학, 스콜라학, 바티니야 등 당대 신학사조와의 정신적 투쟁이었으며, [이흐야 울룸 앗-딘](종교학문의 부흥)은 하느님 보시기에 바람직한 삶울 제시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절대복종(이슬람)과 이만(신앙) 외에도 이흐산(하느님을 대면하듯이 그분께 봉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고, 극히 비종교적 행위에 몰두할 때도 하느님께서 항상 자신 앞에 계시다는 느낌을 가져야 함을 주장했다. 마지막 40장은 죽음을 맞이하는 구도자의 자세에 대해 가르침이다. 한편 [미슈카트 알-안와르](빛을 위한 벽감)은 기존 수피주의에는 다루지 않았던 이슈라크(빛)의 신비주의를 표방했다. 알-가잘리의 빛의 신비주의는 1191년에 처형당한 수흐라와르디에 의해 명료화되었다. 그것은 영혼이 자신의 망명지인 서방 물질세계로부터 순수한 빛으로 이루어진 동방의 정신세계로 되돌아간다는 내용이다.
[이슬람사상의 부흥]에서는 우주는 영원한게 아니라 알라의 창조적 의지를 통해 무로부터 창조된 것이라고 주장했고, 인간과 창조주, 인간이 사는 세상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도덕적, 체험적이어야 함을 강조했다. 논리적 이성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겸손한 영혼은 쿠란의 상세한 해석이나 신학을 몰라도 충분히 종교적일 수 있다고 했고, 수피들의 자기 훈련과 명상의 방법이 적절히 수행되면 대단한 가치가 있음을 강조했다. 다섯가지 기둥도 올바른 정신상태와 올바른 마음에서 스스로 우러나와서 준수되어야만 하며, 그 때 비로소 최후의 심판을 모면할 수 있다. 그는 쉬아의 비의 사상과 철학자들의 합리주의를 모두 반대하고 순니 주류의 입장을 옹호했다. 그의 사상은 지성우월주의와 보수학풍에데 비판을 담고 있었고 주관적 종교체험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종교에 대한 지식 일므 ilm 과 실천적 행동 amal 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정립했다. 지식과 정서, 행동의 인과적 상호작용 주장한 것이다. 이는 순니의 형식주의를 공격함과 동시에 수피적 영적 상태가 이단으로 향하는 것을 방지했다. 알 가잘리에 의해 수피 사상은 순니 신학의 공인을 받게 되었다.
수피교단(타리카)
수피즘의 교단은 압둘 카디르 알-질라니(1166 사망)와 더불어 시작했다. 그는 한발리파 설교가로 그의 제자들이 형제단을 조직했다. 공식적 이슬람의 교리주의와 율법주의로부터 만족을 얻지 못한 무슬림들이 갈구하던 감성적 종교성이 수피교단으로부터 얻어졌다. 수피 교단은 공동예배, 음악행사를 실천했으며 엄격한 스승(피르) 제자(무리드) 관계를 특징으로 보여주었다. 특히 디크르 전통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은 일정한 양식의 말을 정기적으로 수천 번씩 반복하는 영적 기술이었다. 예를 들면 '알라'라는 단어나 신앙고백문, 주에대한 찬미, 주에게 용서를 구하는 형식이다. 스승의 의무는 제자에게 그의 영적 수준에 적합한 디크르를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신성한 명칭을 수천번씩 반복하는 경우 심리적으로, 심한 경우 생리적으로도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수피 교단의 종교적 실천은 대중운동으로 성장했다. 대중은 교단 창시지의 기일-성인의 영혼이 하느님과 하나 된 '결혼 기념일'-에 열리는 축제(우르스)에 참여했다.
수많은 교단이 압둘 카디르 질라니를 기원으로 하는 카디리야 교단을 모형으로 하여 설립되었다. 카다리야 교단은 현재도 가장 많은 지역에 분포한다. 그 창시자는 49명의 아들을 두었다는 점에서 금욕주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라 쉬코흐(1659년에 처형) 는 무갈제국의 후계자로 카다리야 단원이었다. 그는 신비주의에 바탕을 둔 이슬람과 힌두교의 만남을 제시했다.
리파이야 교단의 창시자는 아흐마드 알-리파이(1183년 사망)이다. 이 교단은 디크르를 큰 소리로 외치는교단이어서 '괴성을 지르는 더비쉬들'로 알려져 있다. 자해행위와 기괴한 기적행위를 주로 실천했다.
수흐라와르디야 교단은 정치에도 능동적으로 참여했고, 낙슈반디야 교단은 디크르를 침묵 속에 행했다. 쿠브라위야 교단의 창시자 는 나즈무딘 쿠브라(1220/21 사망)로 수피들이 수행 중 체험하는 색깔에 관한 심리학적 해석을 시도했다. 메블레비야 교단은 잘라루딘 루미(1273 사망)의 아들이 조직하여 오스만 제국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활동한 교단이다. 회전무 더비쉬로 알려져있는데 그것은 일종의 음악적 디크르였다. 하지만 체제순응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도시민, 중상층을 주 추종자들로 삼았다. 벡타쉬야 교단은 쉬아적 요소를 수용했는데 오스만 정예군(예니체리)의 종교적 대들보 역할을 했다. 이 교단은 단순하나 강렬한 음률적 시를 특기로 했고 회합에 여성들의 참여를 허락했다. 치슈티야 교단은 무이누디 치슈티(1236 사망)가 창시했는데 현재 인도에서 가장 활동적 교단 중 하나로 음악과 시에 뛰어나다.
이처럼 다양한 수피 교단들은 이슬람 지역 변두리에서 이루어진 개종 과정에서 지대한 역할을 담당했다. 13세기의 수피주의는 몽골 침략과 그로 인한 재난에도 불구하고 수피주의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후기 수피주의
후기 수피즘의 최고의 거장은 스페인 태생의 이븐 아라비(1240 사망)이다. 그는 메카에서 영감 얻어 [푸투하트 알-마키야](메카의 계시)를 저술했다. 그는 와흐다트 알-우즈드(존재의 융합) 개념(본인이 직접 사용한 용어는 아님)으로 유명하다. 그를 범신론자로 보는 경향도 있었지만 아라비는 하느님의 초월성을 의심한 적이 없다. 하느님의 본질은 단일성으로 말미암아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숨겨진 보물이었으니, 알려지기를 원했느니라. 그래서 이 세상을 창조했느니라.", "우리 자신은 하느님을 묘사하는 속성이며, 우리의 존재는 그분의 존재가 객체화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존재하기 위해 하느님이 필요한 반면, 하느님에게는 당신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가 필요하다."
신비주의의 체계화
잘라루딘 루미(1207-사망연도 불명)는 신비주의 신학자였던 아버지 바하우딘 왈라드 사망 후 아버지의 한 제자를 통해 신비주의 전통에 입문했다. 그후 1244년 동년배의 더비쉬 샴수딘 만나 신비적 사랑을 체험했다. 그러나 샴수딘은 루미와의 관계를 시기한 루미의 측근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후 금은세공가 살라후딘 자르쿠브(1258 사망)과의 우정을 나눴고, 제자 후사무딘 첼레비(1284 사망)과 교류했다. 그는 첼레비의 요청으로 26,000 소절에 달하는 신비적이고 교훈적인 이행시 [마트나위]를 남겼는데, 13세기 모든 신비적 관념과 사상 총망라한, 예언자를 찬양하는 내용의 신비주의 시들이었다.
수피주의의 특징
수피주의는 쉬아파와는 달리 순니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부정하지 않았고,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도 침묵했다. 수피즘은 순니 신앙의 엄격함과 울라마들의 냉담한 율법주의를 보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신의 계율을 준수하는데 소홀함을 조장한다는 의심을 사기도 했다. 셀주크조와 오스만 제국 통치 아래서는 수피들의 반란이 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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