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대한민국임시정부] 망명정부 수립서 환국까지(1919∼1945) |
이승만
"親美외교"… 안창호 "실력 양성"… 이동휘 "무장
투쟁![]() [조선일보] 초기 임정을 이끈 세 인물은 대통령 이승만(1875~1965), 국무총리 이동휘(1873~1935), 노동국 총판 안창호(1878~1938)였다. 이들은 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지도자였기 때문에 당시 임정은 ‘삼각정부(三脚政府)’라 불렸다. 이들 세 지도자의 결합은 임정이 지닌 이념적인 좌우합작과 지역적인 연합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들 세 지도자는 출신 배경, 독립운동 노선, 활동 기반, 국제관계에 대한 인식, 리더십 스타일 등 여러 가지 면에서 크게 대비되었다. 이승만은 황해도 평산 출생의 몰락한 왕족 후예였고, 이동휘는 함남 단천의 한미한 아전 집안 출신이었으며, 안창호는 평남 강서의 평범한 농민 출신이었다. 그리고 이승만과 달리 이동휘와 안창호는 전통적인 차별 지역인 함경도·평안도의 평민 출신이었다. 이 같은 지역적·신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 간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조선왕조 말기에 태어난 민족운동 제1세대로서 어린 시절 유학을 공부했고, 서구문명과 기독교를 적극 수용했다. 하지만 1910년 나라가 주권을 상실한 이후 이들 세 지도자의 세력 기반과 독립운동 노선의 차이는 뚜렷해졌다. 이승만은 미국 하와이를 근거로 활동했고 미국식 공화제를 선호한 친미(親美) 외교론자였다. 안창호는 미주 서부지역을 활동 무대로 삼았고 역시 공화제를 선호했으나 외교에 의한 독립 달성에는 회의적이었다. 그는 실력 양성을 통해 독립전쟁 준비를 추구했다. 이동휘는 러시아와 북간도 지역을 지지 기반으로 하였고 사회주의자로 전환한 이후에는 신흥 소련 정부의 지원과 협력을 바탕으로 무장투쟁에 의한 독립 달성을 목표로 했다. 정치 이념적으로 보면 이승만과 안창호는 우파, 이동휘는 좌파에 속했다. 세 사람은 모두 주권을 찾고자 노력한 독립운동가였지만, 이승만은 권력 지향의 정치가, 안창호는 조직 관리에 능한 조직가, 이동휘는 현실타파형의 혁명가였다. ![]() 이들 세 사람은 통합된 임시정부에 대한 입장을 달리했다. 안창호와 이동휘는 통합 임정을 전폭적으로 승인했지만, 이승만은 ‘한성정부’의 법통을 주장하며 통합 임정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유보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했다. 통합 임정 출범 초기에 이동휘와 안창호는 동지적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정국을 주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19년 11월 중순 여운형의 도일(渡日) 문제를 둘러싸고 두 사람 간에 이견이 노출되기 시작했고, 1920년 1월 말 한형권·여운형·안공근을 모스크바 특사로 선정한 것도 동상이몽(同床異夢)의 결과였다. 곧이어 이동휘와 안창호는 이승만과 이동녕·신규식·이시영 등 기호파 총장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 임정은 1920년 2월 26일 구미위원부가 재무부 산하의 미주 지역 재무관서 기능을 갖게 하고, 그 위원인 서재필을 재무관에 임명했다. 아울러 안창호가 이끄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실시해온 애국금 제도를 폐지함과 동시에 구미위원부가 독립공채 발행 권한을 갖도록 했다. 이는 이동휘와 안창호에 대한 이승만의 정치적 승리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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