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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마무리 - 엄상익 변호사

Joyfule 2023. 2. 13. 11:00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아름다운 마무리



나의 의뢰인 중에 한 화가가 있었다. 아이들이 결혼할 무렵까지 참던 그의 아내는 더 이상 못 살겠다고 하면서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화가는 지독히 돈을 아꼈다. 낭비가 없나 하고 냉장고까지 살펴보는 남편에게 아내는 참을 수 없는 굴욕감을 느꼈던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마음은 평생 평행선을 달려온 것 같았다. 화가는 내게 이렇게 자기의 입장을 말했다.

“저는 서너살 때부터 백묵을 가지고 동네 벽이나 길바닥에 온통 그림만 그리곤 했죠. 중 고등학교시절 미술반을 했고 미대를 갔어요. 미대를 졸업하고 작은 백화점 미술실에 취직을 해서 일했어요. 한번은 사장하고 어디를 갔다 오는데 도중에 버스 타고 가라고 하면서 동전 몇 개 던져주더라구요. 그 인색함을 보고 부자는 이래서 부자가 되는 구나 하고 느꼈죠. 저는 박봉을 저축하면서 살아왔어요. 지금도 몇 푼 안 되는 그 돈이 없으면 길거리에서 쓰러져도 누구 한 사람 보살펴 줄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무섭게 절약을 한 거죠. 아내는 그런 내 입장을 몰라요. 이혼은 거기서 시작된 거죠.”

돈은 그의 생명이었을 것이다. 그런 남편이 어느 순간 스스로 자기의 아파트와 통장을 아내에게 다 주고 소송을 끝내면서 말했다.

“아이들도 결혼을 시켰으니까 이제는 조용한 실버타운으로 가서 혼자 그림을 그리면서 살다가 죽으려고 합니다. 이제 많이 살아야 십 년 아니겠습니까? 결국 제가 이렇게 된 것도 돈을 못 벌어서죠. 그림쟁이의 가난을 이해해 줄 여자를 만나야 했었는데 제가 판단을 잘못하고 너무 외부적인 기준만 찾았던 거죠.”

쩨쩨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푼돈도 아끼던 그가 변한 것 같았다. 화가로서의 성공과 실패도 더 이상 그의 관심이 아닌 것 같았다.

나와 가까이 지내던 대학 후배가 있다. 변호사를 하던 그 후배는 공천을 받고 국회의원선거에 나갔다가 아슬아슬한 차이로 두 번인가 세 번인가 떨어졌다. 그 후배는 고시공부를 할 때도 오뚜기처럼 도전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합격을 했다. 그는 국회의원선거도 노력하면 된다는 자세로 임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은행에서 수십억을 대출받아 서초동에 빌딩을 샀다. 그는 빌딩 건물 앞에 고향의 오래된 절터에 있던 돌조각상과 돌두꺼비를 세워놓았다. 좋은 운이 오라는 무속적인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어느날 장례식장에 조문을 갔다가 나오던 나는 바로 그 옆방 입구에 붙어 있는 그의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가 죽은 것이다. 그의 장례식장은 공허했다. 영정사진 속에서 그가 허탈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삶의 마무리를 제대로 짓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를 보면서 나는 인생의 아름다운 마무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모든 걸 내려놓아야 하지 않을까. 하던 일들의 결과나 세상에서의 성공과 실패를 뛰어넘어 자신의 순수존재에 이르러야 하지 않을까. 내려놓음은 내면의 연금술일 것 같았다. 노년의 아름다움은 모든 일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남에게 양보할 수 있는 너그러움에 있을 것 같다. 나는 평안한 황혼을 즐기는 노인들을 보고 있다. 산책을 하고 온천을 하면서 즐기고 있다. 밤이 오기 직전의 아주 짧은 쉬는 기간인 것 같다. 그 과정을 잡지 못하고 병원으로 간다면 그 이후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닐 것이다.

실버타운의 노인 중에는 가지고 있던 물건을 미리미리 하나씩 남에게 주는 분들이 있다. 살아서 줘야 좋아하지 죽은 후에는 꺼림칙해서인지 받기를 꺼린다는 것이다. 우리 부부도 그 노인들한테서 배웠다. 가지고 있던 것들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고 있다. 집에 있던 귀한 단지도 박물관에 주고 경매로 샀던 그림도 주고 조상 때부터 내려오던 뒤주도 주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인 것 같다. 채움만을 위해 달려온 생각을 버리고 비움에 다가서야 하지 않을까. 물질만 비우는 게 아니라 정신도 비우려고 하고 있다. 빈자리가 생겨야 그곳으로 진리도 성령도 들어올 수 있을 거 같다. 이따금씩 갑자기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간 적이 있었다. 배 위에서 죽음도 그런 갑작스런 항해 비슷한 게 아닐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 어디에도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순례자나 여행자가 될 마음의 준비가 있어야 할 것 같다. 가야 할 때를 알고 언제든 떠날 채비를 하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다울 것 같다. 하나님의 선물로 내 생애를 즐기면서 언제든 떠날 채비를 하는 게 아름다운 마무리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