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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매일이 인생 - 엄상익 변호사

Joyfule 2023. 2. 12. 00:23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매일 매일이 인생



실버타운 내에서 노인들이 즐거움을 찾아 노력하고 있다.정년퇴직을 한 중학교 선생님 부부는 스타렉스 내부를 개조해 캠핑카를 만들어 틈틈이 동해안의 갯마을을 돌아다니고 있다. 전자공학과 교수로 퇴직한 분은 마을의 피아노 치는 카페주인에게 레슨까지 받아 가면서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 활을 쏘기도 하고 주민센터에 가서 악기를 배우는 분도 있다. 몇 시간씩 방안에 앉아 성경을 필사하는 부인도 있다. 욕망과 야망과의 전쟁이 끝난 노인들에게 어떤 목적에 매이지 않는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오는 것 같이 보인다. 실버타운 내에 미국에서 오십년 살다가 돌아온 우리 나이 구십의 노인과 이따금씩 차를 나누며 대화를 한다.

그는 미국의 서부 바닷가 실버타운에 있다가 한국의 동해바닷가에 와서 마지막 삶을 사는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미국의 교포들이 마지막에 다시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살고 싶다고 해요. 그렇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백명중 한 명도 안될 거예요. 자기 생활의 굴레에서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해 그러는 거죠. 좋은 집에 번듯한 차를 굴리고 제대로 된 좋은 골프장에서 운동을 하면서 사는데 그런 걸 포기하는 게 엄두가 나지 않는 거죠. 그렇지만 차와 집과 들여놓은 온갖 잡동사니 살림에 묶여서 끌려가는 건 어리석음이예요. 골프를 못치면 어떻습니까? 차가 없으면 어때요? 용기를 내고 마음먹기에 달렸어요.”

미국만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돈에 일에 고정관념에 묶여 있으면 기차로 두시간 거리인 동해로 오기가 불가능하다. 나는 노인의 다음말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매일 클래식을 들어요. 잠들 때도 음악을 틀어놔요. 음악은 내 주변의 공기에 색감을 주는 것 같아요. 나는 음식을 조금씩 먹어요.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만큼만 먹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위에 음식물이 쌓이고 비만하게 되죠. 무리는 하지 않지만 쉬지 않고 꾸준히 천천히 운동을 해요. 여기 실버타운에서 노인들이 파크골프를 치는데 내가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노인 중에 제일 뒤쪽 등수였어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어요. 차츰차츰 등수가 올라가고 엊그제 시합에서는 마흔 한명중 오등까지 올라갔어요.”

조금씩, 천천히, 꾸준히라는 말은 들을 만한 지혜였다. 노인은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

“내 나이에 내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그런지 하루 삶의 밀도가 예전의 일년과 맞먹는 것 같아요. 하루하루가 나의 일생이라고 생각하니까 밥도 맛있고 나물도 맛있어.”

인생의 이막까지는 삶의 무대에서 어떤 배역을 맡느냐가 목표였지만 삼막에서는 그게 아닌 것 같다.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 자유롭게 사는 게 잘 사는 것 같다. 나도 어떤 일을 할 때 ‘그게 내게 즐거운 것인가?’를 기준으로 결정한다. 공자님의 말씀대로 멀리서 찾아와 주는 친구가 반갑고 감사하다. 어제도 찾아온 친구 부부와 묵호등대주변을 산책하고 툭 터져 나간 드넓은 청담색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까페에서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었다. 밀도 있는 진한 즐거움이다. 서울에서 손녀와 손자가 엄마아빠와 함께 찾아왔다. 포구의 작은 단골 식당에 주문해 두었던 대게와 회를 함께 먹을 때 행복했다. 

성경 속 솔로몬은 노동해서 얻은 돈으로 가족과 먹고 마시는 게 인생 최고의 즐거움이라고 했다. 묵호의 작은 책방에서 사온 박노해 시인의 신작 시집과 소설가 김훈의 ‘하얼빈’이라는 작품을 조금씩 천천히 읽는다. 어젯밤에는 육십사년전 신상옥 감독이 만든 흑백영화를 보았다. 

내가 다섯 살 때의 세상이었다. 전쟁 중에 부서진 공장터가 그대로 남아 있고 거리에는 미군병사들이 찦차에 앉아 빨간 코카콜라 캔을 들고 있었다. 내 영혼이 그 시절로 돌아가 먼지가 이는 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내 간소한 살림 속에서 피어나는 나직한 생각들을 글로 만들어 이웃과 나누는 일도 즐거움이다. 


하루하루가 나를 형성한다. 

그리고 온도를 형성한다. 그 온도가 이웃으로 번졌으면 좋겠다. 젊어서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게 전부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고 있는 그 걸음이, 매일매일의 생활 그 자체가 절대적인 것이었다. 병이들면 환자로서도 매일 매일을 중요하게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소중하게 매일을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매일매일 이외에 달리 인생은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