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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범 수첩` 떨었던 이재용 풀려나고, 안심했던 신동빈 구속된 이유는

Joyfule 2018. 2. 18. 17:44

 

[판결 디테일] '안종범 수첩' 떨었던 이재용 풀려나고,

 안심했던 신동빈 구속된 이유는

  • 조선일보

이재용 측 2심에서 “수첩이 증거되려면 박근혜가 검증해야” 주장→집행유예
신동빈 측 1심에서 “안종범 수첩에 적힌 바 없다” 주장→법정구속

‘국정농단’ 사건의 뇌물죄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재벌 총수들 처지가 180도 달라졌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서울 한남동 자택에서 설을 보내는 반면,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경기도 의왕 서울구치소에 수감돼있다.

안종범 전 청와대 수석의 업무수첩. /조선일보DB

 

◇이재용, 신동빈 둘 다 ‘뇌물죄’ 혐의

두 재벌 총수 모두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뇌물’을 건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 현재 처지는 크게 다르다. 지난 13일 법원은 신동빈 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과 ‘거래’를 했다고 보고 1심 선고가 끝나자 법정 구속했다. 지난 5일 이재용 부회장 2심 재판에서는 이 부회장을 대통령의 청탁에 굴복한 ‘피해자’로 보고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를 선고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검찰·특검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두 재벌 총수가 각각 단 둘이 만난 자리에서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결정적 증거’는 확보하지 못 했다. 남은 것은 간접 증거.

간첩 증거 중 가장 강력한 것은 ‘사초(史草)’, ‘종범 실록’이라고 불렸던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업무수첩이었다. 이 부회장의 2심 재판부는 이 수첩의 증거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고, 신 회장의 1심 재판부는 인정했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을까. 혹 이 부회장을 변호한 법무법인 태평양과 신 회장을 변호한 김앤장 법률사무소가 펼친 전략이 달랐기 때문은 아닐까.


 
지난 2월 5일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조선일보DB

 

◇ 태평양 “수첩, 증거로 쓰지 말라→수첩, 전문증거에 불과” 전략수정

태평양은 1심에서 검찰의 수첩 입수 과정 등을 문제삼아 줄곧 증거채택에 반대하는 전략을 폈다. 1심 재판부는 ‘수첩’에 대해 수기 내용이 진실인지 여부와는 관계없이 날짜와 수기내용 자체는 하나의 사실이라며 재판에 참고할 정황증거(간접증거)로 채택했다.

1심 재판부는 ‘수첩’을 안 전 수석이 직접 경험한 일을 기재한 ‘본래증거’로 보고 증거능력을 인정했다. 묵시적 청탁도 인정해 징역 5년을 선고했다. 본래(本來)증거는 법정에서 증거능력이 있는 반면, 구전에 의한 전문(傳聞)증거는 체험자의 직접진술이 아니라 전해들은 말로서 전문증거법칙에 따라 증거능력이 없다.

태평양은 2심에서 전략을 바꿔 ‘수첩’이 구전(口傳)에 의한 전문증거이므로 증거능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태평양은 ‘수첩’의 증거능력을 깨는 전략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끌어들였다. “수첩 내용이 다른 사람에게 들은 말을 적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발언자인 박 전 대통령이 내용을 확인해 주지 않는 이상 증거능력을 얻을 수 없다”는 논리다. 또 전언(傳言)이 증거능력으로 인정되지 않은 국내외 판례를 근거로 들었다.

태평양은 "안 전 수석은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의 단독 면담에 참석한 적도 없고 사후에 박 전 대통령에게 들은 말에 의존해 그야말로 전언을 통해 수첩을 쓴 것”이라며 “원진술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쓴 재전문 혹은 재재전문 증거에 불과해 그 자체로 증거능력이 있다고 볼 여지가 없다"고 주장했다. ‘박 전 대통령을 불러 수첩에 적힌 내용이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박 전 대통령은 끝내 이 부회장 재판의 증인으로 나오지 않았다.

2심 재판부는 변호인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수첩’은 안 전 수석이 전해들은 말을 기술한 전문증거로 증거능력이 없으며, 그가 수첩과 관련해 법정에서 한 진술도 진실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2심 재판부는 “수첩을 간접사실에 대한 증거로 인정하면, 전문증거가 우회적으로 진실성 증명의 증거로 사용되게 되고 이는 전문법칙의 취지를 잠탈(潛脫)한다”고 했다. 결국 2심은 ‘부정한 청탁’의 존재를 부정하고, 삼성이 최순실씨 딸 정유라에 승마지원으로 쓴 36억원만 뇌물로 인정했다. 재판부는 “청탁이 없었고, 정치권력 요구에 수동적으로 응하게 됐다”고 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지난 13일 1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서울중앙지법에 출석하고 있다./조선일보DB

 

◇ 김앤장 “수첩에 이름 없다”...수첩 밖 ‘안종범 진술’에 발목

신 회장은 면세점 특허 취득과 최순실씨가 요구한 K스포츠재단 70억 추가 지원을 맞바꾼 혐의(뇌물공여)로 기소됐다.

김앤장은 ‘수첩’을 “부정한 청탁이 오간 적 없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로 썼다. ‘안종범 수첩’에 면세점 관련 내용이 전혀 적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이다. ‘신 회장이 안종범 수석에게 면세점 허가와 관련해 부탁을 한 적도 없고, 박 전 대통령이 안 전 수석에게 지시한 적도 없기 때문에 수첩에 적힌 내용이 없다. 부정청탁은 없었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안 전 수석은 검찰에 이렇게 진술했다. “지난 2016년 3월 11일 신 회장과 오찬 자리에서 폐점 위기에 처한 롯데면세점 월드타워점 직원들의 고용문제를 이야기했고, 이를 박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신 회장의 1심 재판부는 신 회장 측이 아닌, 안 전 수석의 ‘증언’에 더 비중을 두었다. 안 전 수석이나 신 회장의 법정 진술 등 수첩 바깥에 존재하는 정황까지 모두 더하면, 오히려 신 회장 측 주장을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신 회장은 (대통령에게) 면세점 이야기를 한 바 없다고 진술했으나 안 전 수석은 면세점 이야기를 듣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다고 진술했다”면서 “안 전 수석이 면세점 외에 신 회장과 나눴다고 한 이야기가 더 있는데 이들 모두 객관적 증거나 신 회장의 진술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했다. ‘다른 이야기’는 다 했다면서, ‘면세점 이야기’만 쏙 뺀 것이 오히려 발목을 잡은 셈이다.

재판부는 “롯데에서 안종범 피고인을 집중 설득 대상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점, 면세점 허가가 당시 롯데 최대 현안인 점을 감안하면 기업 회장이 경제수석을 만나 애로사항을 전달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고, (안 전 수석이) 거짓말할 이유도 없다”고 덧붙였다.

결국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이 안 전수석으로부터 롯데 면세점 이야기를 여러 차례 보고받고, 지시도 해 면세점이 롯데의 핵심 현안인 점을 잘 알았을 것”이라며 “그런 가운데 대통령이 (최순실 측 요구대로) 추가지원을 요구한 것, 롯데로서는 특허 취득 여부를 확신하기 어려웠고, 지원 요청에 응한 기업 역시 롯데가 유일한 점에 비춰보면 신 회장도 현안 관련 대통령의 직무상 영향력이 유리한 방향으로 행사될 것을 기대했다”고 했다. 박 전 대통령과 신 회장 사이에 부정한 청탁을 인정한 것이다.

결국 ‘(이재용의) 이름 적힌 수첩’의 법적지위를 공략한 이재용 부회장 측과 ‘(신동빈의) 이름 적히지 않은 수첩’을 믿었던 신동빈 회장 측은 다른 처지에서 ‘설 명절’을 보내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