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신앙인물

양용근 신사참배 반대로 광주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다 순교

Joyfule 2009. 3. 6. 03:20

양용근 신사참배 반대로 광주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다 순교

1905 - 1943 장로교 목사, 순교자, 교육자,
전남 광양군 진월면 오사리 출생

1. 목회에 투신 결심

양용근 목사는 전남 광양군 진월면 오사리에서 출생하였다. 호적상의 이름은 용환이라고 되어있으나 교회에서 용근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양용근 새 시대를 열어갈 열망에 부푼 꿈을 안고 신학문에 대한 동경에 순천에 나가서 공부를 해야 되겠다고 다짐하고 매산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어지만 이 학교에서 입학하여 공부를 하게 되면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본으로 유학의 길에 올랐다. 이리하여 일본의 니혼에서 법률을 전공하였다.

그런데 왜 법률 계통에서 꿈을 실현하리라는 본래의 의도를 꺽고 왜 신학을 입학하였던가?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라는 것이 그가 일본에 유학하고 있을 때 소위 관동 대지진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것이 1923년의 일이었다. 일본 현지 토오쿄오(동경)와 요코하마 일원에 걸쳐 대지진이 일어났다.

간악하기가 이를데 업는 일본 위장저들은 이 큰 대지진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을 수습할 계책을 꾸며 한국인을 그 제물로 사용하기로 한 끔직스러운 대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인들의 이곳에 6천여명의 우리 교포에게 무차별 대학살을 자행하는 소름끼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은 한국인들이 대폭동을 일으켜 방화하였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이와 같은 참변을 당하게 만들었다. 마치 네로 황제가 로마의 대화재를 그리스도인들에게 방화범의 허물을 씌워 기독교를 박해하던 일이 금세기 일본에서 일어났는데 이 화를 우리 민족이 당하게 되었다. 여기서 지진 사건 자체도 자체려니와 여기에다 교포 대학살 사건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게 된 양용근은 내 생명을 구해 주신 하나님께 남은 생을 주께 바치기로 서약하고 여기서 일생을 목회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이것이 동기가 되었다.

2. 교육과 목회에 헌신

이리하여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다. 곧장 고향인 광양군 진월면 오사리로 돌아온다. 돌아오자마자 가산을 있는 대로 정리하여 고향 마을에다가 배울 수도 없고 배우지 못한 가난과 불운에 빠져있는 후진을 양육하기 위하여 오사학원이라고 간판을 걸고 학교의 문을 열었다. 교과목은 민족혼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한국사와 자존이란 없다는 신념으로 한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 인격양성이니 이를 위해 성경을 주요 과목으로 공부시켰다.

1930년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고향에서 이같이 헌신 봉직하다가 이미 계획하고 있었던, 하나님과의 서약을 지키기 위하여 평양에 있는 장로회 신학교에 1933년에 입학을 하게 된다.

그러나 아마 학교도 교회도 열심으로 돌보기 되자니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되지만 어쨌든 신학을 졸업하기까지는 만 6년이나 걸려서 1939년에야 졸업을 하게 되었다. 장로회신학교 제34회의 졸업생이 되어 졸업하던 그해 순천노회에서 나덕환, 안덕윤과 함께 목사안수를 받게 되었다.

목사가 되면서 그의 고향인 광양읍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첫 목회에 짐을 풀었다. 그후에 여수에 있는 해양원교회로 옮겨 시무하였다. 가난한 자와 병든 자와 복음인 이 사랑을 가난한자와 약한 자들을 위하여 재산을 털어 오사학원을 열고 교육에 투신한 바가 있었는가 하면, 이번에는 병들고 소외된 불쌍한 자들을 위하여 애양원교회에서 성역을 감당하다가 다시 고흥에 있는 길두교회에 거쳐서 구례읍 교회에서 시무하였다.

3. 일제에 항거하다 순교

이때에 일제는 그 말기에 접어들면서 더욱 민족교회들을 들볶고 못살게 굴었다. 이러는 중에 제일 못할 일은 제1,2,3게명을 모두 범할 이른바 신사참배 강요였다. 우리 교회가 일본의 잔인한 박해를 받아온 역사는 일본의 이 신사참배 강요에서 그 절정에 달하였다.

이것은 일본 저희 왕이나 무사들의 영을 섬기는 신사에 전국민을 참배하게 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그 충성을 시험했고 이같은 국민의례를 통하여 저들 군국주의의 정신적 단결을 도모하려는 간악한 야심의 소행이었다. 물론 이것은 장로교회에서는 전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 철저했다. 1931년 9월 경남노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결의안이 통과되고 이를 부산일보가 보도하여 큰 화제가 되었다.

1936년 초에 장로교 선교사들은 선교실행위원회를 소집하여 기독교 학교의 폐쇄를 원칙으로 삼고 절대반대운동을 펴다가 1938년에야 평양 내외 학교와 연희전문과 세브란스의전 및 정신학교들이 자진 폐교하면서 결사 반대의 뜻을 굳히고 일보 선교사들은 출국 명령을 받기도하는가 하면 1938년 전국의 노회가 모이기 시작하자 일본의 조직적 파괴공작으로 각 노회는 개회벽두에 우선 신사에 몰려가 참배를 솔선수범하도록 강압을 가했다.

순천노회가 여기 첫 희명을 울렸다. 이로써 순천노회는 1941년에 2차에 걸쳐 목사,장로를 구속하였고 또 거기에 순천 중앙교회를 중심하여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모임인 원탁회 사건이 발생하게 되자 순천노회 소속 목사와 장로들이 모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 뜨거운 신앙심과 민족의식이 남달리 투철해떤 양목사는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의 인면수심의 극악한 만행을 목격한 그로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가는 곳마다 이를 역설하던 중에 1940년에 고흥 지방의 연합 도사경회에서 이 신사참배 반대를 주장하였다. 이것이 결국 반일사상과 불경죄로 체포되어 광주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다가 해방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1943년 차가운 12월 5일에 신절을 끝까지 지키면서 영광스럽게 생의 최후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