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길 - 한동희
팔순을 넘긴 친정 어머니가 내 집에 오신지 넉 달이 된다. 몇 해 전부터 딸네 집에 오시면 "이번이 마지막 다녀가는 길"이라고 하시어 마음이 언짢았지만 그 마지막 길이 삼 년이나 이어져 위로가 되곤 한다. 그러나 이제는 어머니의 건강이 예전과 같지 않다. 지난해에 서른 여덟으로 이 세상을 뜬 아들을 가슴에 묻고, 또 다시 여러 달 째 의식 없이 병원에 누워 있는 큰 딸로 인해서 어머니의 눈에는 물기가 마를 날이 없다.
그런데 어머니는 마음놓고 우실 만한 장소도 없다. 어머니의 터전이었던 친정 집이 도시계획에 밀려 철거되었을 때는 그래도 여러 자손들 집을 돌며 몇 달씩 묵으면 남은 세월은 여행하듯 즐거우리 라던 기대도 꿈같지 만은 않았다. 그러한 어머니를 보며, 그간 출가외인이라는 핑계로 어머니께 무심했던 자책과 돌아가시기 전에 한 번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보고 싶다는 소망이 일었다. 내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어느 날 불현듯 남편은 차를 몰고 가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
나는 모처럼 어머니와 다정히 앉아 정담을 나눈다. 어머니는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외삼촌들과 어울려 지내던 유년시절을 떠올리기도 하고, 아버지가 어머니를 선보러 왔을 때 칙간에 숨어서 새신랑 될 사람을 훔쳐보던 일을 들려주신다. 어머니는 고추당초처럼 맵디맵던 시집살이의 서러움과 서해바닷가 고향 사람들과의 정겹고 서운했던 일들, 친정 동네 과일가게 아주머니의 고마운 인정까지 끝없이 회상을 떠올린다. 어머니의 이야기 중에는 내 어릴 적 모습이 묻어나오기도 하는데, 나를 낳고 첫 국밥을 손수 끓여 먹고 빗물을 받아 기저귀를 빨았다는 대목에 이르면, 어머니께 공연히 송구스럽고 그 진한 모정에 목젖이 아려온다.
어머니의 이야기는 다시 내가 대여섯 살 적, 시흥에 살던 때로 돌아간다. 어머니는 어느 날 세상일 접어두고 '검지산'에 올라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내가 어머니를 찾아 헤메는 모습이 보이더란다. 우리집과 친척집을 잇는 신작로를 따라 지나가는 달구지를 얻어 타고 수없이 왔다 갔다 하는 내 모습이 석양에 비쳐와 다시 산을 내려왔다는 어머니. 그 정경을 눈앞에 그려보면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아 감동에 젖어 들게 된다. 어머니가 살아야될 이유는 오직 자식 사랑하는 마음에 있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말벗이 그리웠던가 보다. 어머니의 이야기는 이미 몇 번 씩 들은 것들이어서 어떤 때는 건성으로 들으며 헛 대꾸를 해도 마냥 즐거워하신다. 그러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나는 짐짓 어린애가 되어본다. 외출에서 돌아오면 어릴 때처럼 엄마를 부르며 문 열어달라 하고, 엄마와 목욕도 하고 한 이부자리에 누워 어머니의 젖가슴을 어루만지며 잠도 잔다. 어머니의 굽은 허리, 앙상한 몸매, 고르지 못한 숨소리가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곁에 계시다는 게 다행스럽고 든든하다. 나는 입속으로 가만히 어머니를 불러본다, 아무리 나이 먹어 어른이 된다 해도 어린애처럼 부르고 싶은 '엄마'라는 이름.
햇볕이 따듯한 날, 어머니와 나는 산책 나갈 채비를 한다. 나는 주섬주섬 먹을 것을 챙기고 어머니는 거울 앞에 앉아 치장을 한다. 단정히 빗질한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집에서는 불편하다고 쓰지도 않던 안경을 걸치시는 어머니. 어머니는 어머니이기 이전의 여자로 돌아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진지하고도 행복한 시간을 맞고 있는 것이리라. 어머니의 산책거리는 집 앞에 있는 공원이지만 지팡이에 의지해 걷는 어머니의 발걸음은 십리 길과도 같다. 집 안에서는 내가 엄마라 부르며 어리광을 부리지만 집밖에 나오면 이제는 내가 어머니의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
어느 결엔가 어머니의 곁에는 어머니와 같은 노인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노인정에서도 반겨주지 않는 몸이 불편한 노인들은 숨겨둔 외로움을 꺼내어 동병상련(仝病相憐)의 아픔을 위로하며 떠날 날을 기다린다. 손에 쥔 것 다 남겨주고 떠나는 낙엽 같은 노인들. 이제 머지않아 나도 어머니와의 이별을 맞이해야 될 것이다. 젊은 나이에 먼저 간 동생의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배반이다. 하지만 동생이 어머니보다 먼저 떠난 것도,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신 것도 저마다 타고난 운명이다.
어머니와 공원벤치에 나란히 앉아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에는 갖가지 모양의 구름들이 모였다가는 흩어지고, 흩어졌다가는 다시 모여 어디론가 흘러간다. 어머니와 공원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 볼 때마다 만남과 이별이 화제가 되어 강하고 슬프고 아름답게 살아온 어머니의 길을 생각하게 된다. ( 1997. 5 )
수필가. 한국수필로 등단 . 한국수필가협회 부이사장 . 작품집 '소금꽃'등 한국수필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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