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땅 - 이경림
해가 지면서 인의산에 산 그림자가 제일 먼저 드리워졌다.
하루 동안 개간한 땅을 돌아보며 곡괭이, 삽, 쇠망태기 등을 주섬주섬 바지게에 담던 아버지. 정강이께 말아 올린 바지를 데룽거리며 얼마 남지 않은 노을에 당신의 긴 그림자를 앞세워 마을 어귀를 넘어 오시곤 하였다.
마당에 들어서는 아버지의 인기척은 늘 같았다.
헛간에 지게를 부리는 동안 나는 샘가로 달려가 아버지의 표정을 살피며 황급히 두레박질을 했다. 샘 벽에 부딪쳐 올라온 두레박에는 이끼가 떠다니고 물이 반쯤 담겨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 정도의 물로도 만족스러워 했다.
일꾼을 사지 않는 공일에는 개간이 덜된 거친 땅으로 우리들을 데려가곤 했는데, 흙속에 굴러다니는 돌맹이들을 망태기에 담아 밭둑에 갖다 부리는 일이었다. 더운 여름철에는 손톱이 때가 낀 채 닳아졌고, 겨울이면 흙 묻은 손이 트고 갈라진 속살에 피가 맺혔다.
나무뿌리나 풀뿌리가 뽑히다 만 너절한 땅은 건조하고 척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곳에 수백 개의 구덩이를 파냈다.
발효된 인분과 퇴비를 넣고 땅심을 돋은 후, 천여 개의 박 씨를 심은 것이다. 며칠이 지나자 두어 개의 갸름한 떡잎이 앙증맞게 솟아올랐다. 그들은 비만 오면 쑥쑥 자라서 드넓은 황무지는 금세 녹 빛 물결로 출렁거렸다.
초여름 저녁쯤이면 박 넝쿨에 어스름이 감겨들고 심지 돋워 꽃불 밝히는 히디힌 박꽃의 향연으로 인의산 자락 아버지 땅은 다음날 새벽까지 백야(白野)가 되곤 하였다.
장마가 오기 전 며칠 동안은 암꽃 수술을 찾아 수꽃으로 인공수분을 해야 했다. 아침이슬이 날아갈 무렵부터 저물 때까지 분가루 묻히는 작업으로 아버지는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하셨다. 또한 계속해서 열리기 시작하는 박이 둥글게 클 수 있도록 짚이나 마른 풀로 똬리받침을 만들어 박 한 개 한 개에 애정을 쏱았다.
여름 뙤약볕에 커진 박은 보름달만 해지고 넝쿨이 말라 따내야할 박을 골라내는 일은 재미있었다.
우리들은 바늘을 가지고 다니면서 껍질을 찔러보아 들어가지 않으면 바로 따내어 한 곳에 모아 두곤 하였다.
박을 타는 날은 마당이나 마루가 쪼개어진 박들로 가득 찼고, 박 속 나물을 가져가는 사람들과 삶아진 박 거죽을 긁어 벗기는 사람들로 소란스러웠다.
그러나 집에서 사용하는 바가지 말고도 염전에서 소금 쓸어 담는 일에 유난히 큰 바가지가 필요하다는 걸 듣고 시작한 일이었다 한다. 그러나 그 해 처음으로 플라스틱 바가지를 염전에서 이미 사용하고 있는 까닭에 헐값에 넘길 수밖에 없었단다.
아버지의 꿈은 그 땅에 목장을 만드는 것이었다.
청년시절을 일본에서 보냈던 아버지는 그곳에 유리창이 많이 달리고 미닫이문이 있는 일본식 집을 짓고 싶어 했다. 많은 식솔들의 생계 때문에 꿈은 늘 희망으로 남겨지고 해마다 땅 심을 돋워 특용 작물을 재배하였다.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고, 한 겨울 비닐을 씌워 기른 꽃상추를 비싼 값에 팔기도 하고, 얇게 절단한 고구마를 말려 수십 가마씩 수매하여 가계를 돌보셨다.
동네 정자나무 그늘은 마을 사람들의 단골 쉼터였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를 그곳에서 한 번도 본적이 없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아버지를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으로 여겼다.
개간한 땅은 더욱 넓어지고 뒷등(아버지 땅을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에서 우리는 늘 아버지와 같이 일을 했다.
철이 들면서 나는 막걸리 한 잔을 들이 키고 봉초담배를 말아서 피우는 아버지의 모습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깊숙이 빨아들여 내 뿜은 담배 연기 속에는 아버지의 한숨도 묻어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의 시선은 영산강 너머에 있었다. 그리고 말없이 술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나는 그 강변에 어머님이 묻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애써 마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는 일 년을 하루같이 아니, 사십년을 하루같이 어머니와 애정을 수수하느라 그 땅을 한시도 떠날 수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이젠 연로하신 아버지, 누가 그곳의 땅 심을 계속 북돋고 씨를 뿌릴지 모르겠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유유히 흐르는 저 영산강 물과 고즈넉이 누워 계신 어머니의 넋은 아버지 홀로라도 든든하게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수필가. 한국수필작가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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