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가슴시린 사랑의 한 장면
남청색 바다 위에 진초록의 나무들이 우거진 남태평양의 작은 섬이다. 바닷가에 가난한 원주민들의 원두막 같은 양철집들이 보인다. 그중 한 집에서 오십대쯤의 남자가 나와 물가에 묶어둔 모터를 단 일톤 정도의 작은 배에 오른다. 그는 한국인이었다. 각진 턱에 작은 눈이다. 그 눈빛이 선해 보인다. 그가 모는 배가 물거품을 뒤로 뿜으며 달리기 시작한다. 한 시간쯤 달려 간 바다 위에 그는 배를 세웠다. 맑고 투명한 녹색의 바다속이 투명하게 보인다. 바닥에 하얀모래와 포도주색의 크고 작은 바위들이 물결과 빗살에 일렁거리고 있다. 낡은 셔츠와 빛바랜 수영복차림의 그는 물안경을 쓰고 발에 물갈퀴를 단 채 바다 속으로 들어간다. 물속을 한참 헤매다 배로 돌아온 그의 손에는 큼지막한 바닷가재가 들려 있다. 다시 그는 물결치는 바다 속으로 잠수해 들어간다. 그는 혼자서 일곱시간 동안을 쉬지 않고 바닷속을 돌아다니며 바닷가재를 찾고 있었다. 수면위로 바람이 불어 바다가 점점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멀리 바닷가 바위로 파도가 밀려간 파도가 검은 바위에 부딪쳐 하얀 포말로 허공에 솟구치고 있었다. 아름다운 남태평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외롭고 험한 생존의 터전 같았다.
그가 다시 섬으로 돌아와 자기가 사는 집으로 들어갔다. 바닷가 나무를 잘라 기둥으로 해서 양철을 붙이고 야자수 잎으로 지붕을 덮은 엉성한 집이었다. 그가 들어간 집 안에는 거무스름한 피부의 원주민아내와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어린 딸들이 활짝 웃으면서 그를 맞이했다. 그는 그렇게 바닷가재를 잡아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외항선원이었다. 우연히 팔라우 섬에 들려 몇 년 일하다가 원주민 처녀와 사랑에 빠졌다. 그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났다. 그곳을 떠나야 할 시간이 됐다. 도저히 아내와 딸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버리고 떠날 수 없었다. 그는 그곳에 남기로 했다. 세월이 흘러 어느새 그의 머리가 희끗희끗해 지기 시작했다. 남태평양에 있는 작은 섬은 고독을 상징한다. 원주민들 속에 유일한 한국인인 그는 사람들 사이의 고독한 섬이다. 그는 혼자서 바다로 나아가 하루종일 고독한 작업을 하며 살아왔다. 그가 일을 하는 바다의 고독하고 쓸쓸한 기운이 화면 저쪽에서 내 가슴으로 불어오는 것 같았다. 남태평양의 섬에도 새해 설날이 찾아왔다.
거무스름한 피부의 그의 어린 딸들이 아버지가 구해온 처음 보는 한복 치마와 저고리를 입었다. 그리고 앞에 앉은 아버지에게 엎드려 절을 했다. 그 아이들의 마음에는 먼 나라에서 와 험한 일을 하면서 키워준 아버지가 영원히 마음에 남아 있을 것 같았다. 팔라우 섬에 사는 한국인 남자를 소개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본 광경이었다. 그게 우리들 한국인의 가슴속에 있는 사랑의 원형이 아닐까. 써머셋 모옴이 쓴 태평양의 섬에서 있었던 외항선원과 원주민 처녀의 사랑을 소재로 한 단편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잘생긴 젊은 백인 선원과 섬에 사는 원주민 처녀가 깊은 사랑에 빠졌다. 배가 다시 출항을 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두 사람은 이별의 고통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마침내 선원인 남자는 계약규정에 매여 그 섬을 떠나게 됐다. 세월이 흘렀다. 노년의 선장이 된 그 남자는 다시 그 섬을 향해 간다. 그는 상상 속에서 젊은 날 사랑을 불태우던 새까만 눈동자의 원주민 처녀를 다시 만난다.
그녀는 시간의 바다 위에 떠서 해맑은 표정의 소녀로 늙지 않고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다. 섬에 도착한 선장은 자기가 사랑하던 처녀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아무도 그 처녀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다. 다시 배가 떠날때가 됐다. 그는 부둣가 레스트랑 앞에 파이프를 물고 먼 수평선쪽을 바라보며 망연히 앉아 있다. 그때 레스트랑의 뒤쪽에서 한 원주민 여성이 물걸레로 바닥을 닦고 있다. 터질 듯 비대한 몸을 가진 늙은 여성이었다. 그녀가 바로 그 선장이 찾아 헤매던 젊은 날 사랑을 불태우던 주인공이었다. 그는 그녀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 역시 머리털과 수염이 하얗게 바래고 아랫배가 툭 불거져 나온 노인이 된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 단편소설을 쓴 써머셋 모옴은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던 것일까. 서양의 사랑은 불에 타서 재가 되어 없어지는 건 아닐까. 그에 비해 동양의 사랑은 서로 녹아 물이 되어 하나로 합쳐지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도 없는 바다속에서 외로운 노동을 하는 한국인 남자와 그를 기다리는 아내와 딸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에서 나는 작지만 위대한 사랑과 희생과 감사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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