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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글 빵'만들기

Joyfule 2023. 6. 15. 13:49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글 빵'만들기



새벽이다. 창 밖의 동해는 바다와 하늘이 농밀한 어둠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있다. 날카로운 칼로 잘라낼 수도 있을 것 같은 질감을 가진 어둠이다. 그 밤바다에 하얀 불빛들이 흩뿌려져 있다. 고기를 잡는 배들이다. 수면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얼어붙은 바람을 맞으면서 그들은 그물을 끌어올려 은빛 나는 고기들을 거두어들인다. 어둠과 공허속 그들의 구체적 생존은 어떤 관념보다 위대하다.

어제 밤 유튜브에서 무덤덤해 보이는 영상을 하나 만났다.

얼핏 보면 별 내용도 없고 대사도 없었다. 그런 영상이 이상하게 나의 내면에 있는 어떤 본질과 접속이 된 느낌이었다. 아직 어둠이 짙은 새벽 산자락의 허름한 목조건물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창가에 놓인 사각의 길다란 반죽통 앞에 사십대 쯤의 남자가 서 있다. 옆에 벽돌화덕의 오래된 무쇠문이 보이고 선반들이 층층이 쌓인 작업대가 보인다. 빵을 만드는 작업장 같았다. 앞치마를 두른 남자는 마치 성스러운 의식을 수행하듯 양손을 모아 잠시 기도했다. 그 짧은 기도행위가 그가 만드는 빵에 생명을 불어넣어줄 것 같았다. 그는 포대를 가져다가 반죽통에 밀가루를 조심스레 쏟았다. 거기에 깨끗한 물을 붓고 손으로 반죽을 만들고 있었다. 그는 소금과 버터가 섞여 찰진 덩어리가 된 반죽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작업장의 보관대에 올려놓고 두툼한 천으로 덮어 숙성시킨다. 화면이 바뀌고 그가 자신이 직접 팬 장작을 화덕의 아궁이에 집어넣고 성냥을 그어 불쏘시개 솔가지에 불을 붙인다. 잠시 후 주홍색 불이 탁탁 소리를 내며 타오르고 있었다. 화덕이 달구어진 것 같다. 그는 화덕위에 걸려있던 나무삽을 내려 숙성된 반죽덩어리를 그 위에 올려놓고 간단하게 칼금을 긋는다. 그리고 반죽덩어리가 얹힌 나무삽을 화덕 깊숙이 밀어 넣었다. 시간이 흐른 후 화덕 안에서 노릇노릇 구워진 빵이 태어났다. 그는 솔로 자기가 만든 빵들의 묻어있는 것들을 털고 창가 진열장에 가지런히 세워놓았다. 단순하고 담백한 빵들이다.

이윽고 해가 뜨고 아침이 되자 창 앞으로 빵을 사러온 마을사람이 보인다. 그는 자기가 새벽에 만든 빵을 하나씩 누런 봉투에 넣어 건넨다. 그는 자기가 만든 빵을 플라스틱 바구니에 넣어 오도바이에 싣고 마을에 있는 마트에 가서 넘기기도 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단순한 광경이 마음 기슭에 잔잔한 감동의 물결로 다가온 것이다. 왜 그런 걸까. 아마도 새벽에 싱그러운 ‘글 빵’을 만드는 나와 작업과정이 비슷하다고 느껴서 그런 건 아닐까. 나는 아침마다 글이라는 정신적 빵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다. 칠십년 우여곡절의 인생과 사십년 가까운 변호사 생활의 애환이 빵장인들의 밀가루 같은 내가 만드는 글의 원료다. 젊은시절 쓴 일기장과 변호사일지가 그 보관창고다. 밀가루만으로 반죽이 되면 날것의 냄새가 난다. 거기에 버터나 우유가 첨가 되어야 한다.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체계적으로 독서를 해 왔다. 영혼에 영양분이 되는 철학, 역사, 문학에 관한 고전들을 읽었다. 그 안에서 발견한 진리와 감동을 기억의 창고에 보관해 두기도 했다. 좋은 문장들을 따로 써보면서 소리 내어 읽기도 했다. 빵을 만드는 사람들이 시장에서 질 좋은 버터나 치즈를 사다가 냉장고에 두기도 하고 또 향기로운 과일들을 사다가 다듬어서 통에 보관해 두듯 나는 인문학적 지식들을 버터나 우유같이 생각했다.

매일 나는 글창고에서 재료들을 꺼내 침묵의 체로 글이 될 만한 덩어리들을 거른다. 잠시 기도를 하면 영혼 깊은 곳의 샘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것 같다. 밀가루 반죽에 소금과 버터가 들어가듯 나는 글 재료에 지식과 논리 그리고 약간의 정서를 집어넣어 보려고 애쓴다. 양념이 김치에 서서히 배어들 듯 지식과 정서 그리고 철학가루의 버무림이 글 반죽에 들어가 배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설익거나 날 것의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자기를 드러내지 못하게 시간 속에 숙성시켜야 한다. 지식도 영혼의 음식물이다. 그러나 소화되지 않은 지식은 체해서 독소로 변할 수도 있다. 변질된 지식은 독소로 변해 영혼을 해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불이라는 생각이다. 진리 내지 믿음의 불로 영혼의 빵이 구워져야 한다고 믿는다. 장작불 역할을 하는 것이 경전이라는 생각이다. 성경을 읽고 불경을 읽고 논어를 공부해서 마음의 불을 지피려고 노력한다. 화덕에서 담백하고 단순한 글 빵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그래야 물리지 않고 어떤 음식과도 어울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만든 빵을 개인 진열대인 블로그에 올린다. 미로같은 길을 찾아와 ‘글 빵’을 가져가는 개인도 있고 마트 같은 인터넷매체에서 얻어가기도 한다. 오랫동안 하다 보니 단골손님도 있다. 새벽 바다의 어부나 산자락의 빵만드는 장인같이 나도 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