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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갤러리 - 정죄

Joyfule 2020. 2. 17. 13:05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갤러리


정죄


나는 유튜브를 통해 여러 사람의 설교나 강의 시사비평들을 듣고 있다. 말하자면 세상을 보는 창이 된 것이다. 그 중 자주 듣던 한 목사의 설교 창에 다른 화면 하나가 끼어들어 있었다. 무심코 그 화면을 손가락으로 터치했다. 사회자와 함께 눈썹이 짙은 미남의 남자 한 사람이 화면에 떠올랐다. 사회자가 그에게 물었다.

“목사님, 일본의 한 시사잡지에 난 바에 의하면 북한을 도우러 간 목사들중 상당수가 김일성에게 충성 선서를 했다는데 그 배경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그건 여자 때문입니다. 한밤중에 목사들이 묵는 호텔 방으로 예쁜 여자가 들어옵니다. 화들짝 놀란 목사들이 당장 나가라고 소리치면 그 여자들은 나가면 처단당하니 제발 살려달라고 사정을 하죠. 그 말에 목사가 마음이 약해져 그러면 방바닥에서 자다가 새벽에 나가라고 하죠. 그리고는 새벽 한 두시가 되면 여자를 올라타고 있는 겁니다. 그 목사도 그랬습니다. 물론 확인된 건 아닙니다.”

아무리 유튜브 속의 방송이지만 너무 거칠고 원색적으로 성적인 묘사를 하고 있었다. 더구나 스스로 확인된 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말하지 않거나 더욱 조심해야 하는 게 맞았다. 그는 성적인 덫에 걸렸다고 주장하는 목사의 이름까지 그대로 말했다. 그 목사는 국내의 대형교회를 오랫동안 이끌고 북한에 많은 물질적 도움을 준 목사였다. 그 목사의 설교 시리즈 화면에 나타난 이질적인 방송 화면 속에서 말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 목사가 북한에 제공한 돈으로 북의 해커들이 양성됐어요. 북한은 여자 문제로 그 목사의 코를 꿰어 계속 교회 돈을 뜯어낸 거죠.”

나는 불쾌한 느낌이 속에서 악취처럼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악한 댓글이 있듯이 이제는 남의 프로그램 사이에 그런 비방과 저주의 동영상이 섞여 있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자의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이 목사라고 했다. 화면속의 그를 다시 한 번 찬찬히 보았다. 남자답게 생긴 미남이었다. 목사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거친 말투와 비방과는 전혀 조화되지 않는 직업과 외모였다. 평범한 사람이라도 그렇게 남을 정죄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 얼마 후 동영상 속에서 북에 다녀온 목사를 공격하던 목사가 누군지 알았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며 청와대 앞에서 시위를 하는 목사였다. 주변에서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법관 출신의 선배변호사 부부는 내게 그 목사를 이렇게 평했다.

“정말 대단한 분이예요. 혼자 죽음을 무릅쓰고 앞에 나가 대통령의 하야를 소리쳤어요. 처음에는 모두 비웃었는데 보세요. 지금 수십만의 개신교 신자들이 광화문 거리로 몰려들었잖아요? 쌍욕을 하면서 말이 거칠기는 하지만 성령의 사람인 거 맞는 거 같아요.”

선배변호사 부부의 말에는 그에 대한 용기와 존경심이 가득 배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혼란스러웠다. 남의 스캔들을 거칠게 폭로하는 그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변호사를 해 오면서 어떤 사건에 부딪치면 한번 다른 입장에서 생각 해 보는 버릇을 키워왔다.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세상의 여론은 시간만 지나가면 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여론이 반드시 진실도 정의도 아니었다. 

 

성경을 보면 적군에 의해 고립된 성 안의 상태는 지옥 그 자체였다. 식량이 끊긴 성 안은 쥐까지 잡아먹다가 마지막에는 인간까지 서로 먹는 극한에 이른다. 전쟁에서 흔히 그렇게 성안에서 농성하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근세의 유럽 대전에서도 적국의 양곡보급로를 끊었고 어린애에게 공급했던 우유마저 중단한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인간의 본성은 잔인하다. 더러 다른 경우도 있다. 봉건시대 전쟁을 보면 적의 성을 포위했어도 소금과 식량을 공급해 주면서 항복을 기다리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목사들은 오랫동안 철저히 경제봉쇄를 당해 수백만이 굶어 죽는 북한주민을 위해 사랑을 베풀러 간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사랑을 역이용해서 여자라는 올무에 걸리게 하는 북한의 권력자와 그 부하들이 간악한 자였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유혹을 이기기가 힘들다. 그런 약한 인간에게 무조건 돌을 들어 던지는 게 어떤 것일까. 그렇게 거친 말로 정죄하는 목사에게 혹시 벽돌이 날아가지는 않을까. 

 

공격을 받는 그 원로목사의 인터넷 설교를 매일 하나씩 들어보던 어느 날이었다. 그가 이런 내용을 설교 첫머리에서 얘기했다.

“한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그를 테스트하기 위해 요염한 여자들이 있는 퇴폐업소에 가서 밤새도록 함께 놀았습니다. 그 철학자는 친구들과 함께 순응하면서 잘 놀았습니다. 그걸 보고 얼마 후 친구들이 다시 그 철학자에게 그 요염한 여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친구들에게 철학자는 한번 가면 철학자고 두 번 가면 속물이라고 말하며 거절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어쩐지 그의 내면의 어떤 고백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목사가 말을 계속했다.

“나이 먹은 제가 어릴 적에 시골에 살 때 파리가 너무 많았습니다. 잠을 잘 때 파리가 입속에 들어올 정도였습니다. 그때 파리를 잡기 위해 끈끈이를 집 곳곳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파리들이 그 끈적끈적한 액체에 붙으면 떨어지지 못하고 잡혀 죽는 겁니다. 어렸던 저는 끈끈이 옆에 엎드려고 파리가 잡혀 죽는 모습을 관찰하곤 했습니다.”

그가 다시 드는 사례도 어쩐지 그가 북에서 당했던 유혹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파리는 처음에 덥썩 잡히지 않았습니다. 좋은 향기가 나는 끈끈이 근처에 와서 한 다리를 살짝 얹어보다가 붕 하고 날아갔습니다. 그러다가 다음에 와서는 입을 살짝 대 보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마지막에 와서는 그 끈끈이 위에 앉아 붙잡히는 걸 봤습니다. 처음에 피해 갔을 때 다시 그 곳에를 오지 말았어야죠. 인간이라는 것도 그 파리와 다를 게 없습니다. 유혹을 보면 멀리 달아나야 하는 겁니다.”

그 목사의 영혼은 북한 권력자가 쳐 놓은 덫에 걸리지 않았을 것 같았다. 설령 그 덫에 잠시 걸렸더라도 덫에 걸린 강한 늑대가 자기 다리를 물어뜯어 버리고 자유를 얻듯 그렇게 빠져 나왔을 것 같았다.

 

죄에서 태어난 인간은 원초적 본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성경을 보면 본능에 걸려 넘어진 수 많은 인물들이 나오고 있다. 며느리와 관계를 가진 유다가 있고 부하의 아내를 범한 다윗이 나온다. 수많은 첩을 거느린 솔로몬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달랐던 점은 죄를 인정하고 참회하는 모습이었다. 그들의 중심에 있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불교에서도 비슷한 얘기들이 나온다. 한 수도자가 본능을 이겨보기 위해 자신의 남근(男根)을 잘라버렸다. 그 말을 전해 들은 부처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수도자가 잘못 잘라버렸구나. 진짜 잘라야 할 것은 욕망의 뿌리인데 엉뚱한 짓을 했구나.” 

몇 년 전에도 진짜 그런 경험을 한 목사의 얘기를 듣기도 했다. 산에 올라가 기도를 하는데 어떤 존재가 나타나 그의 남근을 잘라 버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 명령을 따라 진짜 남근을 잘라냈다. 그 후부터 그의 교회가 부흥을 해서 성도가 넘쳤다고 했다.

“남근을 잘라내니까 몸에 어떤 변화가 왔습니까?”

내가 물었다.

“허리가 굽고 목소리가 내시같이 달라져요.”

“남근을 잘라내라고 지시한 존재는 무엇이었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천사라고 봤어요.”

그 목사는 정상적인 범주를 넘은 사람 같았다. 보상심리인지 몰라도 그에게는 다른 욕망이 가득 붙어버린 것 같았다. 명예욕 재물욕과 권력욕까지 충만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자기가 당을 만들고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고 자랑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예수의 제2복음’이라는 작품이 있다. 그 작품 속에서 재림한 청년 예수가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창녀촌 거리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만났다.

“예수님 이런 데 오시면 안돼요”

막달라 마리아가 걱정을 하면서 말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니?”

예수님의 대답이었다. 이 세상은 죄의 세상이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넘어지고 죄에 빠지고 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거기서 헤어날 수 없음을 자백하고 십자가 위의 예수를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