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에세이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나의 노예적 속성

Joyfule 2024. 10. 18. 23:33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나의 노예적 속성      

 

변호사를 개업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신문에 거액의 도박 사건이 터졌다. 사립대학 이사장과 부자들이 포커를 하다가 구속이 된 사건이었다. 그중에 고교동기가 끼어 있었다. 그가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나는 열심히 뛰어 구속영장이 기각되게 했다. 인연이 있는 담당 검사가 과감하게 나를 봐 준 셈이다. 그걸 보고 구속된 사람들이 모두 나를 변호사로 선임하겠다고 했다. 굵직한 부자들의 사건을 맡아 나는 가슴이 뛰었다. 다음날 나는 구치소로 대학이사장을 만나러 갔다. 어쩐지 그의 태도가 어정쩡했다. 그때 국회의원인 변호사가 나타났다. 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엄 변호사, 미안”

내가 밀렸다. 내가 구속을 면하게 해 준 고교동기도 돈 한 푼 안 내고 가버렸다. 나는 변호사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부자들의 동아리에 어떤 방식으로든 끼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메마른 땅이었다. 변호사를 하려면 물이 나오는 부자들의 땅을 파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부자 친구들의 모임이 있으면 그 자리에 참석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의 기준에 맞추고 그들의 모임에 함께하려고 했다. 그들의 칭찬을 갈망하고 그들의 조롱을 두려워했다. 그들의 책망을 공손히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면 동떨어진 섬처럼 외롭고 처량한 신세가 될 것 같았다. 그들에 대한 의존성과 노예 속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할까. 그런데 그런 행위도 허망했다. 그들은 같이 어울려 놀다가도 변호사를 선임할 사건이 터지면 다른 곳으로 갔다. 따지고 보면 당연했다. 그들의 마음에 들려고 했던 나의 모습이 처량하고 공허했다. 그 경험은 나를 자각하게 했다. 그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방편으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 어떤 일을 찾아 거기에 미치고 싶었다. 꼭 어떤 쓸모가 있어서가 아니더라도 그 자체가 좋아서 하는 그런 일을 찾고 싶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남의 칭찬을 듣든 말든, 보상이 있든 없든, 세상이 알아주든 말든, 그 때문에 사람들이 고마워 하든 말든 상관없이 좋아할 일을 찾았다.


나는 메마른 땅에서 물이 아닌 글을 뽑아내는 일을 하기로 했다. 수십년 동안 동굴 같은 어두운 감옥에 사는 죄수를 찾아갔다. 아무도 그를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존재였다. 그는 살아도 이미 죽어 있었다. 세상의 그 누구도 변호하지 않으려는 흉악범을 찾아가 그의 얘기를 들었다. 그들에게 나는 어둠 속의 한 줄기 빛으로 존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비인간적인 환경과 일그러진 심성을 반면교사로 삼아 나는 인간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탐구했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쓰고 또 썼다. 어느 순간 글은 나를 즐겁게 하고 영혼을 사로잡고 몰두하게 했다. 글 쓰는 일을 잘 하고 싶었다. 그게 나를 자유와 사랑으로 이끌어 줄 것 같았다. 메이저언론에서 컬럼요청이 왔다. 주간지 월간지에서 연재를 부탁하기도 했다. 수필을 쓰고 소설을 썼다. 거기에도 나를 노예로 만들려는 굴레가 숨어 있었다. 글을 쓰는 것만으로는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읽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인정받고 칭찬을 받고 싶은 허영이 고개를 들었다. 인기가 있어서 만든 책이 많이 팔리면 최고의 성공일 것 같았다. 내가 하는 일의 가치가 내가 그 일을 얼마나 좋아하고 즐기느냐가 아니라 그것으로 얼마나 눈에 보이는 성공을 거두느냐 쪽으로 변해 있었다. 그런 생각은 또다시 다른 사람들 손에 자기를 맡기고 그들의 통제아래 들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궤도수정을 하려고 애썼다. 내 주제를 알려고 노력했다. 유체 이탈해서 나를 보면 재능이 부족한 존재였다. 바닷가 아이들이 모래성을 쌓듯 그냥 그게 좋아서 하는 방향을 추구하기로 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게 참 좋다는 걸 요즈음 느낀다. 더 이상 사람들의 노예가 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천천히 할 수 있는 때가 됐기 때문이다. 젊어서는 남에 대한 의존과 노예적 속성을 느껴도 그걸 무찌르기가 참 힘들었었다. 먹고 사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