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소설이 나를 만들었다
나를 형성하는 데 소설이 강한 영향을 미쳤다. 법무장교로 군에 입대해 훈련을 받을 때였다. 내무반 구석에 문고본 소설인 ‘리빠똥 장군’이 있었다. 법무장교인 대위가 고급장교들의 고질적 비리를 파헤치면서 정면승부를 하는 내용이었다. 군에서 대위라는 계급장은 높지 않고 무겁지 않았다. 그 계급장을 달고 그는 당당하게 권력과 맞섰다. 그는 항상 단정하게 군복을 입고 권총을 차고 찝차를 타고 자기 임무를 수행했다. 용기란 계급이 아니라 정의와 신념에서 나오는 걸 배웠다. 소설 속의 법무장교는 내가 군생활에서 추구하는 모델이 되었다.
의사출신 작가 크로닌의 소설들은 내가 어떤 변호사가 될까를 알려주었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젊은 의사의 얘기였다. 의사들은 대개 대학에 남아 교수의 길을 밟거나 아니면 도심에서 개업의로서 돈을 벌려고 했다. 모두가 선망하는 성공의 길이었다. 주인공은 초라한 탄광의사로 갔다.
어느 날 낙반 사고가 일어나고 갱 속에서 한 광부가 떨어진 바위 덩어리에 발이 깔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통보를 받은 그는 간단한 의료기구를 챙겨 갱 안으로 들어갔다. 천정이 흔들리면서 흙과 작은 돌이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무너져 내리기 직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바위에 깔린 광부의 발을 절단하는 수술을 한다. 그리고 마침내 광부를 데리고 나온다. 그의 내면에서 표현못할 기쁨이 피어오른다. 나는 그 광경에서 전문직의 사명을 발견했다.
주인공인 젊은 의사는 다음에는 시골 마을의 보조 의사로 갔다. 매일 같이 왕진을 가는 게 그의 일이었다. 어느날 밤 한시경 그는 온몸이 파김치가 될 정도로 피곤해져서 숙소로 돌아왔다. 날이 추웠다. 난로 앞에서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고 잠자리에 들고 싶었다. 그때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먼 곳에서 누군가 아프다고 의사를 부르러 온 것이다. 그는 정말 쉬고 싶었다. 그때 오랫동안 그 마을에서 일을 해 온 늙은 의사가 그에게 한마디 한다.
“이런 때 다시 가야 하는 게 의사의 사명이네”
그는 다시 비가 내리는 얼어붙은 진흙 길로 나선다. 그 광경에서 나는 변호사의 사명을 깨달았다.
그 시절에도 사람들은 틈틈이 주식을 샀다. 그 젊은 의사도 월급을 모아 주식투자를 했다. 어느 날 그는 아이가 곧 나올 것 같다는 산모가 있는 집으로 불려 갔다. 그 시각은 라디오로 주식시세를 듣고 팔아야 하는 시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큰 손해를 볼 것 같았다. 산모는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아이는 나오지 않았다. 아기가 엄마의 뱃속에서 힘들게 나오고 있었다. 그는 아이의 미끄러운 발목을 잡아 올리다가 놓쳤다. 아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아이를 집어올리면서 다친 데가 없나 살피고 가제로 피를 닦아 엄마 곁에 뉘였다. 그 사이 주식을 팔 기회가 사라져버렸다. 그는 손해를 봤다. 그는 돌아오면서 그게 의사의 운명이라고 받아들였다. 나는 소설 속의 그 장면을 보면서 돈보다 일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소설 속의 의사는 내가 어떤 변호사가 되어야 하는 가를 몸으로 가르쳐 주었다.
훌륭한 소설가는 영혼을 변화시키는 시대의 예언자인지도 모른다.
어젯밤 유튜브를 검색하다가 소설가 조정래씨의 인터뷰장면을 목격했다. 그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
“제가 이제 나이 여든 두살입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깨달음에 관한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그의 작품에 대해 여러 평가가 있지만 나는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았다는 생각이다. 태백산맥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울었다. 총에 맞아 죽은 빨치산 형의 시신이 길에 전시되어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 있었다. 청년단으로 형과 반대쪽에서 싸우던 동생이 그 광경을 보고 피가 끓는다. 형의 시신을 가져가려는 앞에서 순경이 막자 그는 순경과 싸운다. 나는 거기서 위선적인 이념보다 사랑이 위라는 걸 깨달았다. 이념은 유령 같은 허위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수 많은 좋은 소설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어 준 것 같다. 인간은 책을 만들고 책이 인간을 만들어 준다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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