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축구선수 이영표씨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사회자가 선수 생활중 가장 기억에 남은 한 장면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를 물었다. 이영표씨는 장면이라기 보다 그런 느낌을 받은 순간이 있었다고 했다. 공을 터치하고 있지도 않았는데 그 순간이 영원히 계속됐으면 했다는 것이다. 그게 뭘까.
나도 그 비슷한 경험이 있다. 대학 졸업한 다음 해 여름 문경의 사불산에 있는 대승사라는 고찰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내 상황은 최악이었다. 졸업하면서 사법 시험은 일차에서 떨어져 버리고 하숙비도 장학금 신세를 지고 있었다. 취직도 어려웠다. 사년 동안 영어를 공부하지 않아 입사시험도 통과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고시낭인의 처지였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날이 저물면 책상에 초를 두개 켜 놓고 책을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새벽 한 시경이었다. 갑자기 나의 내면 깊은 곳에서 어떤 기쁨이 피어올랐다. 이런 순간이 계속 된다면 영원히 행복할 것 같았다. 그 순간의 느낌은 오십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렇다고 당시 공부에 몰입해서 얻은 기쁨도 아닌 것 같다. 나는 그게 뭘까?하고 생각한다. 어떤 환경에서든 그런 기쁨만 가지고 있으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후 세월이 사십년 가까이 흐르고 내 나이 육십이 되던 해였다. 성경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광야’라는 단어가 내 앞에 튀어올랐다. 예수가 있던 유대 광야의 바로 그 곳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끓어 올랐다. 나는 비행기를 타고 바로 유대 광야로 날아갔다. 이십년 동안 성경 속의 광야를 돌아 다니며 기도하는 수도사를 소개받았다. 그는 예수가 기도하던 그곳은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국경선 사이에 있는 유대 광야의 한 지점이라고 했다. 우리는 국경을 담당하는 정보기관의 허락을 얻고 유대 광야로 들어갔다. 광야는 돌과 푸석푸석한 흙과 바람이었다. 그 한 지점에 나지막한 바위언덕이 보이고 위쪽에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었다. 구약의 예언자 시대부터 수도사들이 기도하던 굴이라고 했다. 예수도 그 굴에서 기도했을 것이라고 했다. 나도 그 굴 속에 들어가 기도해 보고 싶다고 했다. 나를 안내한 수도사는 말렸다. 위험하기도 하고 자기는 싫다는 것이다.
나는 수도사를 밖에 있게 하고 혼자 굴속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누군가 기도했던 것 같은 작은 공간들이 개미굴 같이 퍼져 있었다. 나는 입구 가까운 곳에 앉아 눈을 감았다. 수천년 존재해 온 굴 안은 정적 그 자체였다. 주변의 소리는 모두 우주로 빨려들어간 듯 진공 속 같이 조용했다. 그런 속에서 아주 미세한 소리가 들려왔다.
‘딱, 딱, 딱, 딱’
금속성의 소리도 아니고 벌레가 우는 소리도 아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아주 작고 신비한 소리였다. 갑자기 어떤 포근함과 편안함이 나를 감쌌다. 머리 속이 몽롱해지면서 나는 마치 따뜻한 물 속에서 태아가 되어 유영하는 것 같았다. 환희와 행복감이 밀려들었다. 굴의 문을 통해 유대광야가 보였다. 물결치는 듯한 높고 낮은 언덕이 눈에 들어왔다. 내 눈에 비친 모든것이 아름다움이었고 기쁨이었다. 이대로 영원히 있으면 좋겠다는 느낌이었다. 그때 느꼈던 마음의 평화는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한다.
세상에는 돈이나 지위 명예가 주는 쾌락이 있다. 섹스나 마약이 주는 짜릿함도 있다. 나는 그것들보다 한 단계 높은 쾌감이 있다는 걸 막연하게 느꼈다. 거대한 진리의 숲 부근에서 땅에 떨어진 아주 작은 나뭇잎 한 장을 본 것 같다고 할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어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영원으로 통하는 기쁨이 있는 것이다. 아마도 사도들이나 사막의 수도사들이 그런 기쁨을 알고 일생을 순례자로 지내는 게 아닐까. 나와 친한 목사는 나의 그런 행위를 일종의 종교적 허영이라고 단정 지었다. 귀국후 그때 굴속에서 독충에 물린 게 발견되어 엄청난 고생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인간들이 이성으로 알 수 없는 어떤 쾌락이 존재하는 걸 안 게 큰 수확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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