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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쓰는 게 기도다

Joyfule 2024. 10. 19. 23:29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쓰는 게 기도다      

 

“여보 선물로 온 배를 포장했던 신문지를 쓰레기통에 버릴려고 하는데 배움이 별로 없는 구십세 할머니가 영어 성경을 읽는다는 재미있는 기사가 있네.”

아내가 구겨진 작은 신문지 한 조각을 기도중인 내게 건네주었다. 오늘 아침은 어떤 주제를 가지고 묵상하고 글을 쓸까 생각중이었다. 묵상 중에 떠오르는 단어 하나나 오래된 기억 한 조각을 모티브로 매일 글을 쓴다. 그외에도 오늘같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분의 메시지가 전달되는 것 같다. 찢어진 신문지에는 아흔살의 할머니의 사진이 보였다. 돋보기를 쓴 주름진 얼굴에 힘들게 살아온 인생의 여정이 새겨져 있는 것 같았다. 그 할머니는 일흔다섯살에 대입검정고시를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영어를 배웠다고 했다. 삼년전에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고 일년 전에 중학생을 위한 영어 성경을 선물 받았다고 했다. 그 할머니는 최근에 배운 컴퓨터 자판을 한 자 한자 처가며 영어 성경을 필사한다고 했다. 그 할머니는 저녁마다 그렇게 영어 성경을 필사하고 기도를 한 후 잠에 든다고 했다. 할머니가 취재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어린 학생들이 영어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알아가면 좋겠어요.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할 수 있는 좋은 방법 같아요. 누구보다 엄마들이 좋아할 것 같아요. 영어공부에 큰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는 배재학당을 다니던 시절부터 영어 성경을 읽었다. 백오십년전 일본의 사상가 우찌무라 간조도 간다 거리에서 구입한 헌 영어성경을 평생 옆에 두고 읽었다. 나역시 삼십대 중반경 광화문의 교보문고에서 산 영어 성경을 지금도 읽고 있다. 구십세의 할머니는 특이하게도 컴퓨터 자판을 사용해서 필사를 한다고 했다.

경전을 필사한다는 건 어떤 효과가 있을까. 그리고 그건 어떤 의미일까.

이상하게 오늘 아침 다른 신문에서 ‘섬세한 붓끝으로 완성한 영적 수행의 길’이라는 비슷한 기사를 봤다.

오십년 가까이 불경을 필사한 분의 작품이 예일대도서관에 전시된다는 내용이었다. 경전을 필사하는 것은 붓끝에 집중해 하는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수행의 꽃이라고 했다. 불교에서는 만다라를 반복해서 그리기도 하는 것 같다. 그 게 수행이고 과정에서 부처님을 만난다고도 한다.

필사의 효력은 경전만이 아닌 것 같다. 이따금씩 서점에 들리면 문학작품을 필사하는 용도의 공책들이 매대에 놓여 있는 걸 본다. 필사의 효력을 소개하는 책도 있었다. 소설을 쓰기 위해 멘토가 되는 작가의 작품을 필사하면서 문학적 수련을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소설가 조정래씨는 아들과 며느리에게 그의 작품을 필사하게 했다고 한다.


나는 인공지능 ‘코 파일럿’에게 필사는 어떤 효과가 있느냐고 물었다. 인공지능은 내게 이렇게 대답했다.

‘필사는 한 자 한 자 쓰기에 시간을 요하는 작업이며, 생각하면서 쓰기에 집중력이 향상되고 스트레스를 줄입니다. 또한 몸에 새긴 기억은 오래 지속되며 경전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도 있어 온전히 자신의 지식이 됩니다. 필사는 정독을 넘어 깊은 사색을 필요로 하는 숙독이기도 합니다.’

내가 소송을 맡았던 한 명문가의 금고에서 나온 필사본의 서책 한 권을 본 적이 있다. 금분을 먹인 종이 위에 검은 먹으로 단아하게 쓴 한문체의 조선 역사였다. 그 명문가는 일제 시대 명필들을 초청해 사랑채에서 조선의 역사를 쓰게 했다. 그리고 그 만든 서책을 전국의 유림이나 향교에 보냈다고 했다. 조선의 자존심과 독립을 간구하는 기도행위 같았다. 고려시대 팔만대장경을 쓰고 정성 들여 목판을 만든 행위도 국가를 위한 간절한 기도가 아니었을까.

나는 매일의 일상 중에서 다양한 필사 행위를 나의 기도로 삼고 있다. 만 번을 목표로 시편 23장을 반복해서 쓰고 있다. 신약 성경중 가슴으로 다가오는 부분을 매일 따로 필사하고 있다. 백오십년전쯤 살았던 현자의 설교집중 가슴에 다가온 부분들을 필사해 오고 있다. 그리고 필사한 작은 공책들을 가지고 다니면서 암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노인이 되어 경전을 읽고 쓰는 것으로 채우는 것은 삶의 여백에 아름다운 색깔을 채우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