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얼굴
나는 감옥 안에서 신기한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다. 변호사 접견실에서 감옥의 어둠침침한 통로 쪽을 보면서 그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가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코너를 돌아올 때였다. 나는 그가 어슴푸레한 하얀 빛을 뿜으며 오는 걸 분명히 봤다. 안개 같은 반투명의 하얀 빛이었다. 그게 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어떤 하얀 유체와 썩여있다고 할까. 그는 공과대학교수를 하는 과학자였다. 동시에 항상 기도로 성령을 부르는 목사이기도 했다. 그의 발명품을 노린 사업가가 대형로펌을 동원해 그를 사기범으로 모략했다. 그는 일심에서 무거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미신 같은 얘기가 될 수 있지만 나는 그에게서 나오는 신비로운 빛을 보고 그가 결백한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 얼마 후 항소심에서 그는 무죄를 선고받고 석방됐다. 나는 지금도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서늘한 하얀 빛을 잊을 수 없다. 성경을 보면 예수에게서 어느 순간 눈부신 하얀빛이 뿜어져 나오는 광경이 있다. 아마도 그런 현상 비슷한 게 아닐까.
나는 그 반대 현상도 봤었다.
잔인한 살인범이 있었다. 나는 좁은 접견실에서 그와 마주앉아 얘기하면서 그의 눈을 유심히 살폈다. 진흙탕이 연상되는 탁한 갈색이었다. 수레바퀴 같은 홍체의 가운데 작고 검은 동공을 나는 응시하고 있었다. 응시라기보다는 그곳에서 어떤 것이 나의 시선을 빨아들이는 것 같기도 했다.
동공 안쪽으로 커튼 처럼 엷은 막이 쳐져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뒤에서 어떤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 존재가 은밀히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순간 그것이 그에게 들어온 귀신이나 악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무당이었다. 귀신이 들면 자신이 뭘 하는지 전혀 자각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 상태에서 그는 사람을 죽였다. 그의 주위에는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오르는 느낌이기도 했다.
나는 싸이코패스인 살인범들의 눈에서 종종 섬뜩한 푸른화염을 보기도 했다. 살인 청부를 받았던 사채꾼을 만난 적이 있었다. 직업적 살인이다. 나는 그의 눈에서 섬뜩한 푸른 불꽃이 스파크를 일으키는 걸 분명히 보았다. 그런 흉악범들은 사람을 만나면 착한 것 같이 표정을 관리 하느라고 애를 썼다. 그런 그들의 눈이 어느순간 파충류의 눈 같이 변하기도 했다. 내면의 감정을 그들의 눈은 정직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변호사를 사십년 가까이 하면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변호사 사무실을 사람들이 찾아올 때는 불행한 경우가 많았다. 이혼 상담을 온 여성들에게서 나는 깨달은 사실이 있다. 사랑을 받는 여성들은 얼굴에서 윤기가 흘렀다. 화장을 통해 겉으로 보이는 기름기가 아니었다. 피부 안에서 나오는 행복의 기운인 것 같았다. 사랑받지 못하는 여성들의 피부는 거칠었다. 그들이 아무리 미녀라고 해도 그들의 얼굴은 바람든 무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사람들을 볼 때 마다 얼굴의 특징들을 수첩에 기록해 두곤 했다. 얼굴 형태는 어떤지 눈은 어떤지 코는 어떻게 생겼는지 피부는 어떤 특색이 있는지를 관찰했다.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그의 인생이 새겨져 있는 것 같았다. 사람마다 긴 인생을 살면서 자기를 자기가 스스로 깊이 조각해 온 것이 아닐까. 힘들게 살아온 사람들을 보면 골 깊은 주름살 사이마다 그의 애환이 들어차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인간의 긴 생애는 자기를 스스로 만들어 가는 과정같다. 사람들은 일생 자기를 살고 자기를 만들어 낸다. 패배한 얼굴이 있고 스스로와 싸워서 이겨낸 얼굴들이 있다. 얼굴들을 보면 그 영혼속에 악령이 있는지 성령이 있는지 아니면 짐승의 영이 있는지 막연하지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살인범 중에는 의외로 미남이 많았다. 하얀 얼굴에 까만 눈썹을 가졌다. 손가락도 피아니스트같이 가늘고 길었다. 목소리도 나긋나긋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잘생겼어도 그건 겉 포장이었다. 그들의 저 안쪽에는 세월의 검은 자국이 느껴지곤 했다.
나는 가끔씩 거울 속의 내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 본다. 어느새 머리와 눈썹이 하얗다. 소리 없이 내리던 세월의 눈이 소복하게 쌓인 것 같다. 나는 거울 속에 있는 나의 눈을 응시한다. 눈동자는 영혼의 얼굴이기도 하다. 양심에 울려퍼지는 소리는 내 속에 계시는 그 분의 목소리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나를 어떻게 조각해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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