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팥 빵
내가 열살무렵이었다. 동네 골목길에 작은 빵집이 있었다. 빵집 주변은 고소하고 달콤한 공기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그 냄새에 잡혀 맑고 투명한 진열장을 통해 빵집 주인이 팥빵을 만드는 걸 구경하곤 했다. 빵집 주인은 노릇노릇하게 갓 구워진 빵에 붓으로 달걀의 노른자를 바르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빵에서 반짝거리는 윤기가 났다. 갓 구워진 빵을 하나 얻어먹을 때 나는 행복했다. 녹을 듯 부드러운 껍질을 한입 베어 물면 열기가 남아있는 ‘앙꼬’의 상큼한 단맛과 향기가 은은하게 입속에 퍼졌다.
중학 입시에서 합격했을 때 엄마는 내게 소원을 물었다. 나는 팥빵을 실컷 먹어보는 거라고 했다. 엄마는 신설동 로터리에 제과점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팥빵을 사주었다. 아마 열 개쯤 먹었던 것 같다.
중학교 이학년 무렵이었다. 종로의 고려당이나 광화문의 덕수제과의 팥빵은 내게는 천국의 음식 같았다. 어떻게 그렇게 맛이 좋은지 신기했다. 내가 살던 변두리 빵집의 팥빵과는 차원이 다르게 고급스러운 맛이었다. 그 팥빵 때문에 지금도 얼굴이 붉어지고 양심의 가책이 드는 기억이 남아있다. 그날 네 명의 아이들이 광화문의 덕수제과로 가서 팥빵을 먹었다. 누군가 돈이 있겠지 하고 먹었는데 아무도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두 아이가 화장실에 가는 척 하고 자리를 뜨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나와 다른 아이 두명만 남았다. 다른 학교에 다니던 그 아이와 친해진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 아이가 내게 말했다.
“우리 집은 가난해서 돈이 없다. 돈 좀 구해봐라.”
가난하기는 그 아이나 나나 다를 게 없었다. 사실을 얘기하면 엄마는 돈은 고사하고 나를 그냥 두지 않을 게 뻔했다. 나는 일단 그곳에서 나왔다.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했다. 돈 없이 다시 그 빵집으로 가서 같이 잡혀 있어야 할것 같았다. 나는 망설였다. 어느새 나는 아무도 없는 집의 빈방에 들어와 있었다. 고민하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빵집에 인질로 잡혀있던 그 아이였다.
“야이 나쁜 놈아. 어떻게 이렇게 잘 수가 있어?
의리라고는 쥐뿔만큼도 없는 놈아. 주인이 나중에 빵값을 갚으라고 놔줘서 왔어.”
나는 너무 미안해서 할 말이 없었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에서라는 인물같이 우정을 팔아먹은 것이다.
에서는 팥빵이 아니라 팥죽이었지만. 그 친구는 나를 혼내러 올 때부터 이미 마음속으로 용서했던 것 같다.
세월이 흐르고 우리는 육십대가 됐다. 간간이 만나 우정을 유지했다. 그 친구는 광고사업으로 부자가 됐다. 어느 날 그 친구한테서 연락이 왔다.
“나 하던 사업을 다 접고 버킷리스트로 내가 해보고 싶었던 걸 하기로 했어. 작은 빵집을 해 보는 거지. 일본에 가서 장인한테 사정사정해서 앙꼬 만드는 기술을 배워서 빵집을 차렸으니까 와 봐. 이제 내가 고려당이나 우리 어려서 잡혀 있던 덕수제과보다 더 팥빵을 잘 만들 수 있으니까 말이야.”
그가 문을 연 세로수길 이면도로의 작은 빵집으로 가보았다.
빈티지풍으로 아담한 인테리어를 한 가게였다. 빵집 주인이 된 그는 예쁜 앞치마를 두르고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가 만든 팥빵들이 매대에 올라 있었다. 그 팥빵을 잘라 입속에 넣는 순간 흘러가 버린 세월이 현실 속으로 다시 들어와 섞인 느낌이라고 할까. 중학교 시절 광화문의 덕수제과에서 먹던 바로 그 맛이었다. 아니 그 맛보다 훨씬 고급스러웠다.
빵집 주인이 된 친구가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가 어렸을 때 황홀했던 그 맛은 일제시대 일본인에게 도제식으로 배웠던 아버지 세대의 앙꼬 때문이었어. 세월이 흐르고 제과점의 주인이 죽으면서 그 기술이 끊긴 거야. 내가 그 맛을 찾으려고 일본에서 다시 기술을 배워 왔지. 그렇게 만든 팥빵이야. 나는 일본 앙꼬빵보다 한 차원을 높였어. 빵집이 있는 이 빌딩이 내거야. 임대료 부담이 없지. 재료도 최고로 썼어. 밀가루도 프랑스에서 수입해 들여왔어. 이익을 볼 생각이 없어. 최고의 빵이 되어야 하는 거야. 나는 밤 열시부터 새벽 두시까지 직접 팥을 맑은 물에 씻고 껍데기는 전부 체로 걸러서 버려. 그걸 냄비에 넣고 은은한 불로 끓이는 거야. 나무 주걱으로 계속 저으면서 그렇게 ‘앙꼬’를 만들어. 절대로 남을 시키지 않아. 정성이 중요한 거야. 내가 만든 팥빵을 맛있게 먹고 감동하는 걸 보는 게 참 좋아. 내가 어렸을 때 빵집에 인질로 잡혀 있던 거 너 기억하지? 그때 먹었던 빵과 내가 만든 팥빵을 한번 맛을 비교해 봐”
그 친구는 하던 사업을 접었다면서 다시 큰 사업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았다. 서울 외곽의 잘꾸며진 오천평 정원 안에 대형 빵집을 만들었다. 전통을 자랑하던 고려당이나 덕수제과가 없어졌다. 인질로 잡혀 있던 그가 팥빵의 대를 잇는 것 같았다.
'━━ 감성을 위한 ━━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얼굴 (0) | 2025.02.13 |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이별의 기술 (0) | 2025.02.12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노년에 맞이하는 친구들 (0) | 2025.02.11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주는 즐거움 (0) | 2025.02.10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장사꾼 대통령 (0) | 2025.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