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여장군 할머니
변호사를 하면서 사십년 가까이 죄인들과 만났다. 종종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판사 앞에서는 반성했다고 하면서 용서해 달라고 해요. 그런데 그건 거짓말이예요.
나는 범죄를 저질러도 양심이 아프지를 않아요. 남들은 아프다는데 나는 왜 그렇죠?”
그렇게 말하는 그는 진심이었다. 악마가 스며들어 양심을 제거해 버린 것 같기도 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평생을 도둑질만 해 온 사람과 얘기를 했었다. 그는 어려서 남의 집 부엌에 들어가 은수저를 훔친 것을 시작으로 팔십 노인이 돼서도 전원주택을 털러 다니고 있었다. 도둑질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여유있을 때에도 그는 그 짓을 했다. 내가 보기에 그는 도벽이 뼛속까지 배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내게 웃으면서 “프로는 은퇴가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에게 작가 쟝주네가 쓴 ‘도둑 일기’라는 책을 얘기해 준 적이 있다. 인간의 나라와 도둑의 나라는 가치관이 다르다는 내용이었다. 인간의 나라에서는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말아야 하는 게 윤리지만 도둑의 나라에서는 비싼 물건을 솜씨 있게 가져오는 게 영웅이라는 것이었다. 도둑인 그는 자신은 보통 사람들과 생각이 다른 것 같다고 했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부자의 청부를 받은 살인범이 시간을 아껴가면서 성실하게 공부하던 여대생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매장한 사건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살인범에게 왜 죽였느냐고 물었다. 그는 감정은 없지만 계약을 했기 때문에 신용을 지키느라고 죽였다고 했다. 죽은 여대생의 아버지는 법정에 나와 그 범인을 죽여달라고 절규했다. 재판장은 자기도 사형에 처하고 싶은데 판사생활동안 사형을 선고한 적이 없어서 그렇게 안 하겠다고 하면서 살인범의 목숨을 살려주었다. 인간의 껍데기를 썼지만 사람들의 영혼은 다양한 것 같았다. 흉악범들을 만날 때면 나는 그들의 영혼에서 쥐도 보이고 뱀도 보이고 여러형태의 짐승을 보는 것 같을 때가 있었다. 도덕성을 결한 최하등의 인간들 중에는 짐승의 영을 가진 존재들도 있는 것 같았다.
변호사로 민사소송을 맡아서 하다 보면 보통사람들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보기도 한다.
상가의 사기분양사건의 피해자들을 대리해서 소송을 제기한 적이 있다. 상가를 사두면 그 임대료로 평생이 보장된다는 거짓 광고를 보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피해자 대책 회의에 참석해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골치 아프게 소송을 하지 말고 우리도 똑같이 광고해서 다른 사람들이 상가를 사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단체로 사기를 쳐서 다른 사람이 손해를 보게 하자는 얘기였다. 자기의 이익 이외에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중에는 사기범을 찾아가 자기 돈만 내주면 남이야 어떻든지 사기범을 돕겠다는 배신자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변호사인 나를 찾아와 자기만 제일 먼저 돈을 받게 해달라고 했다. 인간은 한순간에 나쁜 사람도 교활한 사람도 될 수 있고 비겁한 존재도 될 수 있었다.
사람들 대부분은 다른 사람이 손해를 봐도 나만 이익을 보고 잘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남이 어떻게 되든 그 자신은 어려움을 당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 한 명의 ‘진짜 인간’을 보았다. 남대문 시장의 노점에서 사십년간 떡뽁이를 팔아온 가난한 칠십대 여성이었다. 얼굴의 굵은 주름 사이마다 힘든 세월이 배어있는 것 같았다. 그 노인은 피해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두가 자기 이익만 생각하면 법을 잘 아는 지능적인 사기범에게 농락당합니다. 내가 먼저 양보하겠습니다. 제일 늦게 돈을 받겠습니다. 못 받아도 좋습니다. 평생 고생하다가 말년에 좀 편해 보려는 욕심을 냈다가 당했습니다. 어쩌겠습니까? 팔자로 받아들여야죠. 그렇지만 우리가 단결해야 사기범들이 법망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합치고 힘을 합쳐 법의 미꾸라지를 잡읍시다.”
그 노인을 보면서 나는 멋있는 인간이 누구인지를 알았다. 위기의 순간 남들을 위해 자기를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사기의 피해자 중에 시장 바닥에서 떡볶이를 팔던 그 노인이 가장 가난했다. 돈에 여유가 있어서 투자한 사람도 많았다. 그들은 재산의 일부를 잃지만 그 노인은 평생 번 돈의 전부가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노인의 헐벗고 초라한 이면에서 숭고함을 보았다. 양심은 인간의 마음속에 울려 퍼지는 그분의 음성이다. 그 음성이 들리지 않는 사람은 짐승이거나 이미 천형을 받은 살덩어리에 불과한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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