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잘 산다는 건
오십육년 전쯤 중학교 때의 일이다. 다른 반의 한 아이가 유서를 남기고 북한산에 올라가 떨어져 죽었다. 그가 죽은 이유는 광자로켓을 만들고 싶은데 이생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 그 작업을 완성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열다섯살 소년의 죽음은 신비했다. 나는 그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 이학년 무렵 한 친구가 한강으로 가서 시멘트 덩어리를 줄로 몸에 묶고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기 힘든 성적 때문에 비관해서 자살한 것이라고 했다. 우물안 개구리인 우리들에게 성적은 삶의 모든 것이었다. 대학 시절 사법고시 일차 시험에 떨어진 친구가 비 오는 날 방에서 목을 매 죽었다. 삼차 면접시험에서 떨어진 친구가 달리는 기차에서 스스로 뛰어내리기도 했다. 나의 세대는 그런 관념의 상자속에서 갇혀 살았다.
지금도 오십여년 전 스산한 겨울 풍경 한 장면이 기억의 사진첩에 그대로 남아있다. 그 무렵 열살 정도 위인 고시 낭인을 독서실에서 우연히 알게 됐다. 그는 내게 법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형같이 자상하게 알려주었다. 나는 그의 안암천변 작은 기와집까지 갔었다. 그가 묵는 사랑방 책상 위에는 영어참고서가 천정까지 쌓여 있었다. 법은 공부가 되어 있는데 일차 시험의 영어에서 번번이 걸려 낙방한다고 했다. 우리 시절 영어는 목숨 같은 것이었다. 공무원, 기자, 회사등 어떤 시험에도 영어점수가 나쁘면 합격할 수가 없었다. 영어시험을 통과하지 못해 고시 일차시험을 일곱번 여덟번 떨어지면서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냉기도는 바람이 불던 봄날 내게 형같이 대해주던 그가 나를 독서실 근처 골목의 허름한 음식점으로 데려갔다. 흙바닥에 반쯤 자른 드럼통이 몇개 놓여 있었다. 그게 식탁이었다. 주문한 막걸리가 나오고 양은 냄비에서 동태찌개가 끓기 시작할 때였다.
“나 고시를 포기하기로 했어”
그가 그렇게 말하더니 울기 시작했다. 어떻게 서럽게 우는지 그의 어깨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슬픔이 내 마음까지 눈물로 적시고 있었다. 몇십년이 흘러도 그의 처절한 절규는 잊혀 지지 않았다. 살다 보니까 그런 슬픔들이 세상에 가득했다. 정교수가 될 길이 막힌 걸 알자 자살을 한 시간강사가 있었다. 변호사의 길이 막힌 로스쿨 졸업자도 많다. 자기의 꿈대로 계획대로 안 되는 게 인생인 것 같다.
한 명의 합격 뒤에는 떨어진 천명이 울고 있다. 돈을 벌어 부자가 된 한 명의 그늘에는 만 명의 실패자가 존재 한다.
실패했다고 꼭 결함이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머리가 좋고 노력을 해도 시험에서 떨어지는 사람이 있었다. 돈을 벌려고 악을 써도 가난해지는 사람들을 봤다. 돈을 쫓아가는 그들에게서 돈은 더 멀리 도망을 가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내 경우 한 가지 다행한 일이 있었다. 시험에 여러 번 떨어졌을 때였다. 계속해도 나는 실패할 걸 내면의 깊은 속에서 누군가 직감으로 알려주었다. 그 직감은 대개는 정확했다. 비로서 내 주제를 알았다. 나는 기도했다. 하나님을 합격의 도구로 삼거나 협박하지 않았다. 대신 후유증을 고쳐 달라고 간절하게 사정했다. 불행은 세 박자로 온다. 세상의 실패는 열등감이라는 마음의 병을 가져온다. 그리고 그 병은 인간을 질투와 시기로 피폐하게 만들고 그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 나는 그런 마음의 병이 걸리지 않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빌었다. 마음만 상하지 않게 해 주시면 어떤 길을 걷던지 그 분의 뜻을 따르겠다고 했다.
얼마 후 그분은 내 마음을 바꾸어버렸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던 가치들이 빛이 바래고 마치 바람을 잡은 듯 공허하게 느껴졌다. 욕심이 가치를 만들어 냈었다는 걸 알았다.
고단하고 험난한 세상에서 욕망을 다 충족시킬 수는 없다는 걸 알았다. 그분은 내가 세상의 젖을 떼도록 내게 많은 일들이 닥치게 했다.
세월이 흘러 인생의 바다를 앞에 두고 넓은 강 하류에서 나는 물방울로 맴돌며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삶에서 나의 계획대로 된 게 없다. 내가 원하지 않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끌려 왔다. 겪어보고 나니 이제야 희미하게 답이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더 일찍 내 주제를 알고 무심히 그분을 따랐으면 삶이 편안하지 않았을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천직이라는 걸 깨닫는 데 한참의 세월이 걸렸다. 그걸 빨리 알았어야 했다. 살아보니 될 일은 되고 안될 일은 안 됐다. 그걸 모르고 안될 일도 되게 하려고 헛수고만 했다. 놓일 곳에 놓인 그릇이 아름답다는 걸 알았다. 잘산다는 건 그런 걸 빨리 아는 거 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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