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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나여! 나를 용서하지 마라 - 유안진

Joyfule 2005. 5. 20. 02:36

나여! 나를 용서하지 마라 - 유안진
  
“젊음도, 사랑도, 기회도 말없이 왔다 가버리는 것을…”
오늘밤 너 유안진은 시인도 신앙인도 아닌 비 가는 소리로 찾아왔구나. 거울 속에서 마주보기도 하고, 밝은 날 나를 따라다니거나 앞장서거나 나 모르게 나란히 걷기도 하다, 흐린 날에는 아예 내 속에 들어와 보이지 않는 그림자이기도 하더니, 그렇게 나의 몇 가지 페르소나이더니,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혼자 있을 때 자주 찾아오는 바람소리, 창틀 흔드는 소리,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나 풀버러지 소리이곤 하더니-. 때로는 악몽으로 나를 소스라쳐 깨워 앉히기도 하고, 아무 소리도 아니면서 내 잠을 깨워, 눈 감은 채 멍청히 누웠으면 잠깬 나를 불러내 너를 따라갈 수밖에. 달아난 잠을 다시 잡아올 수 없으니 거실로 나가 채널을 돌려라, 혹시 누군가의 입을 통해 내게 들려주는 신의 말씀을 들으라고도 하더니- 창밖에서는 비가 그치고 있다. 그레고리안 성가풍의 빗소리, 그레고리안 성가대의 성가처럼 왔던 비는 지금 가고 있구나. 잠자는 사이 나 몰래 왔던 비가 돌아가고 있다고, 내게 일러주는 거지. 아니 왜 오는 줄은 모르고 살다 가버릴 때에야 겨우 알아차리느냐고 나무라는 거지. 오싹해지는구나. 그래, 나는 긴 인생을 잠만 잤어. 내게 찾아온 젊음, 내게 찾아온 사랑, 나를 찾아와 준 기회 등. 전혀 알지 못했구나. 나의 기나긴 청춘, 그 지천인 젊음을 나는 얼마나 지겨워했던가 말이다. 청춘이 너무 길어 얼른 결딴내 줄 누군가를 얼마나 목마르게 찾았던가? 누군가 말했다지? 기회란 머리카락 없는 민대머리라고. 머리카락이 있으면 달아나는 기회의 뒤통수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낚아챌 수 있는데, 머리카락이 없어 기회를 놓치고 만다고. 비단 젊음뿐이냐? 사랑도, 기회도, 시절도, 밤비도, 사람도 다 곁에 있을 때는 귀한 줄 모르다 떠나버린 다음에야 아쉬워한다는 말이지. 그 말 하려고 날 깨웠어? 너무 평범한 누가 들어도 시큰둥해 할 네 말이 눈가를 적시는구나. 가슴 웅덩이에 고이는구나. 비 가는 소리에 잠깼다 온 줄도 몰랐는데 썰물 소리처럼 다가오다 멀어지는 불협화의 음정(音程) 허명에서 자유롭기를… 밤비에도 못다 씻긴 희뿌연 어둠으로, 아쉬움과 섭섭함이 뒤축 끌며 따라가는 소리, 괜히 뒤돌아다 보는 실루엣, 수묵으로 번지는 뒷모습의 가고 있는 밤빗소리, 이 밤이 새기 전에 돌아가야만 하는 모양이다 가는 소리 들리니 왔던 게 틀림없지 밤비뿐이랴 젊음도 사랑도 기회도 오는 줄은 몰랐다가 갈 때 겨우 알아차리는 어느새 가는 소리가 더 듣긴다 왔던 것은 가고야 말지 시절도 밤비도 사람도… 죄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에게 들려준 그의 내면의 목소리처럼, 카를 구스타프 융에게 들려준 그의 내면의 음성도 지금 네가 내게 들려준 것과 비슷했으리라. 내면의 소리를 기초로그이들의 정신분석학 이론을 구축했으니, 나를 데려가는 너와의 내면여행인 자아분석, 자아성찰, 내부고발과 위로로 너와 진솔한 대화를 자주 하자는 거지? “나는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도 모른 채, 나 자신을 어떤 흐름에 맡겨야만 했다. 그런데 만다라를 그리기 시작할 무렵 모든 것들, 다시 말해 내가 지나온 모든 통로와 내가 밟아온 모든 발걸음이 어느 한 점, 곧 하나의 중앙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만다라가 그 중심인 것이 차차 내게 확실해졌다”고 융은 그의 성인기 발달이론을 구축하는 과정을 고백하고 있다. 나도 너, 밤빗소리가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도 모른 채, 나 자신을 비 가는 소리인 너에게 맡겨야만 했고, 너를 따라 내가 지나가는 모든 통로와 내가 밟아 가는 모든 발자국은 ‘어리석음 놓침’이라는 중앙점으로 거슬러 올라갔으니, 너는 내게 어리석음, 놓침, 때늦음 등을 만다라 그리듯 작품으로 쓰라는 거냐? 시인 유안진은 신앙인 유안진 글라라에게 늘 유구무언(有口無言)이지. 네 앞에서는 나의 의식도 무의식이 되고 말아. 나는 늘 내 속의 무의식의 외침인 네 목소리를 싫어했으니까. 나는 너무 자주, 너무 깊이 너와 많은 얘기를 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너는 내게 할 말이 많은 거니? 늘 너를 싫어하고 네 말 듣기를 혐오하는 시인 나에게 신의 목소리를 들어보라고 했지? 신은 이미 2,000여 년 전 하나뿐인 아들의 목숨값으로 나를 사 두신 사랑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분이라고. 나는 대단히 비싼 값으로 사 두신 사랑의 딸이므로 그분이 내게 들려주는 말은 무조건 들으라고. 나는 늘 내 발등에 떨어지는 불덩이를 끄기에도 바빴어. 정신없이 끄고 나면 다시 다른 불덩이들이 떨어지고는 했어. 내 발등은 불에 데이고 화상 입은 상처들뿐이야. 신은 침묵으로 말씀하시는 분인데다 모습이 안 보이는 분이시니, 나는 너무 답답하고 안타까웠고 그럼에도 너는 그분 외에는 나를 너보다 더 사랑하는 누가 없다고만 했지. 너는 신은 모습이 안 보이는 분이니 얼마나 좋으냐고 했지. 신 앞에 나아간 나에게 얼굴로 나타나면 나는 내 진실을 미주알고주알 다 아뢰일 수 없을 거라고 말이야. 또한 신의 음성이 안 들리는 침묵이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만일 네가 신을 부를 때마다 오냐 말해보라고 하시면 나는 한마디도 말하지 못할 것이라고 너는 늘 주장하지. 글라라! 네 말이 옳은 말이야. 그래도 나는 어떤 반응을 갈망하고 있어. 기적 같은 반응을 말이야. 시실은 오래전부터 늘 너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있었지. 허명(虛名)에서 자유롭기를 신께 빌어왔으니까. 너 글라라는 나 유안진에게 마스로우의 ‘supernor mality’를 요구하지만, 그것이야말로 허명에 대한 집착이야. 나는 허명에서의 해방을 신께 비는 중이야. 나 좋아서, 진정한 한 편을 피로써 쓰고 싶을 뿐이야. 상당한 기간 나는 자유롭게 살고 있지. 내 일이 아픈 것이든 아니든 죄다 남의 일처럼 거리 밖에서 구경하듯 살고 싶다는 한동안에 머무르고 있어. 내 얘기를 마치 남의 얘기하듯 중얼거리기 일쑤로 말이야. 그런데 어느 날 거울 앞에 서니, 너는 그림자도, 비 가는 소리도, 바람소리도, 풀벌레 소리도 아닌 거울 속의 내 얼굴로 나를 꼬나보지 않겠어. 그래서 나는 단번에 다음의 소품으로 네게 대답했어. 아니 대답해 주고 싶었어. 주름잡으며 산 삶 너무 미안 누워서 먹고 싸며 자라는 젖아기가 어느 날 갑자기 제 몸을 스스로 뒤집었다는, 젊은 엄마의 자랑을 듣고 듣다 제정신이 뒤집히는 사랑 끝에 생긴 아기는, 그 힘을 물려받아 제 몸을 뒤집는가 하다가…. 뒤집어 업어야 놀라운 자랑거리가 되고 말고, 내게도 그런 꿈이 있기는 있었는데, 세상을 통째로 뒤집어엎고 싶었던, 피 끓던 한때가 분명 있었는데, 세상이 어디 그리 호락호락하던가, 결국 뒤집어엎을 그 꿈을 뒤집어엎느라고, 팽팽하던 얼굴만 뒤집히고 말았지. 뒤집혀서 주름 잡힌 얼굴을 비춰 볼 때마다 세상은 비록 뒤집어엎지 못했을망정 내 인생 하나만은 뒤집어엎었다고 세상은 주름잡으며 살아오진 못했을망정 내 얼굴 하나만은 주름잡으며 살아왔다고. <주름잡으며 살았구나>라고 제목을 붙여봤지. 거울 속의 너는 단 한 번도 나이기를 바랐던 적이 없는 나였어. 그래서 너를 이렇게 구겨 뭉쳐 버려 너무 미안하다. 어찌 거울 속의 내 얼굴이 너 혼자만인가. 여기저기 수시로 무너진 건강 하며, 일상생활에서의 사소한 의욕에서도 마찬가지라서. 너는 내가 아니다라고 악을 쓰고 싶지만 그럴 수 없구나. 너를 이렇게 망가뜨린 책임, 그 자체로서 눈물만 핑 돌 뿐이야. 미안하다 너무 너무. 유안진 글라라이든 시인 유안진이든, 나여! 나인 너는 나를 용서치 마라. - 유안진 시인 서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