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랑 - 시몬느 베이유
사랑이란 우리의 비참함을 나타내는 표지이다.
신은 스스로를 사랑할 따름이지만 우리는 다른 것만을 사랑할 수 있을 뿐이다.
신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신을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신이 우리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동기가 없다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가?
이러한 우회를 거치지 않는 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에 내 눈이 가려지고 두 손이 사슬로 지팡이에 비끄러매져 있다는 그 지팡이는
나를 둘레의 모든 사물로부터 분리시켜 놓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그 지팡이 덕분에 나는 주위의 사물을 더듬어 볼 수 있다.
내가 느끼는 것은 지팡이일 뿐이지만 그것으로 나는 벽을 인지할 수 있다.
조물주가 피조물을 사랑하는 능력에 있어서도 같은 말을 할 수가 있다.
초자연적인 사랑은 피조물에만 손을 뻗으며 오직 신이 있는 곳으로만 향한다.
신은 피조물만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로서도 그것밖에 또 사랑해야 할 것이 있을까?)
그러나 다만 중개자로서 할 따름이다. 이러한 명목으로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 동등하게 사랑하는 것이다.
남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일에는 대조적으로 자기 자신을
남처럼 사랑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기쁨과 괴로움이 감사하는 마음을 똑같은 정도로 불러일으킨다면,
신에 대한 사랑은 순수한 것이다.
행복한 사람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불행에 허덕이는 사람의 고통을 나누어 가지려는 것이다.
불행한 사람들의 경우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이 기쁨 속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일이며, 그 기쁨을 나누어 갖거나
나누어 갖고 싶다고 바라지도 않는 것이다.
플라톤의 눈에는 육체적 사랑이 참된 사랑의 타락한 모습으로 비친다.
인간의 순수한 사랑(부부가 서로 성실성을 지키는 일)은
그 타락의 정도가 낮은 모습이다.
'승화'라는 개념은 이 어리석기 그지없는
현대에서 기인되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페드로의 사랑, 그것은 힘을 휘두르는 것도 아니요,
또 힘에 의하여 피해를 입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한 것이다. 칼에 접한다는 것은,
그것이 칼자루 쪽이든 칼끝 쪽이든 다 같이 더렵혀지는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쇠붙이의 서슬도 그 사랑을 박탈하지 못할 테지만,
다만 그럴 때 신에게서 버림을 받았다는 느낌을 주게 될 수는 있으리라.
초자연적인 사랑은 어떠한 힘과도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힘의 냉정함,
쇠붙이의 서슬로부터 영혼을 지켜 주지도 못한다.
다만 이 세상이라는 굴레 속에서 충분한 에너지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쇠붙이의 서슬 앞에서 영혼을 지켜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갑옷 또한 칼과 마찬가지로 금속으로 되어 있다.
순수한 사랑만을 하고 있는 사람의 영혼은 살인에 의하여 얼어붙게 마련이다―
그 사람이 가해자이든 피해자이든 간에. 또 죽음에까지는 이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폭력에 속하든 모든 것에 의해서도 그 사람의 영혼은 얼어붙게 된다.
영혼의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사랑을 바란다면
신이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해야 할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보다 멀리 나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그 한계를 넘어서는 사랑은 증오로 변한다.
그러한 변화를 모면하려면 사랑은 다른 것이 되어야 한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존재만을 완전히 인식하게 된다.
남들이 있는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곧 사랑이다.
정신은 어떤 것의 존재를 믿도록 강요당해서는 안 된다
(주관주의, 절대적 이상주의, 유아론, 회의론, 우파니샤드,
노장 사상, 플라톤 등을 보라,
그들은 모두 순수해지기 위하여 그런 철학적 태도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존재와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은 받아들이는 일, 즉 사랑이다.
따라서 아름다움과 실재는 동일하며, 기쁨과 실재감도 동일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스스로 만들어 보았으면 하는 욕구는 신을 모방하고 싶은 욕구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늘 저쪽에 보이는 모형에 따라서 하지 않는 한
가짜 신 쪽으로 기울어져 가는 상태인 것이다.
피조물에 대한 순수한 사랑, 신에 대한 사랑은 아닐지언정 마치
불꽃 속을 꿰뚫고 지나가듯 신을 거쳐 나가는 사랑,
피조물로부터 완전히 이탈하여 신의 곁으로 올라가서
거기서부터 신의 창조적인 사랑과 결합하여 다시 내려오는 사랑―.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사랑을 분열시켜 놓은
두 개의 상반되는 것들이 하나로 융합된다.
곧 사랑하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과,
그 사람을 다시 만들어 놓고자 하는 일말이다.
피조물에 대한 상식적인 사랑.
사람은 반드시 어떤 집착의 대상에 동아줄로 묶여 있는 법이다.
그 동아줄이란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것이다.
사람은 또 상상적인 신에 줄로 묶여져 있다.
그러한 신에 대한 사랑도 집착이다.
그러나 실재하는 신에게는 매여 있는 게 아니라. 따라서 끊어질 위험성 또한 없다.
신은 우리들 속으로 들어온다. 신만이 우리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다른 것은 모두 우리들 바깥에 머물러 있다.
그러한 것들에 대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고작 해야 그것들이 움직이거나
아니면 우리가 이동할 때 동아줄에 나타나는 팽팽한 정도와 방향의 변화뿐이다.
사랑에는 실체가 있어야 한다.
육체라는 가상을 통하여 상상의 존재를 사랑하고 있다가 어느 날 문득
그 허구성을 깨닫는다면 그보다 더 비참한 일이 또 있을까?
그것은 죽음보다도 더 무서운 일이다.
왜냐 하면 죽음이라 할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바꿔 놓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상으로 사랑을 가꾸어 온 죄에 대한 벌인 것이다.
예술 작품은, 다만 그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들의 힘을 복돋우어 주며, 그러한 예술 작품이 베풀어 주는
위안과는 판이하게 다른 위안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받고자 하는 것
(또는 그들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비열한 노릇이다.
사랑하고 사랑받는다는 것은, 서로가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사실을
더욱 구체화하고 항시 마음의 눈에 선명하게 떠오르게 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의 눈에 선명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사고의 원천이 되기 위함이어야 하며 사고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해를 받고자 하는 열망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까닭도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며,
남을 위해서 존재하고자 하는 희구에 연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내면에 비열하거나 범용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순수한 것과 대립되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의 생명을 잃지 않기 위해 순수성을 더럽히도록 요구하는 것들이다.
더럽힌다는 것은 변화시키는 것이며 건드리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이란 변화시킬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이다.
무엇인가에 대하여 힘을 휘두르는 것은 더럽힌다는 것이다.
소유한다는 것도 더럽히는 것이다.
순수하게 사랑한다는 것은 거리를 두는 것에 동의하는 일이다.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두는 간격을 무엇보다도 존중하는 것이다.
상상력은 항상 어떤 욕망, 곧 어떤 가치와 관련되어 있다.
대상이 없는 욕망에는 상상력이 없다.
상상력 때문에 가려져 있지 않는 모든 것들 속에는 언제나 신이 뚜렷히 현존하고 있다.
아름다운 것은 우리 내면의 욕망을 사로잡고 그 대상을 제거해 버리고,
그 대신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욕망이 미래를 향해 날아가는 것을 막게 해준다.
이것은 순수한 사랑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모든 쾌락에 대한 욕망은 미래의, 환상의 세계에 속해 있다.
한 인간이 존재하고자 하면 존재하게 될진대 그 밖에 더 바랄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 때 사랑받고 있는 사람은 상상의 미래에 감싸여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고
적나라한 모습으로 현실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수전노는 자기 재물을 바라볼 때 언제나 그 재물이
두 배의 크기로 불어나 있는 것을 상상한다.
있는 그대로 적나라한 모습을 보려면 일단 사람은 죽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욕망이 미래를 지향하고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
사랑은 순수한 것이 되기도 하고 순수하지 않은 것이 되기도 한다.
이런 까닭으로 미래를 본보기로 해서 생각해 낸 헛된 불사성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사자에게 바쳐지는 사랑은 완전히 순수한 것이리라.
왜냐 하면 그것은 그보다 더 새로운 것은 이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게 된
종언된 삶을 갈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자가 한때는 존재했던 적이 있기를 우리는 바란다.
그렇게 되면 그 사자는 존재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정신이 원칙이 되기를 중단했을 때는 또한 목적이 되는 것도 그만둔다.
그래서 여러 가지 형태의 집단적 사고와 의미의 상실,
영혼 존중의 소실 등이 서로 뒤얽혀 일어나게 된다.
영혼이란 그 자체에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간주되는 인간 존재를 말한다.
한 여성의 영혼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쾌락과 관련시켜서
그 여성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그것을 조용히 정관할 수 없게 되며 그 때부터는
소유하고자 욕망하게 된다(플라톤적 사랑의 소멸).
자신의 눈에 스스로를 선명하게 비춰 보기도 전에
남에게서 이해받고자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우정 속에서 쾌락을, 그것도 받을 가치가 없는 쾌락을 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것은 사랑은커녕 차라리 부패와 타락을 자아내는 것이다.
그대는 우정 때문에 영혼을 팔아 버리겠는가?
우정을 바라기보다는 오히려
우정에 관한 환상을 깨끗이 물리쳐 버리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우정을 그냥 바라는 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다.
우정은 예술이나 인생이 베풀어 주는 즐거움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대가 없이 베풀어지는 즐거움이어야 한다.
우정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우정은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정은 은총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누가 복음> 5장 8절).
우정이란 여분으로 주어지는 한낱 덤이다.
그대가 여지껏 사랑받은 일이 없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고독에서 빠져 나오고자 바라는 것은 비열한 짓이다.
우정은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몽상해서도, 또 바라서도 안 되는 것이다.
우정은 다만 행하는 것이다(그것은 덕의 하나이다).
불순하고 착란된, 그러한 여분의 감정은 없애 버리자, 그것이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다.
또는 차라리(왜냐 하면 엄격하게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을 없애 버릴 필요는 없으니까),
우정을 통해서 실제로 서로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우정을 전반적으로 반성하고 숙고해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는 우정이라는 덕성을
간직하지 않고 지낸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그러나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감정의 면에서 향락에 빠지는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부패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음악이나 그림을 통해서
정신없이 공상에 빠지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우정은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실재로부터 벗어나서는 안 된다.
우정은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기적이라 해도 좋을 만한 것이다.
그리고 그 기적이란 다만 우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스물다섯 살이면 이제 청춘 시대와는 작별을 고해도 좋을 시기이다.…….
어떤 애정일지라도 그것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고독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
만약에 그 어느 날, 참된 애정이 베풀어지는 날이 온다면
내면의 고독과 애정 사이의 대립은 해소되고 말 것이다.
아니, 그 틀림없는 애정의 표시로 인해서 그대는 진정으로 우정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 밖의 애정은 모두 엄격한 규율에 따라 정리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같은 말(예컨대 남편이 아내에게 "사랑하오." 하는 따위)이라도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서 천하게 들리기도 하고 또 그윽하게 들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투란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때와 장소에 따라
어느 만큼의 깊이로 말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 경우 의미는 아무런 힘도 미칠 수 없다.
그런데 훌륭한 조화가 이루어져서 그 말이 듣는 이에게
같은 깊이까지 울려 퍼지는 때가 있다.
그럴 때에 듣는 사람에게 분별력이 있다면
그 말에 어느 정도 값어치가 있는가를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은혜를 베푸는 일이 허용되는 것은,
그러한 행위가 고통보다는 훨씬 더 쓰라린 수치스러움을 주며,
은밀하게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형태로 종속 관계의 형성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감사란 은혜를 입은 일에 대하여 그 은혜를 활용해 나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속 관계라 할지라도 그것은 운명에 대한 것이어야 하며,
어느 특정한 인간에 대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그 행위의 그늘에 숨어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 속에는 추호라도 집착이 섞여들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개의 감사와 같은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감사는 우선 남에게 구원의 손길을 주는 쪽이 해야 할 일이다.
그 구원의 손길이 깨끗하고 더럽혀지지 않는 한에서 말이다.
구원을 받는 쪽도 감사해야 하는데,
그 까닭은 다만 쌍방간에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순수하게 감사한 마음으로 가지기 위해서는(우정의 경우는 다르지만),
다음과 같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나를 따뜻하게 맞아 주는 것은 연민이나 동정이나
일시적 기분 때문이 아니며 또 호의나 특별 대우 때문도 아니다.
그리고 천성이 부드럽기 때문도 아니다.
다만 정의에 의하여 명령받은 바를 실행하고 싶어하는 원망 때문이라고
그러므로 나를 그와 같이 대접해 주는 사람은,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과 같은 처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서도
똑같은 대우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원하고 있는 것이다.
-- 시몬느 베이유(Simone Weil, 1909∼1943).
프랑스 파리 출생의 여류 철학자·수필가·극작가로 사후에 그 위대성이 인정되었다.
앙리 4세 학교에서 알랭에게 배우고, 여러 고등중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전시에는 여자의 몸으로 육체 노동까지 하면서 프랑스탕스 운동에 뛰어들었고,
끝내는 영국의 한 요양소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지나친 금욕 생활과 정열적 사상 때문에 기인 취급을 받았으나
<중력과 은총>, <신을 기다리기>, <초자연적 인식>, <노동자의 조건> 등의
철학적 유작들이 발표된 뒤부터는 세계관를 응시하고 절대적 존재를 추구한
그녀를 파스칼이나 키에르케고르에 비기는 사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