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무 - 윤 수
내 몸뚱이만한 열무 보따리를 이고 산길을 내려온다. 엄마는 그보다 더 큰 보따리를 이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신다. 내가 초등학교 육 학년 때이니 삽십 년도 훨씬 지났다. 엄마는 가끔 열무를 뽑으러 나를 데리고 가셨다. 우리밭도 아니고 천수답 같은 화전을 빌려 열무 씨를 뿌린 뒤에 오뉴월에 수확하여 내다 파는 것이다. 요즈음, 오월이면 두견새 소리가 몹시 듣고 싶고 유월이면 밤 개구리 소리가 무척 그리운데, 돌이켜보니 그 외진 땅에서 열무를 키운 건 밤마다 그 존재들이 불러준 생명의 노래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때는 산에 송충이가 무척 많았다. 이건 거짓말을 보태지 않아도 어른 손가락만 했다. 앞을 봐도 산길 여기저기, 옆을 봐도 나뭇가지 가지마다 갈색 노란색 검은색 온갖 줄무늬를 이루며 기어다닌다. 여자애들이 그렇듯 기어 다니는 짐승이며 곤충을 나도 유별스레 싫어했다. 송충이에게 쏘이면 화상을 입은 듯 심하게 붓고 탈이 나므로, 더운데도 산행에는 긴 옷을 입고 다녀야 했다. 산길을 내려오는 내내 질겁하니, 엄마가 앞서갈 때는 기다란 꼬챙이를 쥐고 눈앞에 거슬리는 놈들을 걷어서 숲에 던져버리곤 하였다. 이래저래 방어를 하며 걸음을 서두르지만, 어느새 내 어깨나 보따리 위에 한두놈이 툭툭 떨어져 무임승차를 하곤 한다. 소름 끼치는 그것들을 보지 않으려고 나는 열무 보따리를 꽉 쥔 채 눈을 감고 엄마보다 앞질러 뛰기도 했다.
산길이 끝나는 즈음에 경부선 철로가 있다. 그곳은 상행선은 위에, 하행선은 지반이 약간 낮은 지점에 있는데, 무거운 것을 이고 내려오다 보면 가속도에 밀려 발길은 어느새 철로에 접어들게 된다. 나는 지옥의 묵시록 같은 송충이의 추적에서 어서 벗어나고 싶었다. 서울행 기차가 오지 않는 것을 흘깃 확인하고는 더욱 걸음을 재촉했다.
여름 오후, 기우는 빛의 각도와 어른거리는 지열 때문에 잠시 뭐가 보이지 않았던 걸까. 저만치에서 난데없이 굉음이 울리고, 초록색 부산행 특급 열차가 고요한 수면을 뚫고 솟아오르는 괴물처럼 거침없이 달려온다. 그토록 서둘렀건만, 나는 아직도 철길을 건너고 있었던가. 마저 건너기에는 간당간당 몇 발자국이 남았다. 쉬엄쉬엄 뒤따라오던 엄마가 건너편에서 망연히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열무 보따리를 철로 바깥으로 집어던지는 동시에 운명의 족쇄에서 마지막 발을 뺐던 것 같다. 기차가 몰고 온 거친 광풍이 스쳐가고, 돌아보니 엄마는 건너편에서 넋을 잃은 듯 아예 너부러져 있었다.
마당에 열무 보따리를 푼다. 닭들이 다가와 도리반도리반 눈치를 살피며 몇 잎 쪼아 문다. 부실한 몇 줄기를 골라 가까이 오지 마라는 신호인 양 저쪽으로 훌쩍 던져준다. 엄마와 나는 우물가에서 대충 땀을 씻고 파초와 칸나,맨드라미 봉숭아 채송화가 어우러진 꽃밭 가에 주저앉는다. 두레박은 그 옛날 하늘에서 떨어진 것인지 늘 출처가 신기했던 낡은 철모였다. 긴 대나무 막대기에 철모를 달아 샘물을 퍼 올리고, 굵은 소금 같은 사카린 몇 쪼가리를 넣어 보리 미숫가루를 태운다. 한 사발의 미숫가루를 마시려고 산 넘고 철길을 건너 왔나 보다! 더 시원한 문명은 듣도 보도 못한 때였으므로 달리 상상할 것도 없이 그것은 최고의 피서였다. 엄마는 열무 위에도 고루고루 축축 샘물을 뿌려준다.
콩밭 고랑에 심은 콩밭 열무가 제일 맛있다고 한다. 나는 어느 것이 콩밭 열무인지 구별할 줄 모른다. 과연 콩밭 열무가 더 맛있는지 견주어 보지도 않았다. 다만, 두견새 소리에 키가 자라고, 밤 개구리 소리에 살이 여문 그 열무 겉절이나 열무 비빔밥은 오래도록 달고 고소했다. 저녁상을 물린 후, 다시 열무 곁으로 간다. 나는 다듬고 엄마는 단을 만든다. 지푸라기 몇 줄 위에 넉넉히 열무를 얹고, 엄마가 한 뼘을 크게 벌려 이파리 중간쯤을 움켜쥔다음 꽉 동여맨다. 차곡차곡 단이 쌓이고, 날이 새면 열무는 급행열차가 달려가던 그 경부선 완행열차에 실려 도시의 시장으로 갈 것이다.
강이 가장 아름답게 보일 때는 강을 다 건너 와서 강 저편을 바라볼 때이다. 어느 틈에 끈질기게 붙어 와서 운 좋게 손길을 피했다가 나타난 송충이 한 마리를 상상해 본다. 모두가 잠든 밤, 알록달록 고운 무늬를 입고 파란 열무 단 위를 천천히 거니는 놈. 세상이 궁금한 별난 놈이었을까. 나를 닮은 것 같아 밉지 않다. 강 저편의 풍경들이 달빛에 어리는 여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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