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에세이

친정 나들이 - 고정숙

Joyfule 2013. 5. 13. 09:14

 

2007년 동인지 (아무도 모르는 시작)에 실린 수필    

 

친정 나들이 -  고정숙

 


여름부터 벼르던 친정 방문길에 나섰다. 사촌언니와 동행하였다. 오랜만에 일상을 벗어나 고속버스타고 편안한 자세로 기대고 앉아 차창 밖을 내다보며 고속도로를 달린다. 가을걷이를 끝내 가는 황량한 들녘과 산기슭엔, 길게 목을 뽑아 하늘거리는 은빛억새 물결이 석양빛에 반사되어 황홀경을 자아낸다.


 7시간을 달려 고향마을에 닿았다. 반겨주는 동생내외가 급히 준비해온 낙지를 산채로 도마질해 참기름에 버무리고 생된장과 마늘 풋고추에 찍어먹는다. 이 얼마 만에 느껴보는 감칠맛인가, 접시는 순식간에 바닥이 났다. 친정 가족이래야 직계는 이 시골 내 동생과 사촌 언니 셋뿐이다. 우리는 오랜만에 만나서 뜨끈한 구들에 허리를 지지며 아이들이야기, 남편이야기, 그리고 어렸을 적 이야기로 밤새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상쾌한 시골의 아침 공기를 깊숙이 들이마시며 냇가를 지나 들녘 가운데 서 본다. 유년 시절 우리는 바람 부는 이른 아침에 땔감을 준비하기 마련하기위해 소나무동산에 가서 옷이 젖도록 돌아다니며 갈퀴질을 했다. 진달래와 할미꽃이 피는 봄이면 무덤 가 잔디에서 놀았다. 이제 그곳엔 육중한 담으로 둘러쌓인 저택이 들어서 있고, 벌거벗고 멱 감던 냇물은 공해로 죽어있다. 치맛자락이 젖고 고무신 질척이며 새를 쫓던 들녘은 여전한데 농지정리를 하여 반듯한 논배미가 낯설기만 하다. 돌 돌 흐르던 물에 발 담그고 고무신으로 송사리 떠 잡던 도랑도 자취가 없다.

커다란 앞산 산등성이가 내 가슴 키만큼 작아져 시야에 들어온다. 바지락과 골뱅이를 주어 나르던 남쪽 끝 갯벌도 농지로 변하여 바둑판처럼 놓여있다. 소꼴을 먹이던 해 저물녘,  교복 입은 또래들에게 내 모습이 들킬까 한없이 얼굴 붉혔던 구불거리던 신작로는, 이차선 도로로 말끔히 닦아져 차들이 질주한다.


 오랜만에 우리 세 자매는 한숨으로 키우고 거두어주신 조부모의 묘소를 찾았다. 소나무들에 에워싸이고 양지바른 자리에 합장되어 모셔진 조 부모님, 군데군데 철모르고 피어난 보랏빛 제비꽃이 외롭게 피었고 쑥부쟁이도 보랏빛으로 가을을 피워내고 있었다. 쑥부쟁이의 꽃말은 그리움과 기다림이라고 한다. 자식들을 기다리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한 맺힌 넋으로 피워낸 꽃이리라.


 사변 통에 행방불명이 된 아들 며느리가 남겨놓은 어린 손녀들을 이끌고 고향으로 내려와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통일이 되기 빌기를 몇 십 년, 긴 담뱃대를 물고 그 작은 두발을 비비며 애를 태워 재로 날려 보내시던 할머니!  그 정성은 하늘에 언제 닿을 것인가!


 지하에 누웠으나 그 영혼은 바다에 돛대들의 드나듬을 바라보며 이제 오나 저제 오나 차마 눈 못 감으셨을 할머니, 눈을 감겨드리듯 봉분을 쓰다듬어 본다. ‘이제 저희들도 할미가 되었습니다. 부모님들도 할머니 곁으로 가실 연세이니 편히 쉬소서.‘ 속삭이며 품인 양 기대어본다.


 세월은 가도 언제나 변함없는 푸른 하늘과 흘러가는 구름을 망연히 서서 고향 하늘을 바라본다. 가슴 에이던 설음도 세월에 묻혀버린 지 오랜 지금, 저 은빛 억새풀과 우리 세 자매의 희끗희끗한 머리가 한데 어우러진 이 가을의 한 가운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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