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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4장의 시삭에 대하여

Joyfule 2018. 9. 6. 05:11



열왕기상 14장의 시삭에 대하여


많은 성경학자들은 열왕기상14:25~26"르호브암 왕 5년에 미쯔라임 왕 쉬샄이 예루살라임으로 올라와서 여호와의 집의 보물들과 왕으 집의 보물들을 취하였다.그는 쉴로모가 만들었던 모든 금 방패들을 취하였다."라고 기록된 성경상의 사건에 기록된 애굽왕 시삭을 애굽22왕조의 쇼셍크라고 추정하여 연대표를 만들어서 지금까지도 활용하고 있습니다.그러면 성경의 기록을 제외하고 애굽왕들의 자신의 치적을 자랑하기 위하여 부조가 반드시 있을 것인데 그것을 검토하는 것이 성경의 사건을 확실하게 확인 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역대하12장1~4절까지 기록에 의하면 애굽의 바로의 군대는 이집트군과 외국 용병으로 이루어지 대군인 것으로 보입니다.헤아릴 수 없이 많은 외국인 군인들중에는 쿠시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쿠시는 나일강의 제3폭포와 제 4폭포 사이의 거대한 동골라 물굽이 위쪽 즉 오늘날의 수단에 자리잡고 있는 호전적인 왕국이었습니다.이처럼 막강한 군대를 거느린 애굽 군대는 르호보암의 요새화된 성읍들을 쉽게 압도하고 순식간에 유다왕의 수도인 예루살렘 성문밖에 이른 것입니다.

 르호보암은 구원받을 가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문을 열고 조상인 다윗과 솔로몬이 세운 왕국의 보물을 이집트가 가져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이렇게 복종하는 대가로 애굽의 군대는 물러났고 예루살렘은  파괴를 면하게 된 것입니다.이러한 내용을 성경이 아닌 다른 증거는 없을까요? 그런데 이집트 룩소의 카르낰의 부바스티스문에 새겨진 있는 도시 명부에서 찾아 볼 수는 없을까요?

이 카르낰에 있는 부바스티스문의 부조는 쇼셍크1세 20년에 이루어진 전쟁의 기록을 그려놓은 것이라고 알려져 왔습니다. 이원정에서 파라오가 원정한 도시들의 명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부조에 기록된 내용중 제2열에는 이집트 인들은 아이얄론 근처에서 시작하여 중앙 산맥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기베온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열왕기상의 기록에 의한대로 한다면 다음에는 예루살렘이 나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트렌스 요르단에 있는 마하나임이 나옵니다. 즉 예루살렘이 없는 것입니다.이어서 요르단 계곡에 있는 많은 도시들이 나열되어 있고,예즈렐 계곡에 있는 베트샨과 슈넴과 타나흐에 이릅니다. 제3열은 메기도에서 시작하여 그 부근에 있는 여러 지명이 나열된 뒤 샬론평야에 있는 소코와 베트탑푸아로 끝나고 있습니다.

 

 

쇼셍크1세가 열왕기상에 나오는 시삭과 동일 인물이라면 왜 자신의 동맹자인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을 공격하고 자신의 적인 유다왕 여로보암의 영토를 침입하는 것을 주의 깊게 피한 것에 대한 설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상황이 완전히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즉 시삭은 유다왕국을 공격하고 예루살렘에 들어가 여호와 신전을 약탈한 반면 쇼셍크는 이스라엘만 공격하고 예루살렘은 건드리지 않았습니다.다만 학자들은 쇼셍크와 시삭의 이름이 비슷하다고 해서 두사람을 동일인으로 선뜻 인정하고 쇼셍크1세 20년에 이루어진 원정과 시삭의 예루살렘 공격이 일치한다고 인정하여 버린 것입니다. 이집트 상형문자에서 쇼셍크라는 이름은 sh-sh-n-k로 표기하지만 이따금 'n'을 생략하고 sh-sh-k로 표기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형태는 성경에서 나오는 시삭[shishak]이라는 이름과 똑 같아 보일 것입니다. 므깃도에서 발견된 스텔라 조각에서 발견된 쇼셍크의 이름을 나타낸 상형문자는 sh-sh-n-k로 'n'을 생략한 형태가 아닙니다. 그러나 동부셈어[아카드어]의 쐐기문자로 쓰인 당시 문헌은 쇼셍크라는 이름을 'Susink'로 표기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집트어의 sh는 셈어에서는 흔히 's'로 바뀌는데 'Susink'라는 형태에는 그런 음운 전환 현상과 'n'이 둘다 포함되어 있습니다.그러므로 쇼셍크와 성경에서 나오는 시삭은 동일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애굽에서는 황소를 신으로 섬기고 있었는데 이 신이 죽으면 미라로 만들어 무덤에 묻었습니다. 이러한 무덤을 로얄 캐시라고 합니다.

프랑스 고고학자 메리에트가 발굴한 세라피움에서 나온 증거는 제 3중간기에 활당한 기간이 그 시대에 매장된 아피스의 황소의 수에 비하여 너무 길다는 것입니다.그리고 브루크슈학자는 로얄캐시를 발굴했을 때 제22왕조의 창시자인 쇼솅크1세 11년에 매장된 미라를 발견했습니다.이때는 제21왕조의 시아몬10년에 로얄캐시가 마지막으로 밀봉된지 34년 뒤입니다.그리고 타니스 공동 묘지에서 나온 증거는 22왕조의 5대왕인 오소르콘2세가 21왕조의 2대왕인 푸스센네스1세보다 먼저 매장된 것이 발견된 것입니다.

이러한 발견된 증거물로 보아 21왕조와 22왕조가 부분적으로 동시대에 공존 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는 이집트 연대표는 지나치게 잡아 늘여지거나 인위적으로 연장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집트 연대표를 다시금 검토하야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난 하고 생각이 듭니다.

 

령천 교회 중동 선교사

김  용규 목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