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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생애 - 제 10 장 죄와 그 해결

Joyfule 2007. 8. 23. 00:27

제 10 장 죄와 그 해결

1. 구주 예수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니라](마1:22).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파괴된 세상의 질서를 회복하여 아주 새로운 것으로 만들기 위한 자기의 계획에 의한 것이라고 복음서는 한결같이 말한다. 예수님이 오신 세계는 심한 상처를 입고 더럽혀진 세계였다. 예수가 바라보는 곳마다 거기에는 악마의 무서운 세력이 움직이며, 그가 관계를 유지해야 할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대로 버려둔다면 사람들은 그 악의 힘에 붙잡혀 인간성은 훼손받고 한 강한 원수로 말미암아 혼란에 빠져버릴 뿐이었다. 그 원수가 무엇인가?그것이 바로 죄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건설함에 있어서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아니될 일이 이곳 저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땅 위에서의 그의 일은 죄로 말미암아 깨뜨려진 부자관계를 회복함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구과제는 현재 두가지다. 첫째, 예수님이 인류의 불치병인 죄에 대하여 어떤 말을 했으며, 또는 어떤 태도를 가지셨는가 하는 점과, 둘째, 이 질병에 대하여 어떤 처방을 가지고 치료하셨던가? 곧 죄를 용서하심으로 처방을 내렸던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죄는 그 말의 단수로서 표시되지 않고 복수로 표시되었다. 꼲 [Sin]이 아니라 [Sins]였다는 점을 특히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죄를 설명했으며, 사변적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죄를 다루었다. 가령 죄의 기원 같은 교회적인 문제를 그다지 중요시 하지 않았다. 현대인은 환경 유전 때문에 사람이 죄를 짓게 된다는 사상을 지니고 있지만 복음서에는 그런 기색이 없다. 생명의 파괴를 결코 그 어떤 사건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모든 사람은 같은 형제로서 서로 도와야 하고 각자의 개인적인 관심이 가장 중요하다. 죄가 어디서 왔는가? 또는 이런 죄를 왜 우주에 용납하고 죄가 어디서 왔는가?또는 이런 죄를 왜 우주에 용납하고 계시느냐?등의 문제를 그는 죄관에서 별로 다루시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고 고심하신 문제의 초점은 그런 이론이나 설명 이상의 큰 문제였다. 즉 더 실제적인 문제로서 죄로 말미암아 그 아버지의 집을 떠나 멀리 방황하는 아들이 어떻게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가? 하는 구체적인 문제를 더욱 중대시했다.

2. 예수님의 죄관

죄의 실존은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막아버리는 모든 장애물이라고예수님은 복음서를 통해서 말씀하셨다. 이렇게 생각하신 예수님의 뜻은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죄는 어떤 율법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유대 교법사들이 가르치는 이상의 것이다. 저들은 말하기를 율법은 의의 최고 표준이기 때문에 이 율법에 대한 위반이 곧 죄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깊은 의미에서 말씀하셨다. 그는 랍비들과 같이 의식적인 의를 생각하시지 않았다. 그는 사람의 양심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율법을 생각하셨다. 이렇게 생각하시므로 예수는 누구보다도 먼저 죄의 내재성(Inwardness of sin)을 말씀하셨다. 산상보훈에서 그는 서기관들과는 달리 죄는 행동으로 나타나기 전에 생각과 욕심으로 범한다고,또 죄는 육체에 있음과 같이 마음과 정신에도 있다고 말씀하셨다(마5:2127).

바리새인들은 언제든지 죄를 외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겉으로만 깨긋하고 보기에만 아름답고 율법의 조문에나 맞춰 행동하면 된다는 천박한 생각을 그들은 품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적,정신적인 죄를 가장 큰 죄로 말씀하셨고 이 내재적인 죄에 대하여 예수님은 가장 엄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는 죄를 말씀하심에 있어서 문제보다 그가 어떻게 생각했는가? 그 마음 곧 그 인격의 중심이 어떠한가? 그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점을 저 중요시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히나니라](마15:18). 사람의 깊은 중심에는 하나님의 율법이 기록되어 있다. 죄는 이 율법을 깨뜨리는 것이다.

 

둘째, 죄는 사랑하는 마음을 손상하는 것이다. 위에서 마음의 율법을 파괴하는 것이 죄라고 지적했지만 그것은 결국 상대적으로는 옳다 하겠다. 어떤 의미로서는 [너는 율법을 파괴할 수 없고, 율법으로 말미암아 네가 깨뜨림을 받을 수는 있다. 이 경위를 깨닫는 것인 예수님이 보신 바 죄에 대한 진리에 보다 더 가까이 이르는 첫 걸음이다.

죄는 도덕 질서를 손상하지 않는다. 이런 비인격적인 것은 고충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죄는 사랑을 상해하며 사랑은 죄 때문에 무섭게 고통을 당한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함이 몇번이냐?그러나 너는 원치 아니하였도다](마23:37).

 

탕자의 이야기를 상기해보라. 가장 심각한 것은 객지에 유리 걸식하며 방황하는 그 아들의 슬픔이 아니라 그 아들을 내어 보낸 날부터 걱정하는 아버지의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받는 고통이다(눅 15:11).예수님의 가르침은 소요리 문답서에 [하나님의 율법과의 일치성을 겸한 것이다. 율법을 거스림이 죄다]라고 정의한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우주의 움직이지 않는 법칙에 대하여 인간의 두뇌로서의 위법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얼굴에다 주먹질을 하는 행위이며 사랑의 십자가에 또 한번 주님을 못박는 일이다. 즉 사랑하는 마음에다 상처를 주는 것이 죄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죄를 에누리 한다거나 슬쩍 눈감아 버릴 수는 없다. 예수님 시대의 어떤 사람은 죄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너무 약하다고 공박도 했다. 그를 [죄인의 친구]라고 한 그 일이 오늘에 와서는 그의 영광이 되었지만 그 때에는 그를 비웃고 비난하는 말이 되었었다. 즉 예수께서 모든 종류의 죄인들과 가까이 접촉하며 지내는 그 태도가 비평가들의 비난 대상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 태도를 보고 비평가들은 죄에 대한 그의 태도가 너무 약하다고 비난했다. 또 이 태도를 예수님 성격의 한 결점이라고도 생각했다(마11:19). 그러나 예수님은 영혼이 상한 사람들을 애무하는 동시에 그는 한편으로 그들을 아프게 하는 모든 악을 몹시 미워하신 사실을 그들은 잊어버렸고,또 분명히 그 마음을 무시했었다.

 

그는 어그스틴처럼 [아름다운 죄들]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밀톤의 사람은 마술적인 성격을 지녔으나 예수님은 죄를 마술로도 생락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인자하시고 인간을 이해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죄는 으례히 준엄하게 다루어야 하며 모든 죄는 반드시 그 정체가 들어나고야 말 것이다.하이네는 [물론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실 것이다.왜냐하면 이것이 그의 일이기 때문이다]라는 노래를 했다. 예수님은 절대로 죄를 가볍게 보시지는 않았다. 사람들의 사랑하지 못하는 행동과 그 모든 부정한 생각을 예수님이 미워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복음서에서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불꽃 같은](계1:14) 그리스도의 눈이 죄를 가볍게 보실리 만무하다.가볍게 보셨다면 예수의 도덕의 준엄한 모습을 어디서 찾아볼 것이냐?그는 사람들을 [잃어버린 상태에 있다](마8:11,눅15:4824),또는 [멸망하는 존재](마 18:14.요3:16)라는 의미로서 말씀하셨다.

결국 그가 죄인인 우리 대신에 죽으신 십자가 죽음이란 참담한 행동으로써 죄에 대한 그의 무자비한 적의를 나타내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가 죄에 대하여 가장 심각하고 준엄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