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생애 - 제 10 장 죄와 그 해결3. |
4. 죄를 치료하는 길
예수님은 질병을 다만 진단 하시는데 그치지 않고 그 치료법을 가르쳐 주셨다. 이제 우리는 그 치료에 대한 말을 해보다 그 치료 방법은 하나님과 죄인과의 화목,깨뜨려진 관계의 회복,곧 용서의 길을 열어 주시는 것이다. 물론 이는 죄의 형벌을 경감해 주려 함은 아니다. 용서의 은혜를 받은 자도 그 죄의 값은 반드시 치러야 한다. 예수께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눅 23:43) 하신 말씀은 그 죄를 완전히 지워 버리셨다는 말씀이지만 그는 그 죄 때문에 사형은 받아야 했다. 죄의 값으로 육신의 죽음을 맛보기 전에는 용서 받는 길이 없었다. 용서와 이런 외적인 형벌을 분리할 수는 없다. 용서는 그 용서 받은 사람의 모든 생활에 변화를 일으킨다. 이런 변화는 은총의 결과다. 도대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회복되기만 하면 죄의 결과로의 형벌쯤은 매우 적은 사건이다.그러므로 용서란 것은 본질적으로 이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용서는 어떠한 것인가? 그는 용서의 영광스러운 현실성을 강조하셨다. 어떤 사람은 이를 등한시 한다. 어떻게 과거의 사태가 꼭 그대로 회복될 수 있겠느냐고 죄는 두 사이의 관계를 비참하게도 끊어 버렸다. 전날의 화친은 그대로 다시 돌아올 수 없다. 아버지 품으로 돌아온 탕자의 말을 들어보자. 즉 [나는 이제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소서](눅15:18]했다. 사람들은 빚진자와 같이 자기의 짊어진 채무에 대하여 영원히 또 완전히, 갚을 수 없는 것으로 느끼기도 하지만 그 채무를 이행치 낳아 그 빚 청산이 되는 수도 있다(마18:23이하.눅 7:41이하) 그런 낙망자에게 그리스도는 완전하고도 결정적은 회복의 영광스러운 소식을 전해 주었다. 즉 그 탕자가 이제는 [품군]의 하나만으로도 족하다는 심정을 품었지만은 그 아버지는 전날의 그 애정으로 아들을 맞아 들었다(눅 15:20). 채권자는 그 빚진자의 의무를 완전히 없애 버렸다(눅 7:42).집행 유예의 기간도 없애 버리고 다만 즉시로 두려움이 가득찬 심연으로 부터 영원한 사랑의 품으로 들어올려 기쁨을 회복하게 하고 몹시 상심하고 떨고 안타까워 못견디는 심령으로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앞에 서게 한다(눅 23:43) 이 사죄의 은혜가 깨뜨려진 부자 관계를 회복 시킴에 있어서 사람이 주동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동이시다. 죄인의 편에서 용서의 은헤가 올리가 없고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 편으로부터 오는 은사라야 한다. 사람이 서두른다 하여 될 일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셔야만 비로소 용서의 대은을 받게 되는 법이다. 브라우닝은 [요하네스 아그리콜라]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하나님이 오실 길을 만들라 그의 사랑을 바라기만 하며 그는 자기의 바른 손으로 값을 내셨다.
포도원 품군들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이 문제는 곧 해결된다. 용서에는 공적이 문제될리 없고, 다만 은총으로 될뿐이다(마20:1-6). 용서하는 사랑이 없다면 회개라는 것이 어디 있으랴? 그러니까 회개 조차도 하나님의 창조요 인간의 제품은 아니다. 하나님의 선과 사랑본 참회를 일으킨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 한 후에 일어난 후회도 그 자신이 자발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도리켜 베드로를 보시니...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눅22:61) 한대로 그리스도가 그것을 일으켰다. 언제든지 또 무슨 일에든지 하나님이 주동이 되신다. 갈보리 산상에서 이루신 구원의 능력의 비결 하나는 십자가의 광경이 사람의 마음에 죄로 말미암아 느끼는 고통과 부끄러움을 돌이켜 저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게 함에 있다. 참회의 행위를 내포한 사죄 은총의 경험은 곧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제 사죄에 대한 예수님의 중심적 위치를 생각해 보자.그리스도의 활동이 아니면 용서가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은 용서를 선포하실 뿐 아니라 그는 그 용서를 구체화 시켰다. 예수님을 만나는 죄인들은 그 자신에게 미치는 두 가지 영향을 깨닫게 된다.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무죄성, 그 결백성이 죄인들의 심령에 불을 붙인다. 그의 거룩함은 거울과 같아서 그 지성앞에서 비로소 인간은 자기 자신의 정체를 발견하게 된다.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때 그 경험을 했다.[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로써 말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같은 경험이 있었다.[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보라](요4:29).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쳐다볼 때 죄인들은 그 품은 바 실망을 쫓아버리고 큰 희망으로 재생하는 경험을 가지게 된다. 예수님이 여리고 성에 들어 갔을때,모든 사람에게 멸시받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기를 여러 사람앞에서 부끄러워 했으나 예수님은 그런 문제에는 개의치 않으셨다. 그는 오랫동안 잃어버린 인간의 자기 가치를 발견케하여 그 길로 구원에 이르게 했다(눅 19:6-7).예수님을 대면하게 될 때 저들 자신 조차 자기를 믿어 주지 않는데 자기들을 믿어주는 위대한 한 어른이 계셔서 그 어른과 함께 어떤 위대한 아름다운 확실한 일을 한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이 감정으로 말미암아 사라졌던 희망이 소생하고 용서해 주는 사랑의 기적이 다시 새롭게 된다. 예수님의 그들에대한 태도 그것이 그가 지니고 있는 사죄의 은총의 사실임을 믿게 한다. 처음에는 이를 잘 모르나 점점 이 사실이 확실해져서 그로부터 오는 사랑이 인간의 비애와 고통의 심연에 빠졌던 그들을 끌어 올려 비록 그들이 서 있는 그 수치의 자리도 하나님 자신의 사랑의 자리로 바뀐다.
다음 예수님 자신의 죽음이 그의 사죄 은총과 직접 관게되어 있음을 복음서는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마20:2836:28). 이미 생각한 바와 같이 죄악의 본성을 폭로시키는 그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중심이 어떠함을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준다. 그러므로 그는 죽음의 세력에 끌리어 십자가로 간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이를 선택했다. 즉 자유로이 길을 택하셨다. 이 십자가 죽음의 의의에 대하여 제19장 마지막에서 좀더 생각하자.여기서 우리는 특히 죄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거기서 예수님의 사랑만 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도 보며 그 아들의 희생만이 아니라, 그 아버지의 희생도 그 십자가에 나타났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갈보리의 역사가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강한 사실이며, 또 그 구원은 이 십자가에서만 이루심을 알린다.[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다](고후5:19).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사죄 은총의 결과를 말씀하셨다. 사죄 은총을 받은 사람의 생활에는 두 가지 관계가 나타난다. 그는 사랑을 추모하게 한다. 그는 결코 실망하지 아니한다. 사랑은 항상 그에게 임한다. 예수님이 바리새인 시몬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옥합을 깨드림은 큰 용서를 받게된 심령이 경험하는 새로운 창조의 사랑의 상징이다(눅 7:37이하). 그 결과는 또한 선을 추모하게 한다. 용서는 한 재생력으로서 사람들의 성격을 새로워지게 한다. 따라서 희망은 소생한다. 우리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삭개오는 즉시로 그 자신이 자유의사로 회개했기 때문에 [오늘 네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는 말슴으로 그 자신을 완전히 회복시켜 주셨다(눅19:8).베드로로 하여금 위대한 사도가 되기는 그가 대제사장 영문 뜰에서 저지른 실수에 대한 용서를 받으며 [내 양을 먹이라]는 자비스러운 말씀으로 격려를 받아그 자신이 자의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다시금 내어 맡겼기 때문이었다. 복음서를 읽는 사람은 누구든지 항상 자유로운 용서는 그저 죄를 크게 덮어주기 때문에 죄인들의 도덕력을 박약하게 만드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사죄의 은총을 받음에는 언제든지 크게 죄의 값을 치루어야 하며 따라서 사죄은총을 받은 자의 제일 큰 의무는 그의 도덕적 힘을 최대한도로 발휘함에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에게 몸을 바쳐 사는 사죄은총 받은 자의 생활에 나타나는 신앙의 모습이다. 그것이 우리의 성격을 창조한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정의의 걸음을 걷게한다. 그것이 우리를 영광의 자리로 인도한다. 그것이 은총 안에서 사는 죄인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정신으로서 영원히 살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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