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예언 사역> - 릭 조이너 지음 중에서 발췌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피하게 하시거나 우리의 은밀한 죄를 사람들 앞에 드러내기를 원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는 예언과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사용하셔서 그분이 우리와 얼마나 친밀하신가를 우리의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깨닫게 하신다. 그분은 진정으로 우리 곁에 계신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께서 비밀한 죄를 말씀하지 않으시더라도 그 죄를 회개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 예언을 통해 우리의 마음의 은밀한 것을 드러내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받은 소명을 분명하게 하시기 위해서다. 모든 소명에는 어려움과 시련이 따른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이 그 일에 우리를 부르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시작하게 되면 그러한 문제들을 훨씬 더 쉽게 견딜 수 있다.
주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일에 대한 우리의 생각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바꾸시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생각과 행동뿐만 아니라 마음을 보신다. 마음은 사람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주로 마음을 향해 말씀을 하신다.
우리의 깊은 내면은 다른 사람들은 물론 때로는 우리 자신에게도 가려져 있다. 이러한 은밀한 부분을 만지는 예언은 우리가 확신을 갖지 못했을 일들을 자유롭게 하도록 만든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예언이 개인의 삶 속에서 그런 일들을 이루어 내어 결국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소명으로 이끌게 되었다는 간증을 수도 없이 들었다.
예언은 확증만을 위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언은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을 단지 확증하기 위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견해가 성경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성경에는 그 반대인 경우가 더 많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이 잘못된 곳으로 가려고 하기 때문에 확증이 아니라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예언이 주어진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께서 확증을 위해 예언을 주시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예언을 반복하시기도 하는데, 이것을 하나의 원리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의 소명이나 사역에 있어서 확증이 도움이 될 때가 많다. 하지만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은 아니며, 모든 소명이 같은 정도의 확증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일반적으로 확증이 구체적이고 극적일수록 더 어려운 사명이 주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명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라 단지 더 어렵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뛰어난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주 미약한 확증이나 혹은 아무런 확증 없이도 훌륭하게 그들의 사명을 감당했다. 그런 반면 어떤 이들은 그것이 예언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계속해서 예언적인 확증과 격려의 말씀을 반복해서 받기도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행하도록 부르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우리로 계속해서 그분을 의지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가장 극적이고 구체적인 확증을 주실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항상 믿음이 필요한 여지를 남겨 놓으실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원치 않는 사명이나 소명에 대해서 구체적인 말씀을 받기를 원하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최선의 방법은 아니다.
예언 중독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언에 중독되는 것은 원치 않으신다. 예언으로 지시를 받는 것보다 믿음과 지혜에 자라가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실 때에는 우리가 겪게 될 어려움 때문일 경우가 많다. 우리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확증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유익하고 우리를 지도하는 말씀을 계속해서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성숙했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성숙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유아들은 계속해서 가르치고 돌봐야 하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그런 것들이 점차 필요하지 않게 된다.
성경에서 사도들은 하나님이 손을 잡아서 이끄시지 않았다. 그들은 주님의 성숙한 사자로 보내심을 받았다.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예언의 말씀이나 확증의 필요 없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정을 내렸다.
바울은 첫 번째 전도여행에서 하나님께 구체적이고 예언적인 임무를 받았다. 가장 열매가 많았던 두 번째 전도여행에서는 어디로 가라는 구체적인 말씀이 없었다. 그는 단지 그가 세운 교회를 점검하기 위해서 돌아가야겠다고 느꼈을 뿐이다.
우리가 어릴 때에는 손을 잡고 길을 인도해야 한다. 성숙한 사도는 모든 일에 대해서 구체적인 계시를 필요로 하거나 구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신실한 대사로서 결정을 내렸다.
그는 분명 예언적인 지시를 받는 것에 열려 있었지만, 그것에 의존하지는 않았다. 바울은 아가보로부터 그가 예루살렘에 가면 겪게 될 어려움에 대해서 구체적인 예언의 말씀을 받았다. 이 계시는 그 예언을 전했던 이들이 생각한 것처럼 그를 돌이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닥칠 것에 대해서 그를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 예언은 바울에게 어떤 지시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가 겪게 될 고난에 대비하기 위해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동역자들은 이 말씀을 바울이 가지 않도록 지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지만, 바울은 예수님과 같이 다르게 생각했으며 예루살렘에서의 그의 시련을 맞아들이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지시적 예언
바울의 사역 가운데 마게도니아에 대한 환상은 구체적인 지시적 예언의 좋은 예다(행 16:9-30). 이 계시는 바울이 매우 중요한 결단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로 하여금 앞으로 닥칠 어려움에 대비하게 했다. 사역에 있어서 적절한 시기가 중요한데, 마게도니아는 바울의 사역에 알맞게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환상을 주시기 전까지는 마게도니아는 분명 바울의 계획 일정에서 빠져 있었다. 마게도니아에 도착하자마자 바울은 매를 맞고 감옥으로 던져졌다. 바울과 실라가 족쇄를 차고도 하나님을 찬양하여 간수를 구원함으로 위대한 사역의 시작을 이루었던 것은 아마도 이런 어려움 가운데 그가 분명하게 환상으로 받은 지시를 기억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예언 사역에 열려 있는 많은 사역자들이 그들의 삶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하심에 대해서 비슷한 간증을 한다. 예수님께서 지시를 내리실 수 없다면 교회의 머리가 되실 수 없다.
종종 예수님께서는 예언과 지식의 말씀과 지혜의 말씀과 꿈과 환상을 통해서 그 일을 하신다. 영적 성숙이란 하나님께서 그가 원하시는 대로 자유롭게 말씀하시고 이끄실 수 있으며, 또한 그가 구체적인 지시를 하지 않으실 때에도 우리가 해야 하는 것들을 할 수 있을 만큼 지혜롭게 되는 것을 뜻한다.
많은 이들이 영적인 성숙의 두 번째 부분을 불경한 것이라고 혼동한다. 그들은 만일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시지 않은 것들을 하게 되면 우리 마음대로 결정하고 하나님께 축복을 바라는 것이라고 느낀다.
물론 그렇게 하는 많은 사역과 교회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도 않으며 그분의 지시를 전혀 들을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가 자발적으로 행동하기를 원하시는 영적인 성숙의 단계가 있다.
우리 자녀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내 딸에게 친구에게 전도하라고 말을 해서 그녀가 순종한다면, 나는 흐뭇해 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자발적으로 전도를 했다면 나는 훨씬 더 기쁠 것이다. 딸의 순종도 나에게 중요하지만, 그녀가 스스로 그 옳은 행동을 하게 될 때 나는 그것이 진정 그녀의 마음에서 우러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단순한 순종보다 나에게 더 큰 기쁨이 될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왕의 왕이시며 주의 주이시다. 우리는 언제 그분의 권위 아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분 밑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다스리도록 우리를 준비시키실 것이다. 우리에게 일일이 지시를 하시지 않아도 우리가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
성경은 마지막 때에 이전에 없었던 매우 큰 어려움이 닥칠 것이라고 증거한다. 교회가 생긴 이래 그 어느 때보다도 예언과 지식의 말씀과 지혜의 말씀과 분별의 영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굳게 서고 원수의 계락에 맞서기 위해서 그것들이 필요할 것이다.
사역에 있어서도 더 많은 정확성과 효율성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면 아무리 올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적의 의미
이적과 기사는 장난감이 아니라 도구이다. 물리적인 이적과 같이 영적인 이적도 우리를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성령의 나타나심이 교회에 두루 나타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물어야 한다.
교회 역사를 통해서 요즘 흔히 '성령 안에서 죽임을 당한다'(being slain in the Spirit)고 불리는 현상들(성령의 임재에 의해서 사람들이 쓰러지는 현상)이 기록되어 있다. 어떤 것들은 가짜일지 모르지만, 많은 경우 분명히 꾸민 것이 아니다. 성령님께서는 사람들을 바닥에 쓰러뜨리시고 어떤 경우에는 몇 시간 동안 꼼짝할 수 없게 두시면서 실제로 사람 가운데 운행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재미로 사람들을 쓰러뜨리시는 것(slaying people)이 아니다. 그와 같은 성령의 나타나심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지 변화시키시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죽이시려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행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과 세상에 대해서 죽어야 한다.
1970년대에 또 다른 흥미로운 영적인 현상이 많은 교회를 휩쓸기 시작했다. '다리 늘어나기'라고 불리는 강한 기름부으심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한쪽 다리가 짧거나, 혹은 다리가 아니라 좌골에 이상이 있어서 생기는 허리 병을 앓고 있었다. 나를 비롯한 짝 다리나 좌골에 이상이 있던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받고 곧바로 치유를 받았다. 다리가 늘어나는 기적은 정말 재미있는 일이었으며, 어떤 기적들은 정말 대단한 구경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특별한 이적을 통해 전하시려고 했던 메시지를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말았다. 그 메시지는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바로 잡으셨던 것처럼 영적인 불균형을 바로잡을 동일한 기름부음을 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오늘날 지식의 말씀의 은사가 점점 더 구체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몇 년 전에 한 집회에 참석했던 열 명의 심장병 환자가 기도를 받기 위해서 일어나 모두 치유되는 엄청난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은 여전히 놀라운 일이지만 이제는 그리 대단한 일이 못된다. 때로는 열명의 이름을 부르고 그들이 얼마 동안 병을 앓고 있었는지, 수술을 몇 번 했는지뿐만 아니라 하나님만이 아실 수 있는 비밀스런 일들과 같은 세밀한 사항들까지 말할 수 있는 사역자들이 지금은 많이 있다.
이러한 초자연적인 현상은 어떤 개인이 뛰어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호이다. 마지막 때가 다가올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구체적이고도 정확한 말씀을 듣는 능력을 극대화해야 한다. 예전에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음성을 이전보다 좀더 분명하고 정확히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하였느니라"(행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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