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치유의 9가지 지침.
토마스 하트 .
생명
세째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편이며 우리의 친구이시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의 문제이다.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그것을 향유하게 하려는 것이다. 치유와 해방. 성장이 있는 곳마다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되고 있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을 발견하며 그들이 이룰 수 있는 최대의 성취와 행복에 이르고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활동도 그 목적에 다다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압제와 제한. 고통을 일으키는 모든 것과 싸우시며 우리에게 해방과 치유. 화해. 조화와 기쁨을 주려고 애쓰신다.
크리스챤들조차도 늘상 이것을 믿지 못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전력을 기울이신 것이 특정한 생명계획. 즉 우리를 억누르는 모든 것들로부터 그들을 자유케 하려는 것이었음을 알지 못한다.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세상에서 이룰 하나님의 뜻과 일로 보셨기 때문에 바로 거기에 사역의 초점이 맞춰졌었음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생명을 가지며 그것을 최대한 소유할 수 있도록 치료하시고. 용서하시며. 가르치셨다. 그분이 대항해 싸웠던 것은 자신을 죽음에 처하게 한 압제적이고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체제들이었다. 그런데 그 체제들이 그분을 죽음에 처하게 한 것은 그분이 하시는 일로 인해 자기들이 손실을 당하기 때문이었다.
그분이 사셨던 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과 활동이 가장 명백히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비극적 죽음에서 우리는 인간의 죄악이 낳은 그 비극까지도 하나님께서 참으실 수 있음을 보는 것이다.
세상에는 악이 자리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에겐 자유가 주어져있기 때문에 종종 타락하여 멸망을 낳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고통 가운데 우리 앞에 앉거나 서거나 누울 때. 이 원칙은 그것이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기 원하고 계신 생명임을 말해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과 함께 말하고 계심을 확신할 수 있다. 즉 그들을 괴롭히는 악의 편에 서시지 않으시고. 그 악에서 그들을 해방시키며 그들의 치료와 성장을 촉진시키는 편에서 일하심을 확신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선을 이루도록 그들을 돕기 위해 거기 계신다. 상담자나 영적 지도자 또는 임상의사로서 우리도 이와 똑같은 목적들을 이루기 위해 수고한다. 그것은 우리의 협력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사역이다.
비극과 고통의 처리
네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비극이나 고통에 처하게 하시지 않으신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 하셔서 그 비극과 고통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이 원칙은 앞의 원칙의 논리적 귀결로서 명백히 유추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삶의 다양한 고통을 다룸에 있어 이 원칙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린아이였을 때 성적 학대를 당하게 하거나 그것을 의도하신 분은 하나님이 아니시다. 우리가 암이나 AIDS에 걸리게 한 것도 하나님이 아니시다. 우리가 이혼을 하게 하거나 고독에 빠지게 하거나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기로 작정한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다.
그러면 그처럼 우리에게 깊이 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상황들이 벌어졌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단 말인가.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우리의 고통을 슬퍼하고 계신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일하셔서 우리가 당하는 악으로부터 모든 가능한 선을 낳게 하고 계신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실체의 근원에 자리하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결정은 자신과는 순전히 구별되는 세상을 만드시는 것이었고. 그래서 세상을 자유롭게 창조하셨다. 이 자유는 존재의 사닥다리의 맨 아래 있는 가장 단순한 행위자에게도 미칠 정도로 주어졌으며. 특히 인간에게 광범위하게 주어졌다.
이러한 자유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발생하게 하거나 발생을 막는 등 통제하실 수 없는 것이 많이 있다. 그래서 특히 인간은 그들이 하는 결정에 의해 멸망과 고통을 초래한다. 하나님은 이것을 엄격히 금하실 수 없으며 단지 창조된 대리자들을 통해 부추기고. 권유하며. 때로는 대항하게 하실 수 있을 뿐이다.
이 원칙의 중요성은 우리에게 악한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께서 어디 계신가 하는 문제의 정의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대항하시기보다는 우리 편에 서계신다.
바로 우리에게 생명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비극이 발생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슬픔과 갈등 속에 우리와 함께 계셔서 그것들로부터 실현될 수 있는 모든 선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와 함께 일하고 계신 것이다.
고통에 대한 우리의 태도
다섯째로 고통에 대응하는 크리스챤의 바른 자세는 그것에 대항하고 극복하려는 태도이며. 그래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은 희망을 갖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원칙은 신구약 성경 모두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들을 억누르고 있는 고통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시기 위해 끝없이 일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애쓰셨다. 그분은 심지어 그분 자신의 구속과 처형에도 일단은 저항하시고. 그 후에야 그것을 받아들이며 자기의 사건을 하나님께 위탁하셨다.
고난은 선이 아니고 악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대응은 그것을 제거하려고 애쓰는 본능적인 대응과 꼭같은 것이어야 한다. 이 원칙의 두번째 부분은 우리가 최선을 다한 그 상황 속에 여전히 고통이 남아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이 희망은 남아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 중에 함께 하셔서 그것으로부터 비롯될 수 있는 최선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시기 때문이다.
영적인 사람에게 있어서의 위험은 이 원칙의 두번째 부분을 첫번째에 놓고 그 고통에서 선이 나올 수 있으므로 고통이 정말 선한 것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것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표시로 높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나쁜 것이 선한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분은 결코 상처입은 사람에게 “이것은 너에게 선이다” “이것은 네게 대한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표시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고통을 보는 즉시 그것을 제하시고 곧바로 그것을 경감시키셨다.
우리가 상담자와 임상의사. 그리고 영적 지도자로서 인간의 고통을 다룸에 있어 우울은 분명히 악이며 가능한 한 극복되어야만 한다. 고독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를 갈라놓는 관계들은 악이며. 바로잡아지거나 끝나야만 한다.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 영적 기회와 초청의 많은 부분은 그것들의 수용이 아니라 그것들을 극복하려고 애쓰는 데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을 때에만 개인성장을 위한 기회가 그 수용에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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