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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덕 공산군에 붙잡혀 순교

Joyfule 2009. 3. 13. 00:43

원성덕 공산군에 붙잡혀 순교

[1889-1950 순교자, 장로교 목사, 독립운동가, 신성학교 1회 졸업생
평북 구성군 관서면 출생]

1. 일제의 수탈시대에 태어난 원성덕

일제치하에서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자주의 기치를 들고 전 민족이 거족적으로 일어났던 이른바 기미 3.1 독립만세 사건은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직접적으로는 소위 무단정치인 헌병들의 비인도적 횡포,또는 저들의 조선 민족성 박멸 기도, 사법적 처우나, 행정절차에 있어서 극심한 조선인의 차별우대와 기회의 불균등,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신앙이나 결사의 자유 박탈, 그리고 종교에 대한 기독교 대하여 근절 정책, 조선인의 해외여행의 통제, 교육의 금제조치,또한 농사짓는 논밭의 수탈,조선 청년들의 이상과 희망을 꺾어 버리기 위하여 퇴폐와 타락을 목적으로 하는 비도덕적 시설,또한 살벌한 만주벌판으로 강제로 이주시킨 이미 정책으로 이 땅에서 민족을 몰아내고 완전히 저희 국토로 만드는 그런 야만적 수탈 행위에 쌓이고 쌓인 불만이요, 이 숨막히는 현실에서 민족의 자주와 나라의 독립을 위한 외침이었다. 이러한 3.1운동에 그 누구라고 앉아서 당하고 손을 묶고 보고만 있겠는가?

 

특히 그 중에도 한국교회와 그 지도자들에게서 민족 구원을 위하여 살신성인하는 열화같은 애국열정을 볼 수 있었다. 그 한 예로 민족대표 33인 중에 이승훈,양전백, 이명룡,유여대,김병조, 길선주,신홍식,박희도,오화영,정춘수,이갑성, 최성모, 이필주,김창준, 박동완.신석구등 목사, 또는 장로를 비롯한 기독교 인사만 절만인 16명이 참가한 것만 보아도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뿐만 아니라 국내외에 대한 독립선언서 및 각종문서 전달에서도 교회는 커다란 일을 해냈다.

 

바랄 수도 없지만 한국내에서도 이미 조선총독부가 이 독립 선언 운동을 치안유지법 저촉으로 발표한 뒤였다. 이런 정세에 발맞추어 민족독립쟁취를 위한 투사들과 같이 하여 독립선언문을 등사하면서 출신지인 평북 구성군의 유지들과 청년들에게 보내는 일에 적극 선두에 나서 이를 진두지휘하는 선봉에 섰던 사람이 바로 원성덕이었다.

 

그는 1889년 10월 7일에 평북 구성군 관서면 조악동에서 원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원성덕은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열심있는 학동으로 신성학교를 졸업하였다. 이 학교는 평북 선천군 선천읍 대목동에 설립된 기독교 학교로 1906년 4월 18일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와 함께 양전백, 안준, 김병룡,김석창, 어정권 등에 의해 설립된 중등 과정의 남자학교였다. 이렇게 설립된 신성학교의 역사는 사실상 그 태동을 선천읍 북교회에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즉, 1898년 선교사 휘트모아가 선천읍에 선교 거주지를 정하고 정착하게 됨으로써 선천은 평북선교사의 조사였던 양전백 등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교육과 개화자강의 이념으로 설립된 이 학교는 그 뜻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장으로 [선천중앙회]를 발족(1905.7) 시키기에 이르렀으며 구남교회당을 빌어서 개교식을 가지니 신입생 2명에 6명의 교사로 출발하여 1909년 6월에 비로소 제1회 졸업생으로 원성덕을 포함한 9명을 배출했다.

2. 목회자의 길

그는 평소에 꿈이었던 목사가 되기 위하여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후 목사로 안수받아 교회를 섬기는 중에도 나라 사랑의 일념은 식을 줄 몰랐다. 이와 같이 목숨걸고 뛰는 그를 일제가 잘 해보라고 가만히 둘리가 없었다. 이로 인하여 원목사에게 일본 경찰의 체포명령이 내려지는가 하면 그를 총살하라는 명령이 적힌 현상금까지 걸린 수배자라는 걸 온 시내에 깔린 전단지를 자신도 주워 읽을 수가 있었다. 일단은 몸을 숨길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친구인 윤하영 목사와 함께 평북 구성군 관성면 조악동 고향 마을 최창학씨가 경영하는 금광굴에 은신을 하고 초조한 나날을 보냈다. 가장 애가 탄 것은 물론 부인이었다. 주위에 사람없는 틈을 살펴서 준배해온 주먹밥을 끈을 달아 내리면 이 줄을 신호로 연락을 취하면서 이렇게 연명해갔다. 그와 함께 했던 윤하영 목사는 선천 주재선교사 램프에게 전도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후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가산교회를 시무하는 중에 램프 선교사가 교장으로 있던 선천고등성경학교에 입학하여 3년 간의 과정을 마치고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수학중에 3.1운동을 맞아 고향인 의주로 돌아가서 광평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운동을 지도하다가 일경에게 잡혀 1년여의 옥고를 치루었다.

 

 출옥 후에 다시 신학교를 복학하여 1921년 제14회로 졸업하여 평북노회에서 안수받고 용천군 용계교회를 시작, 신의주 제일교회를 시무하던 중 1938년 신사참배 운동에 맞서서 반대운동을 펴면서 이듬해 1939년 총회장직을 맡아 교계를 지도하였다.

1914년 창씨개명도 반대하다가 구속되어 목사직도 박탈당하고 해방이되기까지 은둔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원 목사는 이 친구와 함께 일하다가 그가 먼저 체포된 뒤를 이어 체포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르면서 목숨을 건졌다. 출옥 후에 목사로서 구성 남시교회,철산 연동교회와 원폐영교회 그리고 구성 신시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8.15 해방을 맞았다.

3. 공산군에 붙잡혀 순교.

해방 후에는 의주 영산교회를 섬기다가 1950년 6.25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해 12월 북한 공산군은 완전히 손을 들어야 할 즈음, 중국 공산군의 개입으로 사태 위기를 모면하려던 저희들은 이에 거슬리는 인물들은 누구를 불문하고 직결 처단하는데 혈안이 된 때에 인민군의 손에 잡혔으나 어찌 살아 남기를 바랄까? 목사로서 산다는 것이 당시에는 좀 이상할 그 때였다. 원목사는 잡아끌려 산에서 죽었는데 사지를 옷을 찢듯이 찢어죽이던 날 부인과 가족 모두 함께 총살형으로 처형되니 이로써 영광스런 순교 대열에 서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