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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하영 민족운동가 3.1운동

Joyfule 2009. 3. 12. 00:30

오하영 민족운동가 3.1운동


1. 서론

1919년 2월 14일 이승훈(본명 이인환,호 남강) 장로는 평양기흘병원에 목사들을 모으고 3.1운동 거사에 대하여 비밀회의를 열었다. 그때에 몇몇 목사들은 이 장로의 설명을 듣자마자 자기들은 종교인이므로 그러한 정치 운동은 할 수 없으니 빠지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남강은 책상을 치며 "나라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천당엘 갈 수 있소! 이 백성이 지옥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목사들만 이 천당에서 편히 앉아 내려다 보겠소?"라고 하였다.

이때 독립운동에 참여하겠다고 나선 이들이 장로교의 길선주,감리교의 신홍식이었다.

오화영이 오산학교 교장이며 3.1운동 주도자인 남강을 만난 것은 이로부터 일주일 후인 2월 20일 경성부 수창동(현 창신동) 229번지 당시 중앙청년회 간사 박희도의 사랑방이었다.

박희도와 오화영 목사를 비롯하여 이곳에 모였던 정춘수 목사,오기선,신흥식 목사는 의기가 투합되어 다같이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뜻을 모았다. 구체적 방안으로 경향에 기독교인 동지를 구하여 이들과 함께 일본 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키로 하였다.

2. 성장배경과 독립운동

오화영 (호는 菊史,1879-1959?)은 감리교 목사이고 독립운동가이며,민족대표 33인중의 한 사람이며 2대 국회의원이었다.

국사는 황해도 평산군 평산면 대촌동에서 오석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리승만 전대통령과 면은 다르지만 같은 군이다. 9살부터 19살까지 10ㄴ녀동안 한학공부를 하였다.

이 무렵부터 동학에 가담하여 활동하였으나 동학란이 실패로 돌아가자 만주로 망명하였다. 국사는 이때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고,기록에는 없으나 이곳에서 기독교를 접한 것 같다. 1906년 그의 나이 26세때에 세례를 받고,1909년부터(개성서구역)을 맡아 전도를 시작하였고,1911년 정식으로 개성북부교회 전도사로 파송을 받았다. 1913년부터 1917년까지 원산상리교회를 담임하였다.

국사는 좀 더 신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협성신학교(현 감리교 신학대학 전신)에 입학하여 1918년에 졸업하였다.재학중인 1917년부터 종교교회를 담임하였고,1918년 장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종교교회 재임중 삼일운동에 가담하였다. 재판기록을 보면 경성부 도염동 32번지 예수 남감리교 목사 오화영 40세라고 되어 있다. 2년반의 옥고를 치르고 나와서 수표교회에 1922년 5월부터 3개월동안 목회를 하다가 다시 종교교회로 옮겼다. 1925-27년가지 개성북부교회에서 목회하다가 1927년 다시 수표교회 목사로 취임하였다.

 

오 목사는 이때부터 신간회 간부,물산장려본부 이사장으로 활약하였고 YMCA 간사로도 봉직하며 강연도 여러번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만세사건이 터지자 동아일보 편집국장 주요한.이용설.박연서 목사와 오목사 자택에 모여 사후대책을 강구하던 중 일경에 체포되어 두번째 옥고를 치르었다.

 

1930년 사회영 실비의원 원장으로 취임하는 한편 수표교회 목사도 사임하였으니 이때부터 일선 목회를 떠났다. 이후 농사를 짓다가 항일비밀결사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다시 검속당한 후 6개월의 옥고를 치르었으니 이것이 3번째이다. 2월 27일 제동 최린 자택에서 다시 회합독립선언서에 천도교대표 손병희,장로교 대표 길선주,감리교 대표 이필주,불교대표 백룡성의 순위로 33인 민족대표가 서명 날인하였다. 오 목사는 27번째에 서명되어 있다.

3월1일 오후2시 명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체포되었다. 1920년10월30일 경성복심법원(재판장 판사 총원우태랑)에서 징역 2년 6개월의 판결을 받고 형을 다 채우고 나왔다. 1920년 3월22일자 고등법원 특별형사부 판사 도변 창이 판결 이유에 오목사에 관한 기록이 나와 있다.

오화영은 동년 (1919)2월 28일 (1) 김창준으로부터 독립선언서 약 100매를 받아 가지고 사람을 시켜 동일 경기도 개성군 목사 강조원쪽으로 송부하였는데 강목사는 이를 개성 사립 호수돈여자 고등보통학교 서기 신공량에게 교부하고 동인은 동소에서 사람을 시켜 공중에서 배포하였으며, (2)전기 박희도 방에서 독립선언서 약 2.300매를 받아 가지고 기독교 전도사 곽명리로 하여금 원산부에 지참케 하였는데 동인은 동일 그곳에 가지고 돌아가 동목사 이가순에게 교부하고 동인은 다음날 3월 1일 원산부 시장에서 낭독,배포하였다.

오화영은 독립선언서에 날인만 한것이 아니라 동지를 통하여 개성과 원산두 요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도록 행동하였다. 1945년 8.15 해방은 그의 생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목회도 항일도 떠나고 정치일선에 나섰다.

3. 8.15해방후의 오화영

1945년 8월에 건국준비위원으로 피택되었고 조선민족당을 결성하여 당수가 되었다. 우후죽순처럼 생긴 정당을 통합하려고 정당통일기성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고 각 정당행동통일위원회 회원으로 되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한중협회회장,신한민족당 정치국장,반탁총동원회 위원등의 요직도 겸하였다. 1946년에 비상정치회의 의원,2월에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정무위원 및 외교협회 이사,대한독립총성국민회 부회장,독립쟁취전국대회 회장 및 조선정치학관 관장,조선정치대학 기성회장 및 조선통일총본부협의원,남조선과도정부 입법의원,1948년 재단법인 조선징치대학관 이사 및 관장,1949년 정치대학(건국대학교의 전신)의 초대 학장을 지냈다.

 

1950년 서울 종로 을구에서 제2대 국회위원으로 당선되었으나 얼마 안되어 6.25사변이 나자 공산군에게 납북되었다. 그는 북한에서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식에서 축사를 하도록 강요당했고 조소앙,안재홍 등과 함께 최고위원으로 강제 동원되었다. 또 북괴는 인민경제 대학에 입학시켜 그의 사상을 바꾸어 이용하려 하였으나 들리는 바에 의하면 1959년에 별세하였다고 한다. 고향은 이북이지만 사상과 이념은 타향인 북한에서 80세를 일기로 소천한 것이다.

 

그는 황해도에서 태어나 원산과 개성에서 목회를 하였고 남쪽에서는 종교교회와 수표교회에서 시무하였다. 남북을 두루 다니며 목회를 한 것이다. 그는 교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한번 있던 교회에 다시 가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며 교역자의 성격이 원만하고 존경을 받아야 다시 초빙을 받게 된다. 그런데 오목사는 종교교회와 수표교회에 다같이 두번 초빙되었다.그는 설교를 통하여 민족운동을 고취시키는데 노력하였다. 그의 독립운동도 서울에서 시작하여 목회와 인연을 맺은 개성과 원산에서 활약하였다. 3번에 걸친 영어의 생활이 그의 굳은 의지를 웅변적으로 말하여 준다. 그는목사이기전에 나라를 사랑하고 구하고자 한 애국의 선도이다. 해방후 이 나라를 구하려고 정치에 투신하였으나 혼란한 정국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그가 교육에 공헌한 면을 잊을 수가 없다. 1917년에 원산상리교회에 시무하면서 원산 사립 광성소학교 부교장으로 일하였고 1948년 조선정치대학관을 세워 오늘의 건국대학교로 발전하는 모체를 만들었다. 그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다. 말년은 더욱 불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목회를 하고 정치를 하며 동시에 교육사업에 평생을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하여 살다간 감리교도이다.

 

슬하에 외동딸 응선(후에 四羅로 개명)은 배화여학교(2회)를 졸업하고 루씨여학교 선생으로 있을 때 여성독립만세 사건으로 영어의 생활을 한바 있다. 응선의 아들 오목사의 외손 현종세 는 기감 혜명교회 장로인데 총신대를 졸업하고 고향인 온양시 신인2동에 성함교회를 개척하였다. 현 장로는 남매를 두었는데 딸 애섭은 아버지의 개척교회에서 성가대를 지휘하고 있다. 이렇게 신앙의 맥은 이어져가고 있다.

= 참고문헌 =
민족대표 33인전,오재식편저. 애국정신선양회,1959.
종교교회 70년사,김세한 1970.
독립운동사자료집 5,3.1운동 재판기록 등.(이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