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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길 전도와 심방의 전도사로 6.26때 순교

Joyfule 2009. 3. 11. 00:45

오병길 전도와 심방의 전도사로 6.26때 순교

[1897-1950 순교자.장로교 전도사.전북 고창군 출생]

1.선구자적 집안에서 태어나

동학군의 발상지인 전라북도 정읍군 고부에서 가까운 전북 고창군 공음면 덕암리에서 1897년 오윤팔이 네째 아들로 오병길은 태어났다. 바로 이때는 동학군이 참패를 당한 지 3년 뒤인 매우 어수선한 시기였다. 나라 안팎이 온통 삼검불처럼 뒤엉키고 복잡한 외세의 간섭이 심한 때였다. 고창은 전북이면서도 당시에 전남노회에 소속되어 있었다. 미국 남장로회는 선교사가 주재하고 있는 광주와의 연락이 빈번했다. 이곳 고창지방 교회도 1900년에 전남 영광지방에 여러 교회가 세워질 때 영광교회에서 고개 하나를 넘으면 바로 고창땅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세워졌다. 이때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이아락 목사는 이 교창 고개를 넘나들면서 복음을 열심히 전했다. 그러나 그 열성에도 불구하고 누구하나 귀를 기울이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외국인에 대한 감정은 좋지 않아 배타심 또한 대단하였다.

 

그러나 고창군 공음면 덕암리 오씨들 생각은 달랐다. 암담하고 혼란한 이 때에 우리가 빨리 개화해서 이 민족활로를 찾아보자고 하여 이 마을의 오창언,오병희 오윤팔,오동근 등이 중심이 되어 이아락 선교사와 함께 교회를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현실은 어두웠어도 그들의 얼굴에는 새로운 기대감으로 가득차고 넘쳤다. 그 기대감이란 적어도 민족을 구하고 낙후된 습관을 좀더 적극적으로 고쳐보려는 거룩하고도 희생적이며 역사적인 그런 기대감이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비웃었다. "이제 저늠들 집안 망하게 생겼다."그래도 이런 것쯤은 참아야만 했다. 그후 이런 날이 몇날 안되어 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에 병길이도 아버지를 따라 교회에 출석하였다. 오병길은 머리가 총명하여 이아락 선교사가 가르쳐준 성경을 그날로 다 암기하였다. 요한복음 3장 16절도,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30절을 단숨에 암송하는 병길을 지켜보던 선교사는 그를 그냥 둘수 없다고 생각했다. 저 소년을 광주에 데려가 공부를 시켜야지 하고 광주숭일학교에 입학시켰다.입학식장에서 "여러분! 베드로는 참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누가 사도행전 2장 32절을 한번 읽으세요"다른 학생이 읽기 바쁘게 물론 오병길이 받아 읽었다. 이 선교사는 설교를 했다. 마지막 마치는 때에 이런 말을 했다."베드로는 얼마나 약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러나 마지막에는 예수만 증거하다가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순교하였습니다."오병길은 순교의 말에 귀가 번쩍 들렸다. '그래 나도 베드로와 같이 핍박 속에서 목숨을 요구하면 기꺼이 베드로처럼 순교의 길을 가야지...'이렇게 감명깊은 성경학교의 입학은 시작되었다.

2. 전도와 심방이 그의 일생

성경학교를 졸업하고 첫 부임한 교회는 전남 영광군 염산면 야월리 마을에는 새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제사도, 술도,도박도 사려져 갔다. 오전도사에게 감명을 받고 그의 신앙지도를 따르면서 성장해 왔던 최재섭 등 65명이 결연히 신앙의 순결을 지키다가 6.25동란에 65명의 순교자를 낸 야월리교회가 바로 이 교회였다.

 

오 전도사는 고향인 고창군 부안면 용산교회,홍덕면 홍덕교회.해담면 동호교회 등 약한 교회만 다니면서 전도하다 부흥되면 떠나곤 하였는데 그 무렵에 새로 부임한 교회가 전북 부안군 백산면 평교교회였다. 부임하자 집안 살림은 부인에게 맡기고 전도밖에 모르는 전도사로 이름이 높았다. 그리고 어려운 교인들에게 신세질까봐 항상 미싯가루를 만들어 가지고 다니다가 시장하면 우물가에 앉아 시원한 냉수에 타서 마시며 시장기를 면하곤 했다. 그야말로 전도와 심방이 그의 일생의 전부였다.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성령의 도움만 의지하고 전도에만 열중하였다.

3. 부엌-지하실에서 예배드리다 붙잡혀 순교

이러는데 6.25사변은 터졌고 국군은 둑이 터져 들어닥치는 인민군들에게 내어 주고 계속 후퇴만 하는데 몇날이 못된 7월 하순께 부안군 백산들녘에도 물밀듯이 인민군들은 밀어닥쳤다. 이 고장에 들어서자마자 공산군은 교회부터 점령하고 오전도사를 쫓아냈다. 할 수 없이 본가에 돌아왔다.

 

예배드릴 처소를 뺏긴 교인들은 오 전도사의 큰 아들의 집 오주환 집사의 부엌에 지하실을 파놓고 주일이면 온 가족이 모여 벽에 태극기를 걸어 놓고 예배드리기를 시작했다. 이것만이라도 너무 감격하여 "오! 하나님 아버지! 이제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지하실에서 찬송을 불러대기도 했다. 9월에 접어들자 공산군은 소위 반동분자와 기독교인 수색에 나서 손안닿는 곳 없이 마루바닥,방바닥 두들겨보고 쑤셔보는 중에 오 집사 부엌 바닥도 이렇게 저희에게 발각이 되고,자녀들이 보는 목전에서 여지없이 만신창이 나도록 짓이기니 3부자를 철사줄로 묶어 공음면 분주소로 끌어갔다. 3부자는 찬송을 불렀다. 공산군은 손에 잡히는 대로 쳐서 전신에는 피투성이가 되어 점점이 땅에 흘리기는 아들도 한 가지였다.

 

9월9일이 왔다. 오 전도사의 인민재판의 날이다. 공산주의의 사형집회 의식의 하나일뿐 재판이 아니다.면분주소 앞뜰에서 이승만 괴뢰정부 앞잡이,또 미국과 내통하는 스파이,선량한 인민의 피를 빠는 흡혈귀라는 죄명으로 선고받고,옆구리에 가슴에 아랫배 등 수없이 창으로 찔려 그야말로 형언키 어려운 참상을 당하고 그 이튿날 두아들도 저들의 온갖 회유와 설득협박을 거부하다가 아버지가 당한 순교의 뒤를 따르기로 결심하고 저희에게 대창으로 일가족 삼부자의 장한 순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