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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구제

Joyfule 2014. 9. 4. 05:36

 

 

 

유대인의 구제

 

 

가난해서 남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남을 돕는 일이다.  상대방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게 돕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세익스피어가 유대인을 돈 밖에 모르는 잔인한 수전노로 묘사한 이후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대인을 자기밖에 모르는 구두쇠로 알고 있으나 사실을 정 반대이다. 유대인만큼 구제를 귀하게 여기는 민족이 없다. 유대인들은 남을 돕는 것이 생활화 되어 있다.  상대방을 돕게 그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도우려고 수 많은 연구를 아끼지 않는 유대인, 그들의 구제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구제의 단계


유대 전통은 구제를 행하는 사람의 구제 방법에 따라 그 선행의 정도를 여덟 단계로 나누고 있다.


가장 높은 단계의 구제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어 그가 사업을 일으키게 하거나,

혹은 그와 동업을 하던지 직업을 구해주어 그가 구제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돕는 일이다. 
  
두번째 단계는 구제하는 자나 구제 받는 자가 서로 모르는 상태에서 도움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이다.  구제를 받는 사람은 누가 자기를 돕는지 모르기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받을 일이 없고, 구제하는 자는 아무도 모른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계명을 지킬 수 있겠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옛날 유대인들은 성전의 한 방을 지정하여 아무나 은밀하게 구제금을 갖다 놓을 수 있도록 하였고 도움이 필요한 자는 누구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노출하지 않고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세번째 단계는 돕는 자는 자기가 누구를 돕는 지 알지만 도움을 받는 자는 누가 돕는지 모르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어려움을 당한 가난한 사람의 집에 몰래 가서 돈이나 필요한 식량 등을 놓고 오는 경우이다.  이 경우 도움을 받는 사람은 누가 자기를 돕는지 모르므로 부끄러움을 덜 갖게 된다.
 
네번째 단계는 도움을 받는 사람은 자기를 돕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나 도움을 주는 사람은 누구를 돕는지 모르는 경우이다.  옛날 유대인들 중 여유있는 사람들은 보자기에 돈이나 그 밖의 물건 등을 느슨하게 싸서 어깨에 메고 길을 걷는 풍습이 있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그의 뒤에 가서 필요한대로 가져가면 되었다.  이렇게하여 도움 받는 사람이 도움을 주는 사람에게 자기의 모습을 보이지 않음으로 부끄러움을 면할 수 있었다.
 
다섯번째 단계는 도움을 요청받지 않았으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직접 도움을 주는 경우이다.  도움받는 사람이 아쉬운 소리를 하기전에 도와줌으로써 사람앞에 직접 도움을 부탁하는 수치를 면케하는 경우이다. 

 

여섯번째 단계는 어려운 사람의 요청을 받고 직접 돕는 단계이다. 

 

일곱번째 단계는 자기가 도울 수있는 양보다 적은 양을 돕되 기쁜 마음으로 돕는 경우이다. 

 

여덟번째 단계는 무뚝뚝한 태도로 돕는 경우이다.

 

유대인들은 이와 같이 돕는 방법에 많은 신경을 쓴다.  세익스피어는 유대인을 인색한 사람으로 그렸지만 유대인만큼 구제에 열심인 민족이 없다.  유대인들의 구제에 대한 연구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누가 도와야 하는가? 누구를 도울 것인가?  얼마나 도와야 되는가?  어떤 방법으로 도와야 하는가? 이들 질문에 대한 많은 연구로 유대인들은 구제의 정의, 대상, 범위, 방법 등에 대하여 독특한 실천 역사를 갖고 있다. 

유대인은 구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정의를 알아보자. 

 

쩨다카


히브리어로 구제를 가리켜  쩨다카라 한다. 쩨다카라는 말이 '구제'를 뜻하는 전문용어로 사용된 것은 랍비문헌이나 탈무드에서 처음이다.  그럼 쩨다카라는 말의 어원을 살펴보자.
"너는 마땅히 공의만 좇으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얻으리라." 랍비들은 위의 신명기 16장 20절 말씀을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기도 한다.  "너는 마땅히 구제하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얻으리라."  쩨데크를 '공의'가 아니라 '구제'로 해석한 것이다.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원래 구약시대에는 구제에 해당하는 전문용어가 없다.  그러므로 유대의 랍비들이나 율법학자들은 미쉬나익 히브리어  이후로 쩨다카라는 말을 구제를 뜻하는 전문용어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랍비들이 이 용어를 선택한 이유는 이 용어가 다니엘(4:24)이나 외경(벤시라 3:30; 7:10, 토빗 4:7; 12:8-9) 등에서 구제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라고 제시한다. 탈무드시대이후 쩨다카는 구제를 뜻하는 전문용어로 정착되었다.  이 용어가 일반 대중에게도 '구제'를 뜻하는 말로 정착되면서 심지어는 성서의 본문에서 '구제'를 뜻하지 않는 부분까지도 '구제'라고 해석하게 되었다.  위에 제시한 신명기 16장 20절이 그 경우도 그 한 예다.


쩨다카라는 말은 원래 '의 (Righteousness)' 또는 '정의(Justice)'나 공의(Justice)를 뜻한다.  구제와는 거리가 있는 용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쩨다카라는 용어를 '구제'라는 용어로 사용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구제는 공의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할 의무라고 믿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전통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구제할 의무가 있고 또 필요한 사람은 부끄러움 없이 구제 받을 권리가 있다.  유대인의 구제는 권장 사항이 아니라 의무 조항이다.  그러므로 구제는 마음 좋은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유대인이면 한 명도 예외 없이 지켜야할 의무이다.  심지어 구제를 받는 사람도 이 의무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구제받는 사람도 구제하며 살아야 한다.  비록 자기가 구제 받는 입장이라 하여도 그에게 주어진 쩨다카의 의무는 면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구제 받는 자가 구제하는 자보다 오히려 자기들에게 또는 자기들 가정에 유익한 복이 된다'고 가르친다. 왜 그러한가?  구제하는 자는 자기에게 선행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지만 구제 받는 자는 그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겐 구제하는 것이야말로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계명 중의 하나인데 구제 받을 사람이 없다면 이 계명을 지킬 기회를 잃게 되고, 결국은 가장 중요한 축복을 포기하게 된다는 믿음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모든 재산이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관심에 따라 알맞게 나누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탈무드는 "그에게 속한 것은 그에게 주어라, 네 소유 중에 그의 것이 없나 살펴라" 라고 가르친다. 내가 타인의 것을 가지고 있다가 그것을 다시 돌려 주었다면 이는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남을 돕고 이를 자랑하지 아니한다.  남의 것을 돌려주고 무슨 자랑을 하겠는가?  유대인들은 쩨다카를 통하여 정의가 성취된다고 믿는다. 

 

예산 
모든 유대인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쩨다카(구제)에 참여 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수입의 얼마를 쩨다카로 사용하여야 하는가?  유대인의 전통에 따르면 수입의 십분의 일을 구제에 쓰는 것이 보통 수준이다.  이십분의 일이나 그 이하를 구제에 쓰는 사람은 인색한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은 쩨다카의 의무에 게으르다고 볼 수있다.  십분의 오를 쩨다카에 쓰는 사람은 최선을 다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십분의 오 이상을 구제에 쓰는 것은 권장하지 않는다.  그 자신이 구제의 대상이 되어선 안되겠기 때문이다. 

 

구제의 대상

 유대 전통에 따르면 구제 대상의 선정에 우선 순위가 있다.  제일 순위는 아내이다.  남편의 도움이 제일 먼저 필요한 사람은 아내이기 때문이다.  아내에게 꼭 필요한 것은 없는가?  경제적인 이유로 아내가 당하는 고통은 없는가?  그녀에게 필요한 도움은 무었인가를 먼저 살핀다.  제이 순위는  자녀들 중의 미성년자들이다. 그들의 영양상태는 양호한가?  경제적인 문제때문에 학교나 친구들 사이에서 당하는 어려움은 없는가?  그 밖에 정신적인 면이나 물질적인 면에서 필요한 것은 없는가?  자기 가정에 어려움이 없다면 가정 밖의 사람들을 돌아본다.  자기 가정 밖의 제 일 대상은 부모님이다.  (유대인들은 결혼한 후 창세기의 가르침 에 따라 분가 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부모는 결혼한 자식들과 따로 산다.)  부모님이 어려움 가운데 있다면 부모님부터 먼저 돕고 난 후에라야 다른 사람들을 살필 수 있다. 

 

부모님 다음의 우선 순위는 누구인가?  장성한 자녀들이다.  그 다음은 자기의 형제 자매들이다. 그 다음은 가까운 친척들의 순서를 따른다.  그 다음의 순서는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의 가난한 이웃들이다.  탈무드는 가르치기를, "네가 사는 마을의 주민들이 다른 마을의 주민들보다 그 순서에 있어서 우선이다"  라고 가르친다. 한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다른 나라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보다 이스라엘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먼저'  도와야 한다고 탈무드가 가르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만일 아르헨티나에 사는 친척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친척을 먼저 돕고 난 후 이스라엘에 사는 가난한 사람을 도울 것인가 아니면 이스라엘의 필요를 먼저 공급한 후 아르헨티나에 사는 친척을 도울 것이가?  유대인들은 이런 경우 이스라엘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을 먼저 택한다.  17세기의 랍비 요엘 시르케스(R. Joel Sirkes)는 '바잇트 하다쉬' 라는 그의 주석서에서,"자기가 사는 마을의 가난한 사람을 도운 후에, 다른 지역으로 관심을 가질 것인데, 다른 지역 중에서 최 우선 순위는 이스라엘 땅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다"라고 가르친다.  유대인들은 이 전통을 따라 이스라엘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최 우선 순위를 둔다.

 

거지의 경우는 어떤가?  일반적으로 거지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남에게 얻어 먹기 때문에 멸시 당한다.  스스로 살아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술주정뱅이, 알콜 중독자, 마약중독자, 게으름때문에 거지노릇하는 상습적인 거지 등등 인간적 가치를 상실한 사람들이 많다.  유대의 전통은 만일 어떤 사람이 음식을 구걸하거든 그가 협잡군인지 아닌지를 조사하기 전에 먼저 음식을 주라고 가르친다 .  먹는 것을 구걸할 경우 무조건 도와주라는 것이 탈무드의 가르침이다. 

 

구제의 양
어떤 사람이 끼니가 끊겼다면 그는 당연히 구제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얼마의 비용을 공급해야 하는가?  시골 사람과 서울 사람을 똑 같은 액수로 공급해야 하는가?  어느 사람이 고장난 차를 수리할 비용이 없다면 과연 그것도 구제의 대상이 되는가?  그 차가 영업용이라면 어떤까?  만일 자가용이라면?  어느 사람이 운동 장비를 마련하려는데 그것도 구제의 대상이 되는가?  만일 그가 운동 선수라면 어떤가?  어느 사람이 학비를 못 내서 학업을 중단할 상황이라면 어떤가?  그 돈으로 우선 배 고픈 사람부터 도와야 되지 않나?  대답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사람마다 그 필요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구제 대상의 생활 수준도 사람마다 다 다르다.  사는 지역 여건도 다르다.  교육 정도도 다르다.  소비 수준도 다르다. 

 

유대인의 전통에 따르면 이 모든 여건이 고려되어야 한다.  기본적인 원리는,  도움을 받는 사람이 평소 살아 왔던 여건을 고려하여 그에 상응하는 수준에서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차를 수리한다 할 때 그 차가 영업용이라면 구제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도움 받는 사람의 여건을 최대한 살펴 그에 합당한 실제적인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이 유대인의 관습이다. 

 

탈무드에선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어느 가난한 사람이 랍비 느헤미야를 찾아 왔다.  랍비가 물었다,

랍비; "당신은 평소에 무었을 먹었읍니까? 
가난한 사람; "기름진 고기와 오래 묵은 (좋은) 포도주를 마시곤 했읍니다."
랍비; "나와 함께 편두콩을 먹으며 살 수 있겠읍니까?
그는 랍비와 함께 그의 음식을 나누며 살다가 얼마 안되어 죽고 말았다.
어떤이들은 " 그 가난한 사람이 참 안 되었어, 랍비 느헤미야가 그 사람을 죽인거야"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진실로 불쌍한 사람은 랍비 느헤미야였다.  그 가난한 사람이 그렇게까지 자기 자신을 망쳐놓다니 (그건 자기 책임입니다).

 

위와 같은 탈무드의 예는 도움을 주고자 할 때에는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에 합당하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이와 비슷한 예가 탈무드의 같은 부분에서 하나 더 발견된다.
힐렐이 부자였다가 가난해진 사람을 돕기 위하여 그에게 말과 마부를 가져다 주었읍니다. 

 

한 번은 마부를 찾을 수 없자 힐렐 자신이 그 앞에서 마부가 되어 3 마일을 달렸읍니다.
부자였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거지가 된다면 가난했던 사람이 거지가 되는 것보다 심리적 타격이 더 클 것이다.  지나친 경우이긴 하지만 힐렐은 가나해진 사람을 돕기 위하여 그에게 말 뿐아니라 마부를 함께 딸려 보냈다.  그가 부자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마부가 어디에 갔는지 찾을 수 없자 자기 스스로가 마부 노릇까지 한 것이다.  이와같이 누구를 돕고자 한다면 도움 받는 사람의 형편을 살펴 그에 합당하게 도와야 한다는 것이 탈무드의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도움의 상한선은 어느정도인가?  탈무드는 " 당신은 가난한 사람을 돕도록 명령받았읍니다, 그러나 그를 부자로 만들라는 명령은 받지 않았읍니다."  라고 말한다. 

 

구제의 방법
유대전통은 구제가 진실한 구제 되기 위해서는 주는 방법이 올바라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인가?  받는 사람이 부끄럽지 않은 방법이다.  랍비 요나는 시편 41편 1절에,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자는 복일진저"라고 적혀 있지 않고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 주는 자는 복이 있을진저" 라고 기록 되어 있음을 상기시킨다.  유대인들은 이 구절을 '어떤 방법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울 것인가를 숙고하라'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랍비 요나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갑자기 가난해졌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신에게 남겨진 유산이 있다는 것이 모처에서 발견 되었읍니다.  일단 제 돈을 받으시고 나중에 갚으시겠읍니까?"  그가 돈을 받은 후 랍비 요나는 말하였다, "사실 이 돈은 선물입니다."  받는 사람이 부끄럽지 않토록 배려한 경우이다. 
사람이 많은 공공 장소에서 어떤 사람이 은전 한 닢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을 보았을 때 랍비 얀나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에게 은전을 주어서 그를 부끄럽게 하는 것은 차라리 안주느니만 못하다."  랍비들은 주는 자나 받는 자가 서로 모르는 상태에서 도움이 오가는 것을 가장 바람직하게 여겼다.

다음의 탈무드는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사실을 가르친다.

  "사람을 예기치 못한 죽음으로 부터 막아주는 것은 어떤 종류의 쩨다카인가?  준 자도 누구에게 준지 모르고, 받은 자도 누구로부터 받은지 모르는 쩨다카다."

또 랍비 엘리에저는 비밀리에 돕는 자는 모세보다도 큰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탈무드에 보면 많은 이스라엘의 성현들이 다른 사람을 도울 때에 이를 어떻게 숨기거나 또는 상대방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애썼는가에 대한 기록이 여기 저기 나타난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부드러운 말과 유우머로서 받아들이고 위로하라고 권고한다. 샴마이는 "어떤 사람이 온세상의 모든 것을 그의 친구에게 선물로 주되 인색한 마음으로 준다면 이는  아무 것도 안준 것과 같을 것이요, 어떤 사람이 그의 친구에게 아무 것도 못 주되 기쁨으로 그를 맞이한다면 이는 세상의 모든 것을 선물로 준 것과 같을 것이다."  라고 가르쳤다. 

 

푸슈케
유대인의 집에 가면 어느 집에 가던지 쉽게 동전 함을 발견할 수 있다.  구제를 목적으로 만든 이 동전함을 가리켜 푸슈케라 한다.  유대인들은 어릴 때 부터 자기의 용돈을 아껴 푸슈케에 넣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그들은 푸슈케에 떨어지는 동전소리를 들으며 누군가가 이 돈으로 도움을 받을리라 확신한다. 

유대의 어린이들은 이런 과정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구제의 중요성을 배우며, 구제가 그들의 삶에 자연스럽게 생활화 되는 것을 경험한다.  푸슈케는 가정뿐 아니라 회당, 또는 유대인 학교에서 쉽게 발견된다.  어느 회당이건 들어가면 어김 없이 발견되는 것이 이 푸슈케이다.  회당에 있는 것들은 보통 양질의 청동으로 만들어져 동전을 넣을 때에 금속성 소리가 나도록 되어있다. 

 

유대인들은 매번 예배를 올리기 전에 푸슈케를 흔들어 동전 소리가 나도록 하여 예배자들에게 "예배 드리기 전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동전을 주는 것이 좋은 일이다" 라는 것을 상기 시킨다.  일반적으로 회당에 있는 푸슈케는 아름답게 장식되어 그것 자체가 하나의 예술이다. 

샤밧(안식일)에 샤밧촛불을 밝히기 전 각각의 유대인 가정에선 동전을 푸슈케에 넣는 것이 하나의 관례로 되어있다.  예배를 드리기 전이나 기도하기전 혹은 토라를 공부하기전 푸슈케에 쩨다카를 넣는 것은 예배나 기도 혹은 성경공부의 정신을 고양시킨다고 믿는다.  이스라엘에 가면 유대인의 대속죄일인 욤키퍼 전 날엔 거지들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속죄하기 전 날엔 많은 유대인들이 쩨다카에 인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속죄를 앞두고 구제에 인색하긴 힘들 것이다.  따라서 속죄일 전 날은 이스라엘의 거지가 행복한(?) 날이다.

 

샬리아흐
유대인들은 누군가가 여행을 떠나면 그에게 쩨다카를 맏겨 전달하게 하는 풍습이 있다.  예를 들어 여행을 떠나는 사람에게 자기의 쩨다카를 맡겨 쩨다카를 보내는 사람의 이름으로 행하게 하는 풍습이다.  쩨다카를 가지고 가서 전달하는 사람을 가리켜 샬리아흐(보내진자라는 뜻)라고 부른다.  샬리아흐를 보내는 사람은 자기의 쩨다카를 어떻게 누구에게 쓰라고 자세하게 지시할 수 있다. 이러한 풍습은 먼곳을 여행하기 힘든 중세기에 발전되었으나 오늘날에도 행해진다.  유대인들은 최소한도 평생에 한 번은 샬리아흐의 역할을 하도록 권장된다.  단 일주일을 이스라엘에 간다 할찌라도 혹은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나라에 가더라도 샬리아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중요한 계명의 이행으로 이해한다.  자기 자신이 구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구제를 전달하는 것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믿기때문이다. 

 

구제 단체
한걸음 더 나아가, 유대인의 전통에 따르면, 구제하는 것보다 더 귀한 일은 다른 사람들로 부터 구제금을 모아 전달하는 일이다.  구제금을 모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쉬운 부탁을 하고 다녀야하며, 때때론 모욕 당할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에 동참한다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다.  구제금을 모아 필요한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파트너로써 '티쿤 올람 '(세상을 고치는 일)에 참여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정신에 따라 유대인들은 많은 구호 단체를 조직한다.  유대인들의 구제 단체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이미 탈무드 시대에 람밤은 유대인이 사는 곳에 구호단체나 구호기금이 없는 동네를 본적이 없다고 밝힌다. 오늘 날도 유대인들은 수 많은 구제 단체를 갖고 있다. 

 

유대인들이 지원하는 단체들은 수없이 많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전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인종의 구별없이 지원하는 단체들로는 세계기아구조기구(World hunger organizations; UNICEF, Oxfam 등등), 암연구기구, 환경보호단체, 소비자보호단체, 여성권리옹호단체 등등 수없이 많다.  유대인과 관련된 기구로는 소비에트 유대인 구호기구(United Jewish Apeal 등등), 힐렐기금, 유대인고등교육보조기구, 이스라엘구호기금에 관련된 단체 등등 수 없이 많다.  이들 유대인의 모든 구호 단체는 세상을 올바르게 고치는 '티쿤 올람'의 사명을 갖고 있다.

 

맺는말
유대인들은 어릴 때 부터 구제를 임무로 가르친다.  쩨다카는 종교적인 의무로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지켜야할 의무이다.  많은 유대인들은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가 함께 모여 어떤 돈으로 누구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를 의논한다.  부모는 자기 집의 예산과 소비 규모를 밝힌다.  줄일 수 있는 예산은 줄인다.  아이들에게도 쩨다카에 동참하도록 가르친다.  아이들은 용돈을 줄인다든지, 잔디를 깍든지 등의 방법으로 쩨다카를 마련한다.  부모와 자녀들은 함께 이웃을 돌아보며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는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어린이들은 가정 경제를 배우고, 이웃을 배우고, 돈의 중요성을 배운다.  유대인, 그들은 구제를 통하여 함께 사는 법을 배워왔다

 

 - 마하나임님의 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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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Giving)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다(신 15:10). 신명기 15장은 가난한 형제를 향해 마음을 걍팍히 하지 말고(7절), 넉넉히 꾸어 주라(8절)고 했다. 또 악한 눈으로 대하거나(9절) 아까워 하는 마음으로 구제하지 말며(10절) 궁핍한 자를 향해 손을 펴라(11절)고 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제의 대상은 성도(행 11:29~30), 가난한 자(잠 22:9), 동족(행 24:17), 과부(행 6:1), 백성들(행 10:2) 등이다. 구제할 때는 은밀하게(마 6:3~4) 하되 사랑(고전 13:3)과 성실함(롬 12:8)으로 해야 한다. 결코 양심에 거리끼거나(행 24:16~17) 외식하는 마음으로 해서는 안된다(마 6:1~2). 오직 예수께서 하는(마 25:40) 태도로 해야 한다.

 

성도가 이렇게 구제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며(신 15:11) 초대교회 성도들이 행했던 일(행 6:1~2)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제하는 사람은 궁핍해지기는 커녕(잠 28:27) 더욱 부하게 되며(잠 11:24) 풍족해진다고 성경은 말한다(잠 11:25, 눅 6:38). 구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히 13:16)로 구제한 사람은 행한 대로의 보상을 받게 되며(잠 19:17) 하늘에 보화를 쌓게 된다(마 19:21, 눅 1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