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역사가 요세프스(Josephus)-
마사다 (MASADA)를 말하다.(전)
유대인 역사가 요세프스(Josephus)
요세푸스는 유대 제사장 가문의 후손으로서 가이우스가
로마제국의 황제에 오른 주후 37년에 태어나 A.D 100년 경에 세상을 떠났다.
인류 역사상 요세푸스만큼 칭송과 비난을 한 몸에 받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
유대인 동족들에게는 배신자요 변절자로 지탄을 받고 있는 반면에 그는 기독교인들,
특히 초대 변증가들과 중세 시대에는 위대한 저술가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그는 진실만을 탐구한 양심적이고도 공정한 탐구자라기보다는
어떤 인상을 주려는 고도의 목적을 가진 저술가였음이 분명하다.
고대 저술가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결점을 그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요세푸스는 탁월한 역사가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는 유대주의와 헬레니즘의 두 전통을 종합하였으며 로마의 세속 세계와 성경의 종교적 유산을
연결시켰을 뿐만 아니라 로마제국 치하의 여러 민족들의 멘탈리티-특히 예수님 당시의
유대 백성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여러 정보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 탄생 이전 시대와 기독교 1세기 동안에 일어났던 팔레스틴과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역사를
알려주는 유일한 역사서라는 점에서 본서 "요세푸스"의 위치는 거의 절대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유태전쟁의 전설
서기 66년 유태전쟁에 참여했던 유태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서기 73년 어느 봄날 밤에
마사다 요새에서 벌어진 일을 후세에 다음과 같이 전했다.
지휘자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가 남자들을 모두 한군데 불러모았다. 날이 밝으면 마사다는 무너질 것이다.
그는 비장하게 마지막 연설을 했다. “형제들이여,우리는 로마와 맞서 싸운 마지막 용사들입니다.
새벽이 오면 우리는 저들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유로우므로 부끄럽지 않게 죽을 기회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치욕을 당하고 노예로 끌려가지 않도록 아내와 자식들을 우리 손으로 죽이고,
우리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입니다. 자! 노예가 되기보다 자유라는 이름의 수의(壽衣)를 입읍시다!”
벤 야이르의 말이 끝나자 몇몇 마음 약한 사람이 가족을 생각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벤 야이르는 그들을 엄하게 꾸짖었다. “부끄럽지도 않소?
우리가 여기 모여 로마군에 맞선 뒤로 그들은 죄 없는 유태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소.
다마스쿠스에서는 1만8,000명이 처자식과 함께 목이 잘렸고,이 집트에서는 6만명이 살해되었소.
우리는 험준한 요새와 넉넉한 식량을 가지고도 이 싸움에 졌습니다.
지금 로마군은 우리를 살려주겠다고 꾀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보는 앞에서 성경을 찢으며 승리를 노래하고 싶어합니다.”
벤 야이르의 말이 여기에 이르자 사람들의 눈동자에 불꽃이 어른거렸다.
눈물을 글썽이던 사람들의 얼굴에도 결연한 의지가 감돌았다.
그들을 둘러본 벤 야이르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성을 불질러 로마군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마시오. 그러나 식량 창고 한두 군데는 남깁시다.
우리가 먹을 것이 떨어져 죽었다고 보여서는 안됩니다.
자,다들 집으로 돌아가 식구들을 적의 손으로부터 구하시오.”
남자들은 경건한 얼굴로 흩어졌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아이들을 부드럽게 껴안고,
눈물이 그득한 채 오래도록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을 죽였다.
남자들은 다시 한곳에 모였다. 제비를 뽑아 열 사람을 가려냈다.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처자들의 주검 옆에 눕자,열 사람은 집집마다 다니며 그들을 칼로 베었다.
살아 남은 열 사람은 다시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을 골랐다.
뽑힌 사람이 다른 아홉 사람을 죽였다.
마지막 생존자는 모두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자 성안에 불을 놓고 나서 자신의 몸에 깊숙이 칼을 찔렀다.
서기 73년 4월15일 저녁. 죽은 사람은 모두 960명이었다.
마사다 요새
사해(死海)에서 서쪽으로 4㎞ 떨어져 유태광야 동쪽 끝에 우뚝 솟은 바위산.
사방을 깎아지른 벼랑으로 둘러치고 뻗쳐오르던 바위산은 해발 434m에 이르러 문득 치솟기를 멈추고,
단칼에 베인 듯이 평평해진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배(船) 같은 모양을 한 바위산 꼭대기는
평균 너비 120m에 길이 620m,둘레 1,300m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그 진흙땅 위에 놀랍게도 2000년이라는 세월을 간직한 성채가
거센 바람 속에서 말없이 유태광야와 사해의 푸른 물결을 내려다보고 서 있다.
거칠고 메마르면서도 웅장한 아름다움이 깃든 이 요새의 이름은 마사다.
마사다에 얽힌 사건을 역사책 ‘유태전쟁’에 자세히 기록한 요세푸스는
서기 66년 유태인들이 로마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려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갈릴리 지방의 유태군 지휘관이었다.
그는 나중에 조국에 등을 돌리고 로마군에 넘어갔지만,
어느 역사책에도 나와 있지 않은 마사다 싸움을 후세에 전했다.
마사다는 배신자 요세푸스 덕분에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영웅들의 성지(聖地)’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이 바위산을 처음 요새로 만든 이는 대제사장 요나단이었다.
그 뒤 유태왕 헤로데가 기원전 35년 여기에 성벽을 두르고 무기와 식량을 저장했다.
그는 로마에 기대어 유태를 통치했는데, 유태인들은 호시탐탐 반란을 일으킬 기회를 엿보았다.
게다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까지 유태 왕국을 자기에게 달라고
로마 집정관 안토니우스에게 졸라대는 것을 알게 된 헤로데는 로마가 자기를 배신할까 봐 두려워
천혜의 요새인 마사다를 피난처로 만들었던 것이다.
헤로데가 죽은 뒤 마사다에는 로마군이 머물렀으나,유태전쟁이 일어나자 반란군이 이곳을 차지했다.
서기 70년 로마군은 유태의 반란을 진압하고 예루살렘을 불태웠다.
모든 유태인이 고향에서 쫓겨나게 되었는데,그 중 한 무리가 마사다로 도망쳐 로마군에 항거했다.
그들은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가 이끄는 젤롯파(열심당;유태교의 한 갈래) 신도들이었다.
마사다에는 헤로데가 가져다 놓은 옥수수와 콩,대추야자가 엄청나게 쌓여 있었고,포도주와 기름도 넉넉했다.
과일은 신선했고,잘 익어 있었다. 그것들은 메마른 날씨와 먼지가 섞이지 않은 공기 덕분에 100년이 넘도록 썩지 않고
잘 갈무리되어 있었다.
헤로데가 만든 물탱크에는 물이 가득했으며,
무기도 1만명 정도가 그보다 훨씬 많은 공격군을 상대해 지구전을 벌일 수 있을 만큼 창고에 그득했다.
사막과 다름없는 광야를 건너오기에 지친 로마군은 가파른 벼랑 위에서 내려다보며 활을 쏘아대는 반란군을
이길 수가 없었다.
성 안에는 식량과 무기가 넉넉했으므로
마사다야말로 젤롯파 유태교인들이 로마군과 맞서 싸우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요새였다.
마사다에 모여든 유태인은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합쳐 1,000명이 채 안되었다.
로마제국의 눈에는 한줌에 지나지 않았지만,그들은 마사다를 게릴라 기지로 삼아 끊임없이 로마군을 괴롭혔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꺼져 가는 반란의 불길이 또다시 타오를 것 같았다.
이미 2년 전에 유태왕국을 무너뜨리고 ‘유태 정복 기념 동전’까지 만들어 쓰던 로마제국으로서는
마사다의 유태인이 큰 골칫거리였다.
결국은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이 정예 군단으로 꼽히는 제10군단에 마사다를 함락하라고 엄명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마사다 요새의 함락
서기 72년 플라비우스 실바 장군이 제10군단과 보조 군단을 이끌고 마사다로 진군해 왔다.
군세는 병사 9,000명과 노역에 부릴 유태인 전쟁 포로 6,000명.
실바는 마사다를 빙 둘러 벽을 쌓고 곳곳에 망루를 세웠다.
그러나 반란군보다 그들을 포위한 로마군의 사정이 더 열악했다.
로마군은 먼 데서 물을 길어 왔고 보급품도 유태광야 너머에서 날라왔다.
포위 작전이 소용없다고 깨달은 실바는 무더운 여름이 오기 전에 공격하기로 했다.
마사다 서쪽 벼랑에는 희고 넓은 바위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실바는 그 바위에까지 흙과 돌을 다져 비탈을 쌓도록 했다.
꼭대기는 마사다 성벽보다 20m쯤 낮았다.
이 엄청난 흙산 쌓기 공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유태인 포로들이 해냈다.
마사다 쪽에서는 활을 쏘아 이 공사를 막으려 했지만 좁은 전선(戰線),
즉 성벽의 한 지점에 많은 병력을 투입할 수 없었다.
다음 단계로 로마군은 망루같이 생긴 공성탑(攻城塔)을 만들어 비탈 위로 올렸다.
공성탑 높이는 마사다 성벽보다 조금 높았다.
철판을 두른 이 탑에서 로마군 궁수들이 활을 쏘아 엄호하는 사이에 다른 병사들이 투석기(投石機)를 끌어올렸다.
세계를 정복한 로마군의 투석기는 무서웠다.
사거리가 400m나 되는 투석기가 20∼25㎏짜리 돌들을 날려보내자 성벽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유태인들은 무너진 성벽 자리에 서둘러 또 다른 벽을 쌓았다.
그들은 나무기둥을 두 겹으로 박고 그 안에 흙을 넣어 돌이 날아와도 무너지지 않도록 했다.
그러자 실바는 박격포에서 벌컨포와 미사일 공격으로 바꾸었다.
불화살이 유성처럼 날아가 박히고 횃불이 던져졌다.
남풍(南風)마저 가세하자 나무 벽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4월15일이 기울었다. 실바는 일단 진지로 물러났다.
그는 날이 밝으면 공성탑에서 구름다리를 놓고 성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로마 정규군 9,000명과 유태 반란군 수백 명의 대결. 마사다는 로마군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로마 병정들은 유태인이 한 명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밤을 새워 물샐 틈 없이 지켰다.
밤 사이에 유태인 전원이 자결한 것을 실바가 알 리 없었다.
날이 밝자 로마군은 단단히 무장을 갖추고 성벽에 나무다리를 걸쳐놓았다.
로마군 선봉이 함성을 지르며 구름다리를 건넜다.
그런데 너무나 이상했다. 적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성은 무섭도록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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