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역사가 요세프스(Josephus)-
마사다 (MASADA)를 말하다.(후)
불탄 건물과 960명의 장렬한 주검이 로마군을 맞았다.
그들은 뜻밖에 벌어진 일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우리들의 비겁한 패배가 저들의 승리를 더욱 영광스럽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죽음에 실망하고,경탄하도록 만듭시다’라고
열변을 토한 벤 야이르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비록 적군이지만 그 장렬한 죽음 앞에서 로마군은 기뻐할 수가 없었다.
병사들이 이곳저곳을 수색하자 두 여자가 숨어 있던 도랑에서 나왔다.
여자들이 간밤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말하자,실바는 두 여자와 아이들 다섯을 모두 살려 주었다.
로마군은 마사다에 40년쯤 머물렀다. 500년 가량 지나 비잔틴 수도사들이 한동안 살았지만,
이슬람 교도들이 유태를 정복하자 그들도 떠나갔다.
유태인들이 이스라엘을 세우기까지 1900년 간이나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떠도는 사이에,
그들의 용기와 신앙을 상징하는 마사다는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마사다 요새의 발굴
요세푸스가 쓴 마사다 이야기는 다른 역사 기록에는 없었으므로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는 서기 73년에 마사다에 있지 않았으며,더구나 유태인을 배반하고 로마에 붙은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나 요세푸스의 기록이 사실임이 밝혀질 날은 끝내 오고야 말았다.
1838년 사해 바닷가를 여행하던 두 미국인 학자 E 로빈슨과 E 스미스가 우연히 이 장엄한 바위산 위의
폐허 흔적을 보고 망원경으로 살폈다.
그 뒤로 이스라엘 정부가 발굴에 나서기까지 125년간 많은 탐험가들이 마사다의 비밀을 한꺼풀씩 벗겨냈다.
아랍 사람들이 아스 사바(저주받은 땅)라고 부르던 기묘한 바위산이 점차 역사 기록 속의 마사다로 바뀌어 가자
이스라엘 정부는 결단을 내렸다.
1963년 마침내 유태인 고고학자 이가엘 야딘이 요세푸스의 기록을 뒷받침할 유적을 발굴하는 일을 떠맡았다.
1917년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야딘은 이스라엘 독립운동에 참여해 군 참모장이 되었다가 나중에 부총리에까지 올랐다.
1952년 군을 떠난 야딘은 히브리대학 고고학 교수로 일하면서 1955년부터 유태 광야와 사해 근처에서 여러 유적을
발굴해 왔다. 야딘은 1963년 10월∼1964년 5월,1964년 11월∼1965년 4월 두 차례 마사다를 발굴했다.
그리고 요세푸스의 기록에 거의 틀림이 없음을 샅샅이 밝혀냈다.
그는 먼저 짤막한 신문 광고를 내 발굴을 도울 자원봉사자를 모집했다.
워낙 외진 데다 날씨가 고약한 곳이어서,스스로 나선 사람이어야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왕복 여비를 자기가 내고,두 주일간 한 천막에서 열 사람이 지내며 음식도 좋지 않다는 조건이었지만,
스물여덟 나라에서 신청서가 쏟아져 들어왔다.
지원자 5,000여명은 한 번에 두 주일씩 스물세번에 걸쳐 번갈아 일했다.
가드나(이스라엘 청소년 전투부대) 학생들과 키부츠(집단 농장)에서 온 지원자까지 합쳐
날마다 평균 300명이 발굴을 도왔다.
야딘은 그 옛날 로마 제10군단장 실바의 캠프와 맞닿는 곳에 발굴본부를 차렸는데,
내내 혹독한 날씨에 시달렸다. 아마도 세계 고고학 발굴 역사에 마사다에서처럼 어려운 발굴은 없었으리라.
남풍은 시속 100㎞로 불어 천막을 갈가리 찢었고,느닷없이 쏟아지는 장대같은 소나기는 눈 깜박할 사이에
골짜기를 채웠다. 말라붙었던 개울이 강으로 바뀌고,캠프와 캠프 사이로 흙탕물이 넘쳐흐르는 바람에
보급 물자를 헬리콥터가 날라다 준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렇지만 그 덕분에 야딘은 헤로데 왕이 만든 거대한 물탱크에 물이 가득 차 있었다는 기록을 믿게 되었다.
옛사람들은 바위산 꼭대기에서도 빗물을 잘 저장해 물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야딘이 제일 먼저 발굴한 곳은 마사다 북쪽 끄트머리 벼랑에 지어진 3층 건물이었다.
요새라기보다 화려한 벽화로 장식된 왕궁이었다. 헤로데 왕은 사해의 해면으로부터 340m나 되는 높은 곳,
로마 시대의 수려하고 전통적인 공중 목욕탕을 본뜬 독탕에서 찬물과 미지근한 물과 뜨거운 물을 마음대로 쓰며
사치스럽게 지냈다.
헤로데의 궁전을 발굴하느라고 자원봉사자들은 밧줄로 몸을 묶고 까마득한 낭떠러지에 매달려 거센 바람에
흔들리며 일했다. 헤로데가 그처럼 위험한 곳에 궁전을 지은 까닭은,경치 좋고 방어하기 좋다는 점도 있었겠지만
햇빛 드는 시간이 짧아 서늘하고 바람막이가 잘 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야딘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유골 세 구를 찾아냈다.
하나는 젊은이의 것이었는데,그 옆에는 갑옷에 달았던 은비늘 수백 개와 화살들이 흩어져 있었다.
또 하나는 금방 손질한 듯이 땋은 까만 머리카락이 붙은 젊은 여자의 유골,나머지 하나는 어린아이의 것이었다.
3층 왕궁 옆 커다란 창고 건물을 복원하는 데는 이스라엘군 공병대가 뜯어서 올린 뒤 조립해 준 기중기를 썼다.
창고 뒤로는 아파트와 비잔틴 수도사들이 지은 회당이 있고,헤로데의 별장인 서궁(西宮)과 큰 수영장이 있었다.
그밖에 작은 궁 세채가 더 있었다.왕은 마사다를 빙 둘러 성벽을 쌓고,군데군데 탑 38개를 세웠다.
탑 안과 성벽에 붙여 지은 방이 110개.유태인들은 이 방들을 칸막이로 막아 여러 세대가 함께 살았다.
대·중·소 크기의 목욕탕이 나란히 발굴되자 야딘은 이것이 유태교에서 침례 의식을 할 때
사용하는 미크베가 아닐까 생각했다.밖에서 대형 욕탕으로 통하는 수로가 지붕들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을 욕탕으로 끌어들이는 데 쓰인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유태 율법에 따르면 미크베는 하늘에서 떨어져 곧바로 흘러든 ‘순수한’ 빗물로 채워야 한다.
물통 따위로 길어온 물은 안 된다.
율법학자들이 마사다의 욕탕을 제2 성전시대 미크베라고 고증하자 온 이스라엘이 떠들썩했다.
그 동안 제2의 성전시대(기원전 520∼516년·스룹바벨 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축한 때) 때
미크베는 하나도 발견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가장 뜻깊은 유물이 나왔다.
성벽의 한 방에서 파편더미를 2m 넘게 치우자 옷,
이불,바구니 따위와 함께 두루마리 구약성서가 나왔다.
자원봉사자들이 달려와 양피지 한 조각을 내밀었을 때
야딘은 그것이 시편 81∼85편인 것을 금방 알아보았다.
적외선 사진을 통해 판독해 보니 서기 40년 이전에 쓰여진 것이었다.
내용은 몇몇 작은 변화 외에는 오늘날 쓰이는 성서와 똑같았다.
마사다에서 나온 두루마리 구약성서는 모두 14개였다.
시편,레위기,에스겔서,신명기 부분들과 유태 민족이 해방된 기쁨을 적은 희년서(喜年書),
그리고 외경(外經;구약 성경에 들어 있지 않은 책 14권.
카톨릭에서는 이를 구약성경과 같은 무게로 다루지만
신교에서는 ‘성경은 아니지만 읽어도 무방한 책’으로 인식한다)인 ‘벤 시라의 지혜서’.
‘벤 시라의 지혜서’는 탈무드에 널리 인용되며 율법학자에게 성서와 마찬가지로 권위 있게 취급된다.
원본이 자취를 감추고 희랍어 번역이 ‘외경’에 수록되었는데,마사다에서 히브리어 원본이 나온 것이다.
보통 고고학 발굴이 느리고 지루하게 진행되는데 비해
마사다에서는 매주,심지어 시간마다 새로운 유물이 발굴됐다.
“우리는 거의 매일 뭔가를 찾아냈다.무얼 찾아내느라 며칠씩 땅을 팔 필요가 없었다.”
(고고학자 암논 벤토르) 발굴팀은 갖가지 항아리와 살림 도구,‘유대인의 자유’라고 새겨진 진귀한 동전,
세계를 통틀어 6개뿐인 은화 3개,가장 오래된 천조각 따위를 찾아냈다.
반란군이 쓴 검소하고 한맺힌 유물과 헤로데가 남긴 화려한 유물은 대조적이었다.
고고학적으로는 헤로데의 유물이 더 값졌지만 정신의 고귀함은 반란군의 유물에서만 볼 수 있었다.
마사다가 ‘영웅들의 성지’라 일컬어지는 것은 이 고귀한 정신 때문이다.
가드나(청소년 전투부대)에 들어간 이스라엘 청소년들은 마사다 꼭대기에서 이렇게 외친다.
“다시는 마사다가 함락되지 않게 하리라!”
꺾이지 않은 선조들의 고귀한 정신을 잇고자 하는 이 절절한 외침은 60∼70년대에
주변 아랍국들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끈 원동력이 됐다.
그러나 오늘날 고고학계에서는 마사다가 ‘정치와 고고학이 결탁해 역사적 사실을 미화하는데
이용됐다’는 주장이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발굴 결과가 요세푸스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있다.
유골은 겨우 20구밖에 나오지 않았으며 제비 뽑기에 쓰인 이름이 새겨진 질그릇 조각은
10명보다 하나 더 많은 11개가 발견됐다.
요세푸스는 그리스·로마의 고전 설화에서처럼 영웅적 항전을 장렬하게 장식하느라고
극적인 최후를 가미해 집단 자살 얘기를 문학적으로 꾸몄다.”(이스라엘 고고학자 닐 실버먼)
실버먼은 또 “60년대에 이스라엘은 적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역사적 사건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자 고고학자들은 전혀 다른 동기와 목적을 가진
정치가들에게 발굴 작업의 역사적 가치를 평가할 권리를 빼앗겼다”며
요세푸스의 허구를 이스라엘 정치가들이 이용했다고 주장했다.
이스라엘군 신병훈련 책임자였던 대령 출신 군사 사학자 마이어 파일은 더 직설적이다.
“이스라엘의 정치·교육·군사 지도자들이 마사다를 이용했다.
그들은 군대 창설 과정에서 용기와 결사항전의 본보기로 마사다를 내세웠으며
국민에게 패배의 참혹함을 보여주어 전쟁에 지면 안된다는 생각을 심어 주려 했다.
어떻게 광신과 집단 자살 이야기를 국가의 정체성으로 삼을 수 있는가.
마사다는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이제 마사다는 잊어야 한다.”
-- 부록 --
이스라엘의 건국
19세기에 들어서자 세계 각지의 내셔널리즘이 발흥하는 가운데
동유럽 및 러시아에서 유대인에 대한 민족 억압이 드세졌다.
이에 유대인들 사이에 자신들의 조상이 하느님으로부터 약속받은 성지(聖地)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조국을 세워야만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끝난다고 믿는 시오니즘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시오니즘은 1887년 오스트리아의 테오도르헤르첼이 스위스 바젤에서 시오니스트 대회를 연 것을 계기로
정치운동화되었다. 그러나 지지부진한 진행으로 발전을 보지 못해 1882년 최초의 유대인 이민이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서기 시작한 지 35년 뒤인 1917년까지 겨우 3만 2000명밖에 이민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영국은 당시 중동에서의 영국군 작전기지 역할을
맡고 있던 팔레스타인 땅을 지키기 위해 전세계 유대인의 협력을 얻고자 ‘밸푸어 선언’을 발표하고,
전후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조국 건설을 허락한다는 약속을 하였다.
이와 함께 전후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 유대인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고
1930년대에는 독일에 히틀러의 나치즘이 등장하여 유대인에 대한 대학살을 개시하면서
시오니즘 운동은 급속히 발전하였다.
팔레스타인은 1918년 영국의 군정하에 놓여 있었고 1920년에는 영국의 위임통치하에 있었으나,
그 무렵 팔레스타인에의 유대인 이민은 격증하여 제1차 세계대전 당시 7만 정도였던 유대인 인구는
세계 각지로부터 돌아온 이민을 맞아들여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약 40만으로 늘어났다.
유대인 이민의 증대는 아랍인과의 대립·항쟁을 가져왔다.
소수파로의 전락과 토지상실을 두려워한 아랍인은 19년부터 종종 반(反)영국·반(反)유대 폭동을 일으켰고,
1938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1939년까지는 전국적으로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두 민족의 대립은 한때 가라앉기도 하였으나 대전 말기에는 다시 격화되어,
이번에는 유대인 쪽이 독립을 억제하려는 영국에 반발하여 반영(反英)·반아랍 투쟁을 하게 되었다.
전후에 대립은 한층 격화되었다.
영국은 두 민족의 대립을 진압하여 전략적 요충지인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권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위임통치 방기를 결의, 1947년 문제를 UN(국제연합)에 이관하였다.
UN 총회는 1947년 11월 팔레스타인에 아랍·유대 연방을 조직하게 하는 연방화안(案)과 아랍·유대의 개별국가를
건설하여 예루살렘을 국제관리하에 두도록 하는 분할안중 후자를 2/3 이상의 다수로 채택하였다.
이 안(案)에는 팔레스타인을 대소전략의 일환으로 삼으려는 미국과, 시오니즘에 반대하면서도 유대,
아랍 양 민족의 민족자결을 승인하는 소련이 함께 찬성하였다.
이 안을 유대인 쪽은 찬성하였으나 아랍 쪽은 반대하여 팔레스타인 각지에서 게릴라전을 개시하였다.
1948년 5월 14일 영국의 위임통치가 끝나고 영국군의 철수완료와 함께 유대 국가건국위원회 의장
벤 구리온이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하였다.
동시에 아랍연맹에 가입한 아랍 제국의 정규군이 팔레스타인에 침입하여 제1차 중동전쟁(팔레스타인 전쟁)이
개시되었다. 이스라엘은 개전시에는 열세였으나 마침내 아랍을 압박하여 1949년 정전이 실현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아랍 대 이스라엘의 대립은 계속되어 1956년 10월 제2차 중동전쟁(수에즈 전쟁),
1967년 6월 제3차 중동전쟁(6일전쟁),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10월전쟁) 등 모두 4차례에 걸친 전쟁을 하였다.
내용출처 : 두산백과사전 참고
이스라엘은 독립했습니다. 중동지역을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실때가 멀지 않았습니다.
마가복음 13장 28~ 33절
28.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29.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
30.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31.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2.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3.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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