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 산지의 지리개관
유대광야는 동쪽으로는 사해,북쪽 경계는 요단계곡으로 이어지는 베냐민 산지의 동쪽 경사지이며, 남쪽 경계는 남쪽 경계는 헤브론 산지이고, 서쪽 경계는 유대 산지와 만나는 부분인데 정확하게 구분하기 어렵다. 유대광야는 지리적으로 독특성을 띠는데 먼저 유대 산지와의 관계이다. 유대 산지의 동쪽 경사지는 사해를 향하여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즉 유대산지에서 사해까지의 직선거리가 25km인데 높이차이가 1200m나 된다. 이 경사는 점진적인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단층을 거쳐 내려오는 급경사이다. 높이가 300m이상 되는 단층이 5개나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절벽형의 급경사지로 인하여 유다광야에는 케논형태의 깊은 계곡들이 형성되어 있다. 우기 철에는 일시적이긴 하지만 유다산지로부터 빗물이 사해로 흘러 내려온다. 이러한 겨울철의 물줄기들은 지형을 따라 방향을 바꾸면서 흐르게 되는데, 사해 가까운 하구에서는 절벽 형으로 이루어지는 좁은 계곡을 지난다. 이러한 곳은 대개 격차가 급하기 때문에 급류와 홍수를 이루기도 한다.
유대광야의 사막 환경은 몇 가지의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생성되었다. 가장 주요 요인은 극히 적은 연 강수량 때문이다. 연간 100mm 정도의 비밖에 안 내린다. 또한 유대 산지에서 사해를 향한 급경사는 이곳에 비를 거의 내리지 않게 만들면서 기온을 상승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푄현상). 그래서 고대로부터 사막에 가까운 광야지역으로 만들었다. 또한 이곳은 백악의 거친 토양으로 이루어진 지역으로서, 물이 잘 흡수되고 쉽게 건조해지는 지역이다. 따라서 물과 식량이 늘 부족한 지역이며 역사적으로 정착된 거주지가 존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유대 광야는 다른 광야나 사막과 달리 역사적으로 독특한 면을 지니고 있다. 유대광야의 폭이 실제적으로 20km 미만으로 작다는 점 , 곧 인근의 유다산지와 불과 수km밖에 떨어지지 않고 있어서 사람들의 생활 중심지와 인접해있었다. 또 이곳은 다른 지역을 가기위한 중간지점이 아니기에 중요한 거주 지역들을 연결시켜주는 도로가 발전되어 있지 않았다.
이러한 독특한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기존 사회로부터 도피 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나 삶의 중심지로부터 축출된 사람들, 그리고 종교적인 이유로 거주 지역을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지역이 되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할 때, 세례요한이 회개를 외칠 때, 예수님께서 40일 금식기도를 하실 때,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위기를 만나게 될 때 마다 유대 광야는 국가를 위하여 싸우는 항쟁자들의 마지막 저항지가 되었다. 마카비 전쟁이나 마사다의 항쟁 등이 좋은 예이다.
유다산지는 구약 및 신약시대 동안 이스라엘 역사와 종교의 중심지였다. 이스라엘의 정치와 신앙의 중심지들이 주로 유다산지에 모여 있다. 유다의 북쪽 경계는 베냐민지파의 게바이며, 남쪽은 브엘세바이고, 서쪽은 사해, 동쪽은 가드와 엘라골짜기까지 사이에서 변화가 심하였다. 북쪽은 산악지형이고, 남쪽은 사막과 접하고, 서쪽은 표고차가 수백 미터에 달해서 천연의 방어막 역할을 했다. 반면에 서쪽은 조금은 완만한 계곡들로 대부분의 외부 침입의 통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예루살렘과 연결되어 있는 소렉골자기와 엘라골짜기 등이 이러한 외부 침입의 대표적인 계곡들이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계곡통로를 이용하여 블레셋사람들, 헬라인들, 로마인들, 십자군들은 유다산지를 공격하였다. 그런 면에서 이런 계곡들을 통제하는 것은 곧 전체 유다산지를 통제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지형적 특징
사마리아산지와 유다산지를 구별하는 지질학적인 경계선은 특별히 없다. 그러나 이 두 지역은 지형적인 면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사마리아산지는 보다 많은 강우량이 있기 때문에 더 큰 풍화작용이 있게 되었고, 그에 따라 깊은 계곡들이 더 많이 형성되었다. 반면에 유다산지는 높은 고원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보다 더 건조한 기후 때문에 산지 자체가 많이 나누어져 있지는 않다. 땅위로 드러나 있는 바위들과 흩어져 있는 돌들은 유다산지 지표면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유다산지의 남쪽으로 내려 갈수록 토양은 더욱 거칠고, 지형은 울퉁불퉁한 모습을 띄고 있다.
일반적으로 베냐민산지에서 브엘세바까지 남북의 한계를 이루고 있는 유다산지는 서쪽의 해안선과 나란한 평행선을 그리며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다. 남북의 길이가 대략 80km 정도인 유다산지는 두드러진 산봉우리가 없다는 점에서 에브라임산지나 갈릴리산지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가파른 계곡이 없이 계속 이어지는 고원형의 산지인 유다산지의 평균 높이는 720m이다. 유다산지는 대체적으로 남쪽지역인 헤브론산지의 산세가 높은 반면 중앙지역인 예루살렘산지에서는 비교적 낮고, 북부지역인 벧엘산지 쪽으로 올라가면서 다시 지세가 높아지고 있다.
유다산지들의 지형적 특징은 산지의 높이에 변함이 거의 없으며 외형도 비슷하다는 점이다. 산지의 토양 색깔을 비롯하여 지질학적 구조 역시 차이가 거의 없다. 이러한 사실들은 유다산지의 다양한 지층들이 한때는 통일되어 있었으며, 깊고 좁은 계곡들은 후대에 이르러 형성된 것임을 암시해준다. 이곳의 강우량은 년간 500-600mm에 이르고 있으며, 여러 개의 샘들이 이곳에 위치하고 있어 급수원 조달에 도움을 주고 있다. 빗물들은 지표면에 모아지지는 않고 땅속 깊이 파고들어 가거나 아니면 사해나 지중해로 유입된다.
유다산지의 동쪽과 서쪽의 양편은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있는 지형을 이루고 있다. 해안평야를 향하고 있는 서쪽 경사지에는 비가 내리는 겨울철에만 물이 흐르는 매우 빈약한 개천이 형성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계곡의 물줄기는 평상시에 평지에서 산지에 이르는 자연 도로로서의 역할을 한다. 반면에 주로 바위로 이루어진 절벽형 지형의 동쪽 경사지는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유다산지에서 요르단 계곡과 사해까지는 직선거리로 24km 떨어져 있지만, 높이의 차이가 무려 1200m나 되고 있다. 이곳은 짧은 거리의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이 지역에 몇 개의 별개 기후대가 형성되어 있다. 동쪽 경사지에서 중요한 계곡은 기드론계곡과 와디켈트이다.
경제적 측면
유다산지는 사마리아 산지와 마찬가지로 지중해성 작물재배에 적합한 지역이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각종 곡물, 감람나무, 그리고 포도재배가 유명하였다. 유다산지는 이러한 작물들 중에서 특히 포도재배의 최적지로 여겨졌다. 감람나무는 겨울철 날씨가 추운 관계로 사마리아산지에서 보다는 덜 재배되었다. 유다산지의 농법가운데 특이한 점은 계단식 농업이 발달하였다는 것이다. 이 지역은 경사가 급한 곳이 많기 때문에 토양이 빗물이 씻겨 내려가지 않도록 오래전부터 돌을 쌓아 계단식 농지를 만들었다. 헤브론 이남 지역에서는 강우량이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에 농업은 적합지 않고 다만 목축이 가능한 지역이다.
1. 베들레헴 (떡집, 빵의 집, 음식의 집)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10키로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해발 770미터로 석회암 구능 지로서 메시야가 탄생하신 곳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약속이 성취된 장소로 그 의미가 남달르다. 이곳은 B.C 14세기 이집트에서 언급이 되기도 하였으며 성경에는 야곱의 아내 라헬이 장사된 곳으로 나오고, 성경 룻기의 무대이고, 다윗의 고향이다. 후에 르호보암은 유다왕국의 동편을 수호하기 위하여 에담, 드고아와 더불어 베들레헴을 크게 증축하였다(대하 11:6) 하지만 이후 크게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하다가 예언서를 통해 메시야가 탄생할 장소로 다시 그 의미를 가지게 된다. 미가서에는 에브라다라고 불렀다(미 5:1-2). 미가의 예언대로 그리스도가 이곳에서 나셨다(마2:1-5, 눅2:15). 동방 박사의 방문과 헤롯에 의한 유아 학살이 있었던 성읍이다. 성읍 주변의 땅은 기름져 포도, 종려, 보리도 잘 된다. 성읍의 조금 동쪽에 헬레나 황후가 세운 탄생교회가 있다.
(예수님 탄생교회 내부) (베들레헴 전경)
2. 엘라골짜기(상수리나무)
엘라골짜기는 예루살렘의 서남 25km로 지점에 있는 곳으로 이스라엘과 블레셋간의 최대의 격전지였다. 유다산지와 세팔라 평지의 전략적 요충지로 사울과 다윗이 블레셋과 싸워던 곳이다. 계곡 양편에는 50미터 이상의 언덕이 솟아있고 골짜기 너비는 4백미터 가량이다. 사울이 이곳에서 블레셋과 전투를 했을 때(삼상17:2), 다윗은 이곳에서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물매로 죽였다(삼상17:2-19).
(엘라골짜기)
3. 기브온
여호수아가 아모리 족속과 싸울때 해를 멈추게 했던 곳이다. 여호수아는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찌어다” 이렇게 기도하자 백성이 원수를 갚도록 태양은 멈추어 있었다(여호수아 10: 12-14). 솔로몬은 즉위 후에 기브온의 성소에서 일천 번제를 드린다. 그날 밤 기브온에서 자던중에 나타나신 여호와는 솔로몬에게 원하는 것을 구하라고 말씀 하신다. 이에 솔로몬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송사를 분별하는 지혜를 구한 솔로몬에게 지혜뿐만 아니라 부와 영광도 주겠다고 말씀 하셨다(열왕기상3: 3-13). 사람들은 솔로몬이 지혜를 구했다고 말들은 많이 하지만 솔로몬이 구한 지혜가 송사를 구별하는 지혜라는 것 까지는 말하지 않는다.
(여호수아가 태양을 멈추게 했던 기브온 골짜기)
4. 드고아(정착, 확정, 굳은)
드고아는 베들레헴 남쪽 8키로 지점 높이 822미터 언덕에 위치하고 있으며, 르호보함에 의해 요새화 되었다(대하11:6). 선지자 아모스의 고향이고, 여호사밧이 드고아 뜰에서 백성들과 같이 여화와를 찬송할 때에 여호와가 복병을 두어 유대를 치러온 모든 적병을 진멸하였다. 이 땅에서 자란 아모스는 반 농, 반 목의 생활을 하였으나, 이 땅은 농업보다 목축에 적합하여 이스라엘이 전통적인 광야 정신을 기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아모스 선지자의 고향 드고아 계곡)
5. 브엘세바(일곱 우물, 맹세의 우물)
헤브론의 서남쪽 43km, 위치한 곳으로 고대의 중요한 대상로를 끼고 있었다. 성읍 이름의 기원은 아브라함이 판 우물 때문에 아비멜렉과의 언쟁이 있었고, 언쟁 종결의 언약을 교환한 것과 관련하여 ‘맹세의 우물’(창21:25-32) 또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판 우물 수와 관련하여 “일곱 우물”을 의미한다고 한다. 두 가지 모두 아브라함과의 관련을 강조하고 있는 점에는 차이가 없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한 그루의 에셀나무를 심고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창21:33). 하나님은 여기서 이삭에게 나타나시어 아브라함에게주신 약속을 이삭에게 갱신하셨으며, 야곱도 여기서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에게 희생을드렸다(창46:1). 이스라엘의 영토에 대해 말할 때, 단에서 브엘세바까지(삿20:1, 삼상3:20) 또는 브엘세바에서 단까지(대상21:2, 대하30:5)로 말했고, 유대 왕국의 전역을 가리키는데는 게바에서부터 브엘세바(왕하23:8)까지로 표현 했다. 브엘세바 지역의 연 강수량은200mm로서 농경에는 다소 부족하지만 토양은 비옥한 황토로 되어 있어서 관개를 잘 하면 풍작을 거둘수 있었다.
(브엘세바의 옛 건물 터) (브엘세바의 옛 우물) (브엘세바의 옛 우물)
6. 기브아(산, 언덕)
이곳은 베냐민 지파 성읍으로 사울 왕의 고향이자 이스라엘의 첫 왕국 수도다(삼상11:4; 15:34). 동으로는 와디 파라, 서로는 소렉 골짜기가 위치하여 에브라임 산지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할 때 병목지역으로 전략적 요지다. 사울 왕은 블레셋 군대와 싸울 때 기브아에 요나단의 병력 1000명을 배치했다(삼상13:1~2). 사울 왕은 놉에 있는 제사장들을 기브아로 불러 다윗과 공모하여 대적한다는 이유로 85명을 죽이고 그 가족을 다 죽였다(삼상22:18~19). 놉은 현재 히브리대학교가 있는 스코프스 산 지역 일대다. 기브아는 사사기가 끝나고 왕정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그것은 한 레위인 첩 사건인데, 에브라임 산지에 살던 한 레위인이 첩을 데리고 집으로 가던 중에 하루 밤 묵게 되는데 그곳의 불량배들이 첩을 끌고 간다. 끌려간 첩은 밤새도록 고통을 당한 뒤 처참하게 죽고 말았다. 그러자 레위인은 죽은 자기 첩의 시체를 열두 덩이로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각지에 보냈다.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이 베냐민 지파에게 그 불량배들을 내어놓을 것을 요구하지만 베냐민은 이를 거절하고 결국 지파들 간의 전쟁으로 베냐민은 참패를 당하게 된다. 사사기는 당시에 왕이 없어 사람들이 각기 소견에 오른 대로 행해다고 말하면서 끝을 맺는다.
7. 드빌(신탁, 구석진 곳, 대변자, 전당)
드빌은 헤브론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도시로, 가나안 시대에는 아낙자손들이라고 불리웠다. 웃니엘은 이 도시를 정복하고 그 공으로 갈렙은 그의 딸 악사를 웃니엘의 아내로 주었다. 드빌의 위치는 오늘날의 텔 베이도 미르심과 동일시 된다. 이곳 텔 베이드 미르심은 팔레스틴의 고고학사상 획기적인 발굴이 올브라이트(W.F. Albright)의 지도하에 실시되었다(1926-1932). 이곳의 토기에 의한 층위의 연대 측정이 표준화 되어 다른 팔레스틴의 유적의 연대 측정이 연구되었으며, 텔 베이드 미르심의 발굴 보고는 “오늘날의 팔레스틴 고고학자의 불가결한 안내”역활을 담당하게 되었다.
8. 벧술
벧술은 헤브론 북방 6키로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유다산지 중에서 가장 높은 지역으로 해발 1010미터가 된다. 한때는 유다에서 가장 강한 성이었으나 지금은 작은 마을이다. 르호보암이 요새로 만들었으며(대하 11:7) 유다 마카비시대에는 요새로서 주전 165년 루시아의 희랍군을 이곳에서 격파했다. 블레셋이 서해안에서 이곳 중부 고지로 침입하려고 자주 정탐했던 곳이다.
9. 힌놈의 골짜기
힌놈의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서쪽에 위치한 계곡이다. 이곳 힌놈 골짜기는 여호와 하나님을 저버린 유다 백성이 암몬족의 신 몰록에게 어린 아이들을 제물로 바친 곳이다(2열왕 23,10; 예레 7,31-32; 32,35; 2역대 28,3; 33,6). 이 의식은 기원전 10세기 솔로몬 왕 재위 기간 그리고 기원전 7세기 므낫세 왕 때 행해졌으며 기원전 6세기 바빌론에 유배되기까지 계속 되었다.
(현재의 힌놈의 골짜기)
10. 헤브론과 마므레
베들레헴 남쪽 30키로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헤브론은 해발 927미터 유다산지 중에서 높은 산지이며 주변의 산들은 평균 1000미터로 헤브론은 산지 평야지다로 형성되어 있다. 수원도 풍부한 이곳은 헤브론에서 포도재배에 최적지로 알려졌으며 12명의 정탐꾼이 헤브론 근처 에스골 골짜기에서 포도를 따가기도 한다(민 13:21-23). 헤브론의 초기 이름은 ,기략 아르바‘였으며 이것은 마므레를 포함한 헤브론 주변의 작은 공동체들이 연합하여 하나의 도시를 이룬 것을 의미한다. 고고학적 발굴로는 B.C 3300년 경 이미 헤브론에는 집단 거주의 흔적이 있다고 한다. 아브라함은 이곳에서 자신의 부인 사라의 매장지를 마련하기 위해 헷 족속에게서 막벨라 굴을 매입하고 이후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모두 이곳에 묻히게 된다. 헤롯 대왕은 막벨라 굴을 성역화하고 주변에 훌륭한 벽을 건축하였으며 이 건축물들은 지금까지도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옮기기 전 약 7년 동안 헤브론에서 통치를 하였고 헤브론에서 태어난 압살롬은 이곳에서 자신의 반란 운동은 일으켰다. 마므레는 헤브론 근처의 지역으로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대부분 헤브론 북쪽 약 2키로 떨어진 ’라마트 알 칼릴‘을 마므레로 여기고 있다. 헤롯대왕은 이곳에 45m * 60m터의 거대한 담장을 둘러 쌓아으며 이후 하드리안 황제는 이곳에 거대한 신전을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콘스탄틴 황제는 하드리안의 신전을 헐고 아브라함이 쌓은 제단(창13:18)을 기념하는 교회를 지었다고 한다.
(막벨라 굴 내부) (막벨라 굴 외부)
현재상황
팔레스타인 지방은 현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자리 잡고 있는 지중해 동안,즉 레바논과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 시나이반도에 둘러싸인 지역이다. 면적은 대략 2만 6,000㎢이며, 특별한 천연자원은 없다. 요르단 강 서안인 동부는 황무지가 전개되어 있지만, 지중해 연안인 서부는 경작지 및 목초지대가 있어서 농축산물이 생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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