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의 리더십 4.
아버지는 정(貞)이며,
어머니는 초계변씨(草溪卞氏)로
수림(守琳)의 딸이다.
서울 건천동(乾川洞:
지금의 중구 인현동 부근)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시골 본가는
충청남도 아산군 염치면 백암리이나
어린시절의 대부분은
생가인 서울 건천동에서 자란 듯하다.
모든 기반이 무너진 상태에서 이순신은
빈손으로 빠른 기간 안에 군사와 물자를 확보했다.
이를 바탕으로 군선 13척과 왜적선 133척의 대결이라는 미증유의 위기,
명량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어낸 것이다.
이러한 변환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순신이 부하장수들과 더불어 백성들에게 보여준 신뢰에 있다.
하급관리 시절부터 실천했던 청렴성과 공사(公私)의 엄격한 구분이
일부 상관들에게는 미움을 사는 요인이 되기도 했으나,
부하들에게는 신뢰를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도덕성의 영향을 받아 부하들도 역시 높은 도덕성을 견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좌절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
부하들로 하여금 깊은 신뢰감과 충성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순신은 국가존망의 위기 속에 사기가 크게 떨어진
패잔병들을 수습해 기적과 같은 명량대첩을 성취했다.
이러한 위기극복의 리더십은 어려움에 처해 있는
기업의 경영자에게 좋은 귀감이 될 수 있다.
이순신은 죽음을 각오하고 솔선수범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전투에 대한 부담감과 두려움에 빠진 장병들의 분투를 이끌어 냈다.
실제로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의 지휘선이 단독으로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부하들의 사기를 올리고 전투에 적극적인 동참을 유도했다.
기업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먼저 기업의 리더인 경영자가
희생정신을 발휘해 솔선수범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부도가 난 기업이라 해도 경영자가 모든 것을 걸고 분전하는 모습 앞에서
종업원들이 기업회생에 적극 나서는 경우가 많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부임하던 때,
해전에서 왜선을 격파하는데 탁월한 성능을 발휘한 거북선을 개발했다.
그는 일본 수군의 강점을 무력화하고
조선 수군의 강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전함개발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따라 나대용과 같은 기술자들과 함께 개발에 주력한 결과
거북선이라는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 탄생할 수 있었다.
왜 수군의 전선은 기동성이 우수한 반면 상대적으로 내구력이 약했으므로
거북선과 충돌할 경우 적선은 쉽게 깨어져 나갔다.
거북선은 등판 위에 쇠못을 꽂아
백병전에 능한 왜병이 전선 위로 올라서는 것을 차단했다.
배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었지만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었으며
전·후·좌·우의 사방에서 화포를 쏠 수 있었다.
이러한 기능으로 거북선은 해전에서 적진을 교란하는 돌격선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 외에도 이순신은 우리가 갖고 있던 승자총통과 쌍혈총통이
총신이 짧고 총구가 얕아 일본의 조총보다 성능이 떨어지므로,
왜군의 조총을 보고 그 성능과 화력을 높여 정철조총이란 새로운 개인화기를 개발했다.
"우리의 승자총통이나 쌍혈총통은 총신이 짧고 총구멍이 얕아서
왜적의 조총만 같지 못하며 그 소리도 웅장하지 못하므로
정철을 두들겨 만들었는데 총신도 잘되고 총알이 나가는 힘이 조총과 똑같습니다.
정철로 만든 조총 5자루를 올려 보내오니 조정에서 각 도의 여러 고을에 명하여
모두 제작토록 하여 서로 다투어 만들게 함이 좋겠습니다."
영국의 G. A. Ballard가
“이순신 제독이 넬슨보다 나은 점을 가졌으니,
그것은 기계발명에 대한 비상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라고 평가했는데,
이 기계발명은 곧 거북선과 총통을 일컫는 것이다.
이처럼 이순신은 전쟁 전과 전쟁이 진행되는 중에도 지속적인 전비태세를 유지하고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나가는 혁신적인 면모를 보였다.
근원적인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혁신을 해야 한다.
개발과 품질향상, 기술혁신, 경영방법의 도입과 경영혁신,
마케팅과 서비스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부분에
과감한 혁신을 추진하여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다만 어떤 조직과 단체를 불구하고 성공적인 혁신을 위해서는
리더가 선두에 서서 이를 지휘해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