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
반탁운동
1945년 10월16일에 서울로 돌아온 이승만은 조선독립촉성 중앙협의회를 조직하여 반탁운동(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벌리던 중 1947년2월14일에 미국 군정청의 최고 자문기구인 남조선 대한민국 대표 민주의원 의장으로 선출되어 중앙방송을 통하여 모범적 독립국가 건설과 과도정부 당면정책 33항 이라는 연설문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그가 40년의 해외독립투쟁과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여 최초로 밝힌 ‘신국가 건설’의 청사진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1948년5월10일 총선거를 실시하여 제헌국회가 구성되자 이승만은 제헌국회 의장에 당선되어 헌법 제정을 총괄하는 책임을 맡아 대한민국 헌법의 기초심의 및 채택에 중요한 역할을 행사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했다.
1948년7월에 이승만은 국회의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는데 그당시 득표율은 이승만 82%, 김구 18% 였다.
이승만은 1948년7월24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취임 및 같은해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에서 개회사를 하였다.
한국적 기독교 국가 건설
이승만은 원래 유교 집안에서 태어나 유교적 교양을 체질화 하였으나 배재학당에서 수학하고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조선독립 투쟁을 하는 동안 1899년에 기독교에 귀의한 이래 한국에서 기독교 교육 내지 선교활동을 했고 경천애인(敬天愛人) 사상을 좌우명으로 받들고 생활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미국 윌슨 대통령이 한국민의 독립열망을 묵살해 버리자 이승만은 미국과 미국교회에 크게 실망은 했으나 한국을 기독교 국가로 건국하는데는 변함이 없었던 나머지 다음과 같이 대 미국에의 호소문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1919년4월14일 우리의 대의 명분은 하나님과 인간의 법 앞에서 당당한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우리 민족을 일본의 군국주의적 전제로부터 해방 시키는 것이며 아시아에 민주주의를 부식하는 것이다. 우리의 희망은 기독교를 보급시키는 것임으로 우리는 우리의 호소가 미국국민의 지지를 받을만 하다고 확신하는 바이다.”
1948년5월31일 임시국회 의장으로서 제1대 국회(제헌국회)를 개원하기에 앞서 이윤영(목사)의원에게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부탁했고 동년 7월24일 대통령 취임식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서를 하였다.
본내 이승만의 꿈은 대한민국을 완전한 서구식 기독교 국가로 건국하려 하였으나 1912년 중국의 신해혁명의 여파를 볼 때 한국에서 완전한 서구식 기독교 국가 건설은 시기 상조라 판단한 나머지 유교 및 전통 종교들의 장점을 포섭한 한국적인 기독교 국가로 이념을 바꾼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민주공화제 정부수립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 1949년8월15일 정부 수립1주년 기념행사에서 신생 대한민국을 가리켜 4천여년 유래된 정치사상과 신세계의 새정치주의를 합류시켜 만든 모범적 정체라고 역설하였다.
이승만은 부강 문명 달성의 필수요건인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하는 정치제도는 민주공화제뿐이라고 역설하였다.
또 민주공화제를 상고시대 동양에서 시도하다 실패한 제도이며 현재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서양 부강국에서 활용하는 제도로 파악하였던 것이다.
1914년 세계1차 전쟁이 민주주의 연합국이 군국주의 독일을 제패하고 승리한 사실을 민주주의 개가로 받아들여 앞으로 민주공화제가 전세계적으로 보편화 될 것을 확신한 앞을 볼 줄아는 예리한 그의 예견은 가히 선견지명이라 할 수 있다.
이승만은 새로 출범된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한 정부이며 모든 국민이 평등권과 언론, 출판, 종교, 집회 등 모든 생활분야의 자유권을 누려야 된다고 역설하고 1948년7월에 공포하여 발효된 대한민국의 헌법에 이승만이 제헌국회 의장으로서 그의 이상이 수록되었다.
반공보루의 구축
이승만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이승만의 이러한 반공의식은 미국에서의 유학 및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체질화 되었으며 1917년 볼세비키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 왕조가 무너지고 공산정부가 들어서며 반공의식은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소련이 동유럽(East Europe) 약소국가들을 침탈하여 첩병하자 그리고 중국에서 공산당과 국민당 간에 내전이 전개되자 공산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한층 더 높였다.
광복후 좌,우익 간의 갈등이 날로 심화되어 공산당과의 대결이 불가피해지자 이승만은 1945년 12월19일 드디어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 이란 방송연설을 통해 한국은 지금 상황에서 공산당원을 원치 않는 것을 세계 각국에 대하여 선언한다.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공산주의자들이 제 나라나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설파하였다.
이승만은 1949년 5월에 민족내 계급간 알력을 조장하고 계급투쟁을 선동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공산주의에 대항할 일민주의(一民主義)라는 자신의 정치 이념을 제창하여 결국 대한민국의 국시가 되었다.
평등사회의 실현
광복후 이승만은 ‘모범적 독립국을 건설하자’ 라는 방송연설에서 독립국의 건설은 민중의 빈부귀천 남여간의 평등이라고 부르짖었다. 이승만의 이러한 평등주의 이상은 그 후 대한민국 헌법에 국민의 평등권 부분에서 모든 국민은 법률 앞에 평등하며 성별 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라는 조문으로 법제화 하였다.
문명부강의 달성
광복후 이승만은 과도정부 당면 33항을 선언하여 국민교육진흥 정책을 수립하고 의무교육령을 발하여 전국민의 교육수준 창달을 꾀하였다.
1946년5월26일 돈암장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조선의 부강대책에 대한 담화를 통해서 자신의 경제개발 계획을 밝혀 한정된 토지에 고착하여서는 격증될 국민의 경제생활을 건전케 할 수 없음으로 국내에 잠겨있는 모든 자원을 개발하여 국제무역권에 참가하고 농업과 상업이 병행하는 경제계획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건국에 임하여 사유재산을 보호하고 자유경쟁을 조장하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체제를 이상으로 삼아 상공업을 육성시킴으로서 나라의 부강을 조속히 달성시키려는 경제 발전계획을 수립하기도 하였다.
1954년 이승만박사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당시 아이젠하워 미국대통령의 국빈초청을 받아 6.25 전쟁시 미국과 미국민의 성원에 감사하기 위해 미합중국 (USA)을 방문하여 7월28일 미국의회 상,하(상, 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명연설을 하여 열렬한 기립박수를 포합해 33번의 박수를 받는 기록을 남겼다.
또한 뉴욕시민들의 환영대회 때는 이승만의 CAR PARADE 에 수백만 뉴욕시민이 거리로 뛰쳐나와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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