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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의 아버지, 이경선 ─ 보학에 능한 한량형

Joyfule 2020. 5. 22. 23:57

이승만 대통령의 아버지, 이경선 ─ 보학에 능한 한량형

 

이승만 전 대통령(오른쪽에서 둘째)이 미국으로 가기 전 아버지 경선공(왼쪽에서 둘째)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陵內洞)에서 조선의 왕족이며 몰락한 양반 가문인 이경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초명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이다.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1839년 ~ 1912년), 어머니 김해 김씨(金海金氏, 1833년 ~ 1896년) 사이에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으나, 손위의 두 형이 그의 출생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장남 역할을 대신하였고 사실상의 6대 독자가 되었다. 둘째 아들이 죽자 아버지 경선(敬善)은 격분한 나머지 역귀한테 올리는 터줏대감 상을 몽둥이로 부수고, 역귀가 머문다는 사당 앞에서 큰 칼을 휘둘렀다 한다. 그가 석달 동안 몸져 눕자 사람들은 그것이 그런 지각 없는 행동 때문이라 했다.

 

그는 양녕대군(조선 태종의 장남)의 다섯째 서자 장평도정(長平都正) 이흔(李訢)의 15대손으로, 왕족이었지만 계승권에서 밀려나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이승만은 조선왕조 자체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었다 한다. 그는 장평도정의 장남 부림령(富林令) 이순(李順)의 후손이었다.

 

흔히 이승만 대통령의 리더십을 ‘가부장적 권위주의’라고 한다. 긴 수염을 늘어뜨린 봉건시대 집안의 어른처럼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좌지우지한다는 뜻이다. 이 대통령이 훗날 12년 동안이나 나라를 집안 다스리듯 가부장적으로 통치한 이면에는 가문의 영광과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이승만 대통령의 가문은 조선 제3대 태종의 장자인 양녕대군의 16대 후손으로 조선 왕조의 직계 후손이다. 게다가 6대독자여서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홀(G .Hall)에 따르면 독자는 과도한 애정과 간섭을 받고 자라기 때문에 자아의식과 의존 심리가 강하다. 집안에서 유아독존적 존재(single star)의 위치를 차지해 자존심이 세고 신경질적 경향이 강하다.

 

이 대통령의 아버지 이경선 씨는 보학에 능해 선조들의 내력을 훤히 꿰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왕손이었기 때문에 선조들의 업적을 기리고 전수하는 데 대한 자긍심이 무척 강했다. 완고한 아버지는 어린 이승만에게 족보를 주며 달달 외우도록 엄명했고, 조선 왕조의 후손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며 자긍심을 불어 넣어 주었다.

 

어린 이승만은 어렵고 딱딱한 족보 공부를 하는 것이 정말 싫었지만, 화려했던 조상들의 자취를 더듬는 과정에서 강한 엘리트 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는 일개 돗자리 장수였던 유비가 어머니로부터 황족의 후예임을 한시도 잊지 말고 명심해 옛 영광을 되찾으라는 가르침을 받으면서 야망을 키워갔던 <삼국지>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유소년기의 이승만은 조선 왕조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전근대적 사회에서 아버지로부터 선민의식과 우월감, 엘리트 의식을 배웠고, 이는 훗날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뿌리가 된 것으로 보인다. 가부장적 집안 분위기 탓인지 이승만 대통령의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은 대단했다. 예컨대 이 대통령은 재임 중 <우남 이승만전>이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출판했는데, 아버지의 이름 뒤에 존칭이 빠졌다는 이유로 경찰을 동원해 이미 발간된 자서전을 모조리 압수해 버렸다.

 

양녕대군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이 대통령은 평소 ‘왕손’ ‘백성들’ ‘과인’ 같은 조선시대 용어를 곧잘 사용했고, 참모들은 그를 ‘어르신네’ ‘국부님’이라고 호칭했다. 이 대통령의 돌격대장으로 오늘날의 청와대 경호실장에 해당하는 직책을 맡았던 곽영주는 4·19 혁명재판에서 평소의 습관대로 “재판장님! 황공하옵니다” “통촉해 주시옵소서”라며 조선시대 용어를 사용했다가 재판장으로부터 “지금 장난하느냐”는 핀잔을 받기도 했다.

 

곽영주는 이 대통령에게 보고할 때마다 조선시대 어법을 사용하며 아부했고, 그런 맹종파 참모를 이 대통령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이 대통령의 뇌리 속에는 ‘짐은 곧 국가’라는 군주(君主)의식과 왕 콤플렉스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 대통령의 아버지는 한량 기질이 많아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느라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선대로부터 꽤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기를 좋아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해 이승만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가산을 탕진한 상태였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아버지와 차분하게 지냈던 시간이 많지 않아 주로 어머니와 지내며 영향을 많이 받았다. 보수적인 양반집 어머니의 6대독자 아들 사랑은 과잉보호라고 할 만큼 각별했다.

 

심리학적으로 유소년기에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 감정이 풍부하고 변덕스러우며 자기중심적이고 감성적인 세계관을 갖기 쉽다. 심하면 ‘내가 최고’라는 자만심으로 매사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심리적 마마보이(psychological mama’ boy)’ 경향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 대통령이 훗날 해방정국에서 정적들을 제거하고 좌익을 가차없이 척결하면서 국정을 권위적이고 독선적으로 운영한 심리적 배경에는 아버지의 가부장적 스타일과 어머니의 과잉보호 영향이 컸을 것으로 분석된다.최 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 소장 [cj020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