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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영 민족계몽운동에 앞장선 민족운동가

Joyfule 2009. 3. 28. 00:35
이하영 민족계몽운동에 앞장선 민족운동가
 


1. 서론

["본 피고인은 4천년 역사를 가진 조선 국민 중의 일분자의 의무를 가진 자로서 약육강식의 무력주의자인 독일을 정복하고 세계 평화를 주창하며 인도정의를 고창하고 있는 차제에 본년 3월1일 天의 순하게 人에 응하여 맨주먹을 펴고 만세를 부름은 조선국의 자주독립의 선언으로서 사상을 발표하고 의무를 다한 행위인 것이다. ....나라를 위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충을 다하며 의를 행한 자에게 이와 같은 징역을 과한다면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해치며 충량을 함해하는 자에 대해서 어떤 법 어떤 률로써 처혀을 한다는 건가!"]

 

이상은 1919년 9월 서울 고등법원에서 개정된 '진남포 만세 시위 관련자 상고심'에서 이하영 목사가 주장한 상고 내용의 요점이다. 당시 진남포 신흥리교회 담임목사였던 이하영 목사는 동지 20명과 함께 구속되어 평양 지방법원과 복심법원을 거쳐 서울의 고등법원 재판정에까지 이르러 정의와 자유를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평양 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복심법원에서 징역 10개월을 각각 선고 받고 최종법원 고등법원에 상고하였던 것이다. 고등법원은 그의 상고를 기각하여 징역 10개월을 확정지었고,이에 이하영 목사는 평양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어야 했다(3.1운동 재판기록 참조).

2. 기독교에의 개종

민족 운동가이자 교육자이며 목회자로서도 큰 발자취를 남긴 이하영 목사는 1870년 9월 18일 경기도 수원의 명문가에서 출생하였다. 수원에 감리교가 들어오기는 1889년 동탄면 장지천교회 설립이 그 효시가 된다. 이에 1900년 미감리회 선교사 스웨어러(W.C.Swearer:徐元輔)가 수원읍내 북문안 보시동에 정착하고 기와집 10여칸 예배당(현 수원종로교회)을 설립하면서 읍내 선교가 이루어졌다.

 

초창기엔 지역의 보수적 경향 때문에 크게 발전하지 못하다가 1902년 이명숙 전도인이 파송되어 읍내에 정착하면서 전도한 결과,읍내 유지급 인사들이 대거교회로 들어오게 되었다. 김제원,홍돈후,김제구,임면수,차희균 등과 함께 이하영이 기독교에 입신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하영의 개종 동기는 일차 이명숙,스웨어러 등의 전도에 있었으나 이미 전에 한문으로 된 성서를 읽으며 나름대로 기독교 신앙을 탐구해 왔다. 이같은 계기로 인해 누구보다 먼저 교회로 들어와 상투를 자른 것이다.

 

주를 믿는 사회적 악에 대항하는 투사가 되고저 기도하던 중 주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중생의 길을 시작하였다. 곧["현실적 생에서 오는 윤택미를 잃고 불운과 고민에 떨며 나약한 사람을 위하여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함축된 주의 복음을 전하여야만 하겠다는 가장 침통한 아픔과 희열을 느꼈다."]
(조선감리교회사,수원종로교회편,감리회보,제61호,1937.8.6면)

 

그는 기독교인이 되자마자 교회의 중역으로 교회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을 뿐 아니라 교회 안에 학교를 설립하여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건질 인재 양성에 주력하였다. 1903년 5월 7일 보시동 교회 옆에 두 채의 초가집을 구입,남.여 학교를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오늘의 삼일중고등학교가 되었다. 초대 교장으로 당시 경기도 관찰사 서리였던 김한목을 세워 대 사회적 유대 관계를 긴밀하게 하였고 그는 초대 교사로 부임하여 미감리회 선교부와 지역 교인들의 후원을 얻어 학교를 운영해 나갔다.

 

그는 또 감리교 선교부에서 매년 2차 서울.평양.인천.개성 등지에서 개최하는 신학회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여 전도자로서의 수업도 받았다. 그리하여 1904년 수원에 지방회가 개설 되면서 감리사로 버딕(G.M.Burdick:邊北鎭)선교사가 부임할 때, 그는 수원지방 초대 전도사로 함께 임명받아 목회를 시작하였다. 1907년 교회와 학교가 모두 크게 부흥하여 교회는 종로 네거리에 5백평 땅을 사서 옮겨야 했고 학교도 중포산 언덕에 기지 3천여평을 마련,이전해야 했다.

 

1910년 그는 평양으로 임지를 옮겼다. 전 해 (1909년) 미감리회 조선 매년회에 견습을 마쳐 정식 전도사 직첩을 받고 그는 평양 이문골 교회로 옮겨 새로운 목회를 시작하였고 1912년 집사 목사 안수를 받았다. 다시 1914년에는 장로 목사 안수를 받았고 그해 서울의 동대문교회로 옮겨 3년을 시무하였다. 1917년에는 그의 목회 임지를 옮기게 되었다.

 

당시 진남포에는 신흥리교회를 비롯,억냥기리교회, 덕동교회가 있었고,감리교 계통 학교인 삼숭(三崇)학교가 있어 기독교 민족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3. 3.1운동

이곳에서의 3.1운동은 평양의 3.1운동과 직접 연결을 맺고 추진 되었다. 즉 평양의 이승훈은 진남포에 거주하던 임치정과 신흥리교회 교인 홍기황(당시 삼숭학교 교장).김정민.노윤길 등과 직접 연락을 취하며,진남포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노윤길을 통해 평양에서 독립선언서가 입수되었고 삼숭학교 교사 조두식,홍기주가 이것을 인쇄하였으며,장소는 신흥리교회당이며 시간은 3월1일 오후 2시로 결정되었다.

 

이하영은 억낭기리교회 전도사 안석준,덕동교회 전도사 최병훈등과 교인 동원의 책임을 지게 되었고 삼숭학교 교사 이겸노,송영환.김영한등은 학생동원을 홍기황은 천도교측과의 협조를 맡게되었다. 마침내 3월 1일,오후 2시 신흥리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교인.학생.일반인 5백여명이 교회로 모였다.

 

그의 주재로 고종황제 봉도식을 먼저 거행한 후 "이제부터 독립 시위 행진을 시작하겠다!"는 선포와 함께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하영 목사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일본 경찰의 발포로 현장에서 수명의 살상자가 발생하는 등 치열한 만세 시위가 되었다. 진남포의 만세 시위는 3월 말까지 교회와 학교가 중심이 되어 계속적으로 일어나 평양으로부터 일본군 보병 1개 중대가 특파되기도 하였다.

 

3월 1일의 만세시위 후 주동자 체포에 나선 일본 경찰은 이하영.홍기황.조두식.최병훈.이겸로 이하 20명을 체포하여 혹독한 고문과 함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4. 출옥후의 활동

출옥후 이하영 목사는 평양지방 순행목사로 부임하여 남산현.박구리.칠산리.신절골교회를 순회하며 목회에 전념하였다.3.1운동 이후 불정성인으로지목되어 일본 경찰의 삼엄한 감시를 받아 활동의 제약을 받으면서도 목양에 혼신의 힘을 다 기울였다. 1923년 그는 강릉교회를 옮겨 이곳에서 4년을 시무하였다.이곳 강릉교회에서의 목회가 그의 마지막 봉사였다 1927년 임시 휴직상태에 들어갔다가 1931년 자원은퇴함으로 목회 20년 봉사를 마감하였다.

 

은퇴 후 그는 고향에 돌아와 의사인 부인(이그레이스)이 수원 거북산 밑에 설립한 병원에 거주하면서 자신의 삶을 정리하셨다. 이하영 목사의 첫부인은 본래 김씨성을 가진이었으나 아들 하나를 낳고 일찍 별세하는 바람에 혼자 지내다가 세브란스병원의 전신인 광혜원 여자 의사로 활약했던 이그레이스와 재혼하여 다시 3남2녀를 두었다.

 

부인 이그레이스는 남편이 평양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그와 고난을 함께한다는 의미에서 줄곧 콩밥을 지어 자녀들과 함께 먹을 정도의 강인한 민족성을 지닌 인물이었다. 이러한 부인의 헌신적인 돌봄을 받으며 말년을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던 이하영 목사는 일제 말기의 암흑기를 지나 해방의 감격을 맛본 후 잠시 서울에서 목회하였고 민족 최대의 시련인 6.25사변 난리 중인 1952년 7월 24일 수원에서 조용히 별세하였다.그의 나이 83세였다.(이덕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