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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덕기(全德基) 민중, 민족 목회자

Joyfule 2009. 3. 29. 00:58

전덕기(全德基) 민중, 민족 목회자

1.생애 개관

전덕기(全德基) 전덕기 목사는 운양호 사건에 이은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이 오랜 쇄국의 빗장을 풀고 개항을 표시햐ㅏ던 1875년 12월 8일 서울 정동에서 출생했다. 아버지(全漢奎)와 어머니(林)씨는 그가 9세 도딘 해 모두 별세하여 고아가 되었고 이후 숙부인 전성여(全成汝)의 집에 들어가 성장하였다. 숙부의 직업이 숯장수인 것으로 미루어 전덕기 가문의 신분 계층은 상인계층일 것으로 추측되며 그는 어려서부터 가정적인 고독과 경제적 곤란을 체험하며 살았다.

 

그의 나이 17세 때인 1892년 그는 당시 "양귀자"(洋鬼子) 즉 '양도깨비'로 오해받던 서양 선교사를 스스로 찾아갔다. 정동에 있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턴(W.B.Scranton)의 집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가 스크랜턴을 찾아간 동기는 신앙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경제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장하여 이제는 자립의 생활을 해야 할 그로서는 경제적 수단의 하나로 선교사 집을 찾아갔던 것이다. 스크랜턴은 그를 자기집 고용인으로 맞아 들였고 전덕기는 신용있게 일을 처리해 나갔다. 그러나 스크랜턴과의 만남은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경제적 수단으로 선택한 선교사,그의 뒤에 있는 기독교가 그를 정신적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결국 4년만인 1896년 그는 스크랜턴에게 세례를 받고 정식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의 기독교 신앙고백은 그보다 훨씬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스크랜턴은 1893년 상동구역을 조직, 병원(1889년 설립)과 함께 교회 조직을 갖추었고 1895년부터는 아주 상동으로 집을 옮겨 주로 상민을 대상으로 한 선교에 전념하였는데 전덕기가 그의 동역자 역할을 한 것이다.

 

전덕기는 1898년 상동교회 속장이 되어 평신도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때 교회 안에 엡윗청년회를 조직,민주적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독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899년에는 교회 안에 설립된 공옥학교 교장이 되어 주로 불우한 형편에 있던 청소년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01년 평신도로서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권사직을 받았고 1902년에는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전도사로 임명받아 목회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1903년 엡윗청년회가 정치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선교사에 의해 해산당하자 교회안에 청년학원을 설립, 보다 적극적인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같은 민족주의 사상을 지닌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 무효상소운동이나 1907년의 헤이그밀사 사건은 상동청년학원 내지는 '상동파'로 불리는 민족주의자들의 항일운동이었다.

 

그러면서도 감리교 선교부가 주관하는 교역자 양성과정인 '신학회'에 꾸준히 참석하여 마침내 1907년 집사목사(현재의 감리교 준회원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그해 스크랜턴의 후임으로 상동교회 최초의 한국인 담임목회자로 부임하여 별세하기까지 목회하였다. 상동교회 담임목사 외에 그는 공옥학교 교장으로 계속 교육에도 종사하였고 황성기독청년회(현YMCA)조직과 활동에도 적극 가담하였다. 1907년 미국에서 안창호가 일시 귀국하면서 산재해 있던 민족운동 세력들이 규합되어 소위 신민회가 형성되었는데 전덕기는 이 모임의 핵심 멤버가 되어 본격적인 민족운동을 추진하게 된다. 이 신민회 조직은 일제의 조선 합병에 걸림돌이 되었고 이에 일제는 합방(1910년)직후 항일 민족세력 제거에 나서 그 첫 대상으로 기독교인이 주축을 이룬 신민회를 삼았다. 그 결과 일어난 것이 1911년의 '데라우찌 암살음모사건'으로도 알려진 '105인 사건'이다. 윤치호,이승훈,양기탁,임치정 등 신민회 핵심 멤버들이 모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받았는데 이때 전덕기도 체포되어 엄청난 고문과 악형을 받았다.

 

1911년 봄,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그해 겨울에 졸업하였는데 졸업 즉시 체포되어 악형을 받았다. 재판에까지 회부되지는 않았으나 고문으로 병을 얻어 불기수로 풀려난 것이다. 고문의 여독으로 늑막염과 폐결핵을 앓기 시작한 그는 이후 2년 동안의 투병생활을 하게 된다. 1912년부터 후배 현순목사가 부목사로 와서 그를 도왔으나 전덕기 목사가 강단 위에 서는 것은 좀처럼 보기가 힘들었다. 1913년에는 허리에 악성 종기까지 발병하였고 1914년 1월부터는 아예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도 못한채 병고에 시달리다가 1914년 3월 23일 교인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별세하였다. 그의 나이 39세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은 "주여 주여 이 죄인을 구원하여 주소서"라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나는 천사와 더불어 돌아가노라"는 교인들을 향한 고백이었다.

2. 민중목회

'민중'을 어떻게 개념 규정하느냐 하는 문제는 아직도 신학계의 주요 관심사 중의 하나이지만 일단 성서를 근거로 하여 예수의 선교 대상이 되었던 '가난한 자,포로된 자,눈 먼 자, 눌린 자(눅4:18)들로 본다면 전덕기의 목회는 바로 이들 민중을 위한 헌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전덕기 자신이 민중의 부류에 속한 사람이었다. 9세 때 고아가 되었고 숯장수하는 숙부의 양육을 받으면서 그는 당시 조선의 소외된 민중의 삶을 체험하였을 것이다. 특히 당시 장사아치들이 많이 모였던 남대문안 상동 거리는 그의 삶의 체험 무대가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버려진 사람들, 양반보다는 상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고난과 슬픔을 알 수 있었다. 여기에 스크랜턴의 목회 신학이 맞아 떨어졌다. 스크랜턴은 다른 선교사들과 달리 서민적이고 조선 민중에 동정적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목사가 되기 전 의사로서 먼저 활동하였다. 그가 정동에서 상동으로 자리를 옮긴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초기 상동교회는 이러한 민중들의 교회였다. 중인이하의 상민계층이 주류를 이루었다. 스크랜턴의 보고가 이것을 증언하고 있다.

우리 교회엔 과거 정부관리인으로 있던 자들도 있으나 그래도 우리 교인은 대체로 중인 계층입니다. 부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반대로 가난하고 나이 많은 이들이 상당히 많은데 지난겨울 그들을 구제하는 것이 우리의 주된 업무였습니다.

 

스크랜턴의 부재시 상동교회를 맡아 보았던 스웨어러(W.C.Swearer)도 같은 보고(1898)을 하고 있다.

"이 교회(상동교회) 교인은 대부분이 가난한 이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만 할 것입니다. 겨울동안에도 이러한 목적으로 모금한 결과 30원이 걷혔습니다. 또한 우리 교인들 가운데 극빈자들이 죽는 경우 그 장례비도 마련해야만 했습니다. 그 목적으로 쓸 돈 10-12원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자,소외받은 자, 병든 자들이 교인 대다수를 이루고 있고 그들의 구휼과 치료, 죽은 후의 장례까지 책임지는 교회 이것이야말로 민중교회인 것이다. 상동교회가 이같이 민중교회가 되기까지는 무엇보다 스크랜턴의 선교의지와 함께 민중 계층 출신의 전덕기의 활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전덕기는 민중과 직접 만날 수 있는 방법의 하나인 노방전도를 실시하여 큰 효과를 얻었다.

 

조선인 전봉윤(전덕기)과 최근 나(W.C. Swearer)에게 세례받은 박바울 두 사람은 한 동안 교회 앞에서 노방전도를 실시하였습니다. 어떤 때 보면 이 젊은 사람들이 열을 토하며 전하는 복음을 들으려 지나가던 행인들이 모여들어 수많은 군중을 이루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전도하면서 1천매 정도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고 많은 양의 쪽복음과 교리서들을 팔았습니다.(1902년 보고서)

 

전덕기는 교회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바깥을 향해 들어오라고 손짓만 하는 그런 목회자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먼저 바깥 민중들을 향해 나갔다. 길에서 민중을 만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들의 아픔과 고통의 삶을 목격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의 삶의 현장인 길이 그의 목회현장이었다. 특히 가난한 백성, 질병으로 고생하는 민중이 그의 주된 목회대상이었다. 평소 동료나 후배 목회자들에게 목회자가 항상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장례를 위한 나막신, 마른 쑥, 의지를 갖추고 있으라고 권면한 것도 평소 부패한 시체를 많이 다루어 본 목회자의 생활체험에서 나온 교훈으로 풀이될 수 있다.

전덕기는 평범한 목회인이면서 또한 비범한 민족운동가였다. 그것은 민중목회를 통해 확인한 이 땅의 민족현실을 묵과하지 않고 그 치유와 게도에 헌신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즉 그의 민족운동가적 활동은 민중목회를 통한 신앙체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는 민족정신을 계몽하고 교육하는 일을 자기 목회의 한 부분으로 삼았다.

그리고 교회 목회와 이와 같은 계몽, 교육 사이의 갈등이나 마찰을 느끼지 않으면서 훌륭히 처리해 나갈 수 있었다. 교회 안에 엡윗청년회,공옥학교,상동청년학원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제2세 교육을 추진한 것이라든지 독립협회,YMCA 신민회 등 민족운동단체에 가입하여 활약한 것 등은 민중 목회를 통해 확인한 민족의 현실을 치유하고자 하는 목회자적 양심에서 비롯된 행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상동청년학원 안에서 발생하던 '가 뎡 잡지'에 전덕기의 단편적인 글 몇편이 소개되고 있는데 주로 계몽적인 것들이다.'놀고 먹는 사람'이란 글의 일부를 읽어 보자.

 

대져 우리나라 집안을 의론하거딘 오날날 엇지 ㅎ여 이 자티빈악 ㅎ고 곤궁ㅎ한 디경을 당ㅎㄴ뇨 그 원인을 궁구 ㅎ면 여러가지 폐단이 만커니와 데일 큰 폐단은 집집마다 놀고 먹는 사람이라 유의유식ㅎ는 여러 형뎨들이여 누가당신을 기다릴 사람이 어디 잇소...쏘 남을 의지 ㅎ는 것이니 삼ㅅ촌,오륙간촌간에 벼섬이나 ㅎ든지 월급푼이나 밧든지 ㅎ면 말ㅎ기를 내가 굼는 것을 보면 필경 얼마 보내겠지 ㅎ며 기다리고 안젓으니 이 기다리는 마움가지고 다른디 쥬의 ㅎ엿으면 만ㅅ에 이루지 못할 것이 업을 것이어근 셰월을 이자티 놀고 보내니 엇지 가련코 앗갑지 안이ㅎ리요 우리가 날로 바라는 것은 젼국의 놀고 먹는 사람이 업서 ㅈ긔가뎡을 남에게 의지ㅎ여 바라지 말고 독립가뎡으로 살기를 간졀히 바라납나이다. (가뎡잡지,1권 3호,1906).

 

교회 안팎의 가난한 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누구보다 가난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던 전덕기는 가난한 민족현실을 타개하는 길은 자립과 독립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한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원리가 아니라 위기에 처해있는 국가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리였다. 재정이 고갈상태에 이른 정부,그 곤란한 형편을 타개하기 위해 외세에 의존하려는 정치지도자들간에 친일파,친로파,친청파 등으로 나뉘어 정쟁을 일삼는 우리 현실에 대한 경고이며 교훈이었다. 민족자존의 방법만이 민족 생존의 길임을 깨달았던 그는 학교, 학원을 통해 민족정신을 계몽,교육하는 한편 같은 의식을 가진 동료들을 규합,보다 적극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을사보호조약 무효상소운동(1905년)과 헤이그밀사 파견(1907년)및 신민회운동(1907-1911)년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전덕기의 민족운동을 그의 민중목회의 연장으로 이해해야 하며 더욱 거슬러 올라가면 그의 어린시절 체험했던 민중 체험에까지 소급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민중목회와 민족운동,이 둘은 전덕기에게서 하나로 연결되었고,찬란한 결실을 맺은 것이다.(이덕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