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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택 현대문학의 개척자, 시인 소설가

Joyfule 2009. 3. 30. 02:58

전영택 현대문학의 개척자, 시인 소설가

1. 안타까운 일

늘봄 전목사를 생각하면 가지 가지의 추억이 꼬리를 잇는다. 감투에 욕심이 없고 물질에 욕심 없으며 작품에도 욕심이 없으셨던 목사, 작품은 곧 설교요 설교는 곧 생활로 이어지기에 소설가와 성직자의 생활이 하나였던 목사님, 그래서 동배들은 그를 우러러 대하고 후배들은 그를 성자로 따르던 목사,전영택 목사가 가신지도 어언 20년이 되어 이제는 세인의 머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어찌 우리들의 머리에서야 사라질 수 있을까.

요즘 서점에 가면 하찮은 서적들이 쏟아져 나와 산처럼 쌓였건만 70평생 글로 사신 전목사의 그 귀한 글은 어찌 한데 모아 전집을 내어 주는 이 하나 없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2. 수학과 문학활동

늘봄 전영택 목사는 1894년 1월 18일 평양 사창골에서 태어났다. 당시 큰 농장을 경영하면서 시를 읉고 거문고를 즐기던 부친 전석영씨와 어머니 강씨 사이에서 출생했던 것이다.

7세때 진남포로 이사하여 부친이 설립한 보동학교를 거쳐 평양 대성학교에서 공부한 후 17세 때 서울 관립의학교에 들어갔다 집어치우고 그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에 감리교 학교인 청산학원 중학부 4년에 편입하여 1916년 중학부 졸업, 18년 고등학부 문과 졸업,18년에 청산학원 대학 문학부 졸업 그리고 1923년 동대학 신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그보다 앞서 그는 1918년 신학부 재학시에 김동인,김환,주요한과 더불어 동경에서 순문예 잡지 [창조]를 발간하였다. 그리고 1919년에는 동경에 있느한국인 유학생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일경의 눈을 피해 3월말 귀국하여 당시 이화학당 출신인 24세의 채혜수양과 결혼하였다.

그런데 신부 채혜수는 결혼한 다음날 왜경에게 체포당했다. 이유는 3.1독립운동에 가담한 것이 탄로가 났기 때문이었다. 전목사는 신부를 감옥에 둔채 동경으로 복교할 수가 없어 아내가 일보던 진남포 삼숭학교 교장직을 맡아 학교 일을 보면서 감옥으로 아내 면회를 다녀야 했다. 그후 1921년 27세 때에야 비로소 복교하였고 23년 29세에 가서야 신학교를 졸업하였던 것이다.

전목사가 문필활동을 가장 활발하게 한 시기는 청산학원 신학부에 입학한 1918년부터 1930년 여름 미국 태평양신학교로 유학가기 까지의 12년 동안이었다.

 

그동안의 문필활동을 한 것을 보면 [혜선의 죽음][천지,천재][운명][생명의 봄][독약을 마시는 여인][K와 어머니의 죽음][피]등 단편이 신학부를 졸업할 때가지의 쓴 소설이고 신학부를 졸업한 후 서울 감리교여자신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쓴 것으로 [사진][화수분][흰닭][바람부는 저녁][홍련 백련][순복이 소식][후회]등이 있고,그외 논문집으로 [생명의 개조]를 비롯하여 자신이 주간으로 1923년에 창간한 월간 [신생명]에[문화와 종교][문학으로 본 성경][조선 교회의 장래와 오인의 연쇄적 책임][현대인의 요구와 종교적 사명][인격지상주의]등이 있으며 [주일학교잡지]에는 [주일학교 교사의 정신적 준비][성극부활]등이 있고, 류형기가 발간한 [신생]에는 [인격주의][어머니 전상서]그리고 월간 청년에는 [극인생][순교자 베드로]등이 있다.

 

그밖에도 [기독신보]에는 위인전기,시,논문,[아이생활]에는 동화가 호마다 실려 있고 단행본으로 [아동설교][생명의 봄]등이 있으며,[조선문단][영대][삼천리]등 월간지에도 수필,기행문,단편 소설 그리고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등 일간 신문에도 같은 글들이 많이 실려 있다. 전목사의 문필활동의 ㅅ황금시대는 1920년대라고 할 수 있다.

3. 암흑시대

전목사의 인생의 제2기는 미국 유학에서 귀국하여 황해도 봉산감리교회로 파송을 받아가던 1933년부터 1945년 8.15 해방의 때까지로 잡을 수 있다. 1933년에 각본집 [순교자]를 발간하고 1935년 황해도 봉산교회를 사임 서울로 올라와 김우현 목사와 함께 [기독교 신문]을 내고 단독으로 월간[새사람]을 발행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평양 요한학교와 여고성 교수 그리고 신리감리교회 담임목사를 거쳐 평양시외 대성산 밑에서 해방을 맞을 때까지는 별로 글을 쓰지 않았다기보다 절필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그 당시 [벽서]라는 시에서

다시 한 칼이,내 가슴에
원수 왕의 충신되란 맹세라니
이 맹세 내 붓으로 써 펴내라니
아프구나 이 칼이 더 아프구나

몇십년 아낀 내 붓 들어
이 글을 쓰단말가.
꺾어라, 꺾어라,내 혼도 꺾이누나.

위 글에서 보면 원수 왜인을 위해 글을 쓸수 없어 붓을 꺾고 말았던 것이다.
1944년 신리교회에서 배일 설교로 평양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출옥한 후에는 설자리조차 없었다. 그리하여 대성산 밑에 사람이 못사는 빈 집을 보금자리로 삼고 자녀 7남매와 같이 풀뿌리로 연명하며 8.15 해방을 맞이했던 것이다.

4. 제3기의 생활

해방과 더불어 평양 경상리로 들어온 전목사는 조만식 선생이 창당한 조선 민주당 문교부장으로 있으면서 평양의학 전문학교 국어 교수로 강의를 맡기까지 했으나,김일성의 등장으로 그해 12월초에 월남하므로 전목사의 생활에는 제3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946년 문교부 편수관,국립맹아학교장,감리교신학교와 중앙신학교 강사를 맡으면서 월간[새사람]속간,단편[소][크리스마스 새벽]등을 발표하였고 단편 [하늘을 바라보는 여인][유관순전][조선전래동화집]등을 출간했다.

 

부산으로 진해로 피난을 다녀야 했던 전목사는 아예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한인 YMCA의 [복음신문]주필로 있다가 휴전이 되자 1954년에 귀국하여 대한기독교서회 편집부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다시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전목사는 이때가 인생의 말년인 61세였음으로 문장이나 사상이 완숙기에 들어 있었다. 그러므로 발표되는 글들은 모두 주옥같은 것이었다.

 

이 시기에 쓴 단편으로 [김탄실과 그아들][새벽종][취이야기][집][아버지와 아들][돌팔이와 아내][해바라기][양 한마리][눈내리는 오후][금붕어][차돌맹이][암흑과 광명][크리스마스전야의 풍경][우정][거꾸러맨 성경][모든 것을 바치고][생일파티][말없는 사람]등이 있고, 단행본으로는 [의의 태양][인격주의][전영택 단편집][사랑의 등불]등이 있으며 유재기 목사가 발간하던 [흥국시보]의 수필,[새가정]에 성경해설 사상계와 여러 문학 잡지에 [나의 문학수업][나의 문학과 생활] [나와 창조와 조선문단][나의 문단 자서전]그 밖에 새 생명과 기독교사상을 비롯하여 교계 신문 잡지 그리고 일반 신문 잡지 등에 글을 썼다.

 

전목사는 말년의 생활이 영광스러웠다고 할 수 있다. 60년대에는 서울시 문화상을 받으시고, 그 이듬해에는 한국 문인협회 초대이사장에 추대되고 63년에는 대한민국 문화포상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기독교문인협회장과 계명협회장도 지내고,펜클럽 동경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고,자녀들은 거의 서울대학과 연세대학 그리고 이화대학을 나왔던 것이다.

5. 그의 말년

1964년 대한 기독교 서희에서 은퇴하신 전목사는 부인 채혜수여사와 같이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317의 15호 즉 외국어대학앞에 있는 단층 양옥집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계셨다. 격월간 영문 [다락방]을 고정적으로 맡아 번역하고,청탁오는 원고도 쓰고,그리고 때로 손자들의 재롱도 보면서 여유있게 지내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행복스러운 생활도 잠시뿐이었다. 1968년 1월 16일 종로 2가에 있는 계명협회에 [교회연합신보]에 보낼 원고를 맡기고 YMCA편으로 가려고 길을 건너다가 달려오는 택시에 치어 숨을 거두고 만 것이다. 20일 10시 정동감리교회에서 문인협회장으로 지낸 발인식에는 1천여명의 조객이 교회당 안팎을 메운 가운데 진행되었고 그 날로 금촌 감리교 묘지에 안장되므로 74년의 긴 생애의 막을 내리셨다.

1963. 대한민국 문화포상 대통령상을 수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