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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116과)1

Joyfule 2010. 4. 17. 07:28

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116과)1.

호세아 (1) : 예언의 1부: 호세아와 고멜 (1-3장)


A. 호세아서의 배경(1:1)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호 1:1)"

 

1. 호세아

 

  호세아는 아모스 직후에 활약했던 선지자이다. 아모스는 남왕국 유다 출신으로 국경을 넘어 이스라엘로 가서 메시지를 전했지만, 호세아는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이스라엘을 향해 예언한 사람이다. 호세아라는 이름은 "구원" 혹은 "구출"("예수", 또는 "여호수아"와 같은 뜻)을 의미한다. 메시지를 통해 나타나는 호세아는 불같은 급한 성격과, 온유한 부드러운 마음을 골고루 지닌 감성적이며 또한 정서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메시지의 주요 내용은 "고멜과의 결혼"을 통해 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고멜과의 결혼에서 받은 고통과 슬픔을 통해서 음행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어떤 고통을 주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모스가 "사회에 대한 의와 정의"를 강조한 반면, 호세아는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헤세드)"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강조하고 있다

  북왕국의 마지막 선지자에 속하는 호세아는 부와 번영의 시대에 부름받았다. 당시는 권모술수와 기회주의가 판을 쳤고, 부자와 세도가들은 사치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호세아는 자기 만족과 배신에 젖은 백성에게 하나님의 사자로 보냄을 받았다(주전 753년경). 그는 자신의 사명과, 예언 전통에 소속됨과, 자신의 구속사적인 위치를 깊이 자각하고 있었다. 그는 또 지리적인 언급에서 드러나듯이, 북왕국의 역사와 지리에도 매우 정통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대언자였다. 그는 예후 왕조의 멸망을 선포하고 증언했다(1:4). 그는 이스라엘의 궁중 음모와 정치적 야욕, 그리고 정치적 생존을 위한 현실정책을 규탄했다. 국제 세력들 간에 "세계 패권"을 위한 투쟁이 심화될 때마다, 정치는 음모와 반역과 무질서로 얼룩졌다. 그는 여호와께 절대적인 충성과 현실정책의 폐기를 부르짖었다(14:2-3). 진실로 그는 "이스라엘의 종말의 사자였고, 종말을 주관하시는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사자였다."


2. 호세아의 시대 상황

  유다 웃시야(주전 792-740)와 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주전 793-753)가 함께 다스린 시대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견줄만큼 번영과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2:4-17). 이스라엘은 아람의 침입으로 잃었던 영토를 되찾는데 성공했으며(왕하 14:25), 상업과 무역이 융성해졌고, 사마리아의 정치가들과 상인들은 생활 수준을 향상시켰다. 그러나 노동자들과 농부들은 가난과 굶주림과 압제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이미 속으로부터 썩어가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다시 교만해졌으며 경제적 발전은 그들을 더욱 자만에 빠지게 만들었다. 사회 구조는 상류 계층의 권력과 탐욕과 불의와 사치스러운 삶을 부채질했다. 이로 인해 사회는 더욱 분열되었으며,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조금도 돌아보지 않았다. 가난한 자들은 빚을 지고 이를 갚지 못해서 노예 상태로 전락했으며, 귀족들은 왕실을 따라 사치에 빠졌고, 빈부간의 격차는 위협적이 될만큼 커지게 되었다. 번영과 더불어 문화가 크게 타락하기 시작했다.

 

  정치가들은 많은 노력 끝에 얻은 정치적 권력을 잃지 않으려고 밀려드는 외국 문화의 영향을 조금도 막지 않았다. 풍요를 비는 제사와 진탕 마시고 떠들어대는 주연(4:10-13)과, 풍기 문란한 가나안 족속의 바알 숭배를(2:7,17, 11:2) 비롯하여, 난잡한 외국 문화가 이스라엘을 잠식했다. 또한 종교적인 매춘이 성행했으며(암 2:7-8), 단과 벧엘의 성소에서는 우상 숭배가 공개적으로 자행되고 있었다. 고대 근동의 문화적 변화에 순응하면서, 이스라엘 종교는 혼합주의가 되었다. 그들은 여호와께 각종 제사와 희생과 십일조를 드리면서(8:11,13, 9:4, 10:1, 암 5:22), 동시에 앗시리아인의 종교적 관습을 따랐다(암 5:16). 또한 이방 우상의 종교 의식에 참석한 자들도 여호와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성소를 메웠다. 제사장들도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타락했다(4:4-9, 5:1, 6:9). 이런 혼합주의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급속히 부패시켰다. 여호와에 대한 이스라엘의 얄팍한 헌신은 민족과 사회 전체에 위협을 가져왔다. 호세아는 경제적 호황이 준 혜택을 누리면서 반복되는 반역과 모반에서 국가의 위기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7:7, 8:4). 그는 이스라엘의 외세와의 결탁은 결국 국가의 파멸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호세아는 주전 753년 직전 예후 왕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면서 그의 사역을 시작했다(1:4).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스라엘의 경제적 우위와 국제적 명성은 퇴색하였다. 이스라엘은 사마리아의 급격한 정치변화로 인해 내적으로 불안을 겪었다(7:7, 8:4).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 의 정세는 아모스 때와 크게 달랐다. 아모스가 메시지를 전했을 때만 해도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상황은 안정권에 들어 있었다. 그때에는 비록 부패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부와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호세아가 활동할 때에는 앗수르가 이스라엘에 침략의 마수를 뻗치고 있었고, 나라 안에서는 서로 죽이는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호세아는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정복하기 직전에 선지자로 부름 받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0시의 선지자"라고 부른다. 살룸(주전 752년)은 한 달 동안 다스리고(왕하 15:8-15) 므나헴에 의해 살해되었다. 므나헴은 10년 동안 다스리며(주전 752-742) 앗시리아의 디글랏 빌레셀 3세(주전 745-727)에게 조공을 바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이스라엘은 무정부 상태가 계속되었다. 이스라엘의 말기인 주전 746-721년까지 근 25년에 걸쳐 무려 여섯 왕들(스가랴, 살룸,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 호세아)이 서로 뺏고 빼앗기면서 왕위에 올랐는데, 그들 중 네 명의 왕(스가랴, 살룸, 브가히야, 베가)은 혁명에 의해 살해되었다. 왕권의 무정부 상태는 사회 전역에 걸쳐서 거의 비슷한 양상으로 일어났다. 백성들은 모든 면에서 타락할 대로 타락했으며 법과 질서는 완전히 무시되었다.

 

  여로보암 2세가 죽은 해는 주전 746년이었다. 그리고 디글랏 빌레셀 3세가 앗수르의 왕권을 쥔 것은 그 이듬해(주전 745년)였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앗수르 왕들의 숙원에 하나였던 강대한 제국 건설(메소포타미아와 근동 지방)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진군의 나팔을 불었다. 이러한 앗수르의 움직임은 이스라엘과 애굽에 큰 위협이 되었다. 이스라엘과 유다 외에도 앗수르의 움직임을 눈치 챈 나라들은 모두 불안과 두려움에 떨었다. 당시 앗수르가 피점령국의 백성들을 얼마나 잔인하게 다루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포로들을 끌고가서 자기 나라의 전 지역에 흩어놓았다. 그리고 그들은 자국의 백성들을 선발해서 그 자리에 대신 채워 놓는 "이민 정책"을 사용했다. 그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피정복국의 민족성 자체를 말살시키려고 했다. 디글랏 빌레셀 3세는 바벨론의 통치권을 장악한 다음 메소포타미아 전 지역을 짓밟으면서 계속 지중해 방면으로 진격해 나갔다. 그리고 그는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서 아람과 이스라엘을 초토로 만들어 버렸다.

 이스라엘 왕 베가(주전740-732)는 아람(르신)과 정치적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베가는 유대 왕 아하스가 그 동맹에 가입하지 않는 것을 보고자(5:8-11), 아람과 연합하여 유다를 침공했다. 이때에 아하스는 앗시리아에 도움을 요청했으며, 이로 인해 앗시리아는 수리아-에브라임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아람을 공격해서 거민을 사로잡아 옮겼고 다메섹을 폐허로 만들었다. 그리고 앗시리아는 주전 732년에 이스라엘 경내에까지 군사력을 확장시켰다(왕하 15:29, 호 5:8-11). 앗시리아의 왕 디글랏 빌레셀 3세는 주전 732년에 호세아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고(5:13-14, 7:8-9, 8:9-10), 자율적인 정치 생활을 허용했다. 그러나 호세아가 이집트와 정치적 동맹을 맺음으로 앗시리아의 이익을 해치개 되자(왕하 17:4, 호 5:13, 7:11, 9:3, 11:5, 12:1), 앗시리아는 살만에셀 5세 때에 사마리아를 포위하고 멸망시키고 말았다.

 

  호세아와 고멜의 관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고멜의 불성실함은 이스라엘의 배교를 상징했고, 그녀의 자녀들은 죄의 열매와 여호와의 심판을 상징했다. 또 도망친 고멜을 다시 데리고 오는 호세아의 모습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상징한다. 비록 고멜이 호세아에게 신실하지 못했지만,

그는 다시 감옥에 가서 그녀를 데려왔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과정에서 생기는 모든 조롱과 수욕을 감수했다. 호세아는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보고 놀라도록, 자신의 결혼 생활 전모를 밝혔다. 고멜에 대한 그의 사랑은 배교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이러한 결혼 비유는 선지자 호세아의 심리학적 통찰을 요구했다. 그는 분명히 동시대인들에게 비난과 거부를 당했으며, 또한 결혼 생활 속에서도 많은 고통을 당했을 것이다(9:7-8).

 

아모스는 사회 전반에 걸쳐 만연된 불의와, 가난한 자들이 소수 권력층에 의해 착취당하는 현실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그러나 호세아의 메시지의 핵심은 달랐다. 그는 이스라엘이 왜 죽을 병에 걸리게 되었는지를 면밀히 진단했다. 이스라엘이 중병에 걸린 이유는 그들의 불신실함과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호세아는 장차 이스라엘을 찾아올 보았다. 장차 다가 올 이스라엘의 소망은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의 참상과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호세아는 그의 예언을 맺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과연 누가 알겠느냐고 부르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