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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136과)1.

Joyfule 2010. 8. 14. 06:29

 

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136과)1.

예레미야(4): 역사적 배경과 새언약 (21-33장)


2. 역사적 배경과 예레미야의 사역(21-29장, 34-45장)

 

  예레미야는 므낫세 왕이 유다를 다스릴 때에 태어났다(주전 696-642년). 므낫세는 친 앗수르 정책을 위한 문을 열었고, 모든 이교적인 제사 관습과 형식들을 받아들였다. 그는 외국문화를 받아들인 점에서 아합을 따랐으며, 어떤 점에서는 아합보다 더 나아갔다(왕하 21:11). 므낫세가 죽은 후에 그의 아들 아몬이 왕이 되었으며, 그는 2년 동안 유다를 다스렸다. 그리고 아몬이 죽은 후에 아몬의 어린 아들 요시야가 왕이 되어 유다를 통치했다.
 

1. 요시야

 

  요시야는(주전 640-609년) 앗수르 세력이 붕괴될 때에 유다를 다스렸다. 요시야는 여호와께 대한 열심과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종교 개혁을 감행했다. 그는 성전을 청결하게 했고, 이교의 제단을 파괴했으며, 하나님의 율법을 교육하고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이때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를 지적하고, 12지파에게 회개를 촉구함으로 개혁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요시야는 유월절을 기념하기 위해서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을 하나로 결속시켰다. 그리고 하나로 결합된 이스라엘은 이교의 제단과 산당을 파괴하는 일을 감행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요시야를 지켜 주셨고, 요시야는 다윗과 솔로몬이 다스렸던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34:608).

 

  예레미야는 요시야가 종교 개혁을 실시한 후에도 사역을 계속한 것으로 보인다(왕하 22-23장, 왕하 34:6-8). 그러나 종교 개혁은 요시야가 죽은 후(주전 609년)에 중단되고 말았다. 요시야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유다 백성들은 다시 부패한 옛 생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여호와를 떠났다. 예레미야는 요시야가 죽은 후에 약 23년 동안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그는 그때에 자신이 전했던 신탁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요시야의 개혁은 의도는 좋았지만, 백성들 속에 내면화 되기에는 부족했다. 그러므로 유다 백성들은 요시야가 죽은 후에, 금방 여호와께 대한 충성심을 버리고 말았다. 이때부터 예레미야는 계속해서 완고한 유다 백성들에게 계속적인 비판을 하기 시작했다.


2. 앗수르, 이집트, 그리고 바벨론

 

  예레미야는 유다 뿐 아니라 국제 상황에 대해서도 예언을 했다. 그는 앗시리아와 이집트의 쇠퇴를 증언했다. 요시야가 유다를 다스릴 때에 유다는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이때에 앗시리아는  자기 일로 인해 유다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그러므로 요시야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서 북쪽으로 유다의 영토를 확장시켰다.

주전 626년에 나보폴라살은 바벨론을 해방시키고 흔들리는 앗시리아를 압박했다. 그리고 메데인들은 주전 614년에 고대 앗시리아의 수도 아술(Asshur)을 점령했다. 마침내 주전 612년에 앗시리아의 수도였던 니느웨는 메데와 바벨론의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고 말았다. 주전 609년에 이집트 왕 바로 느고는 바벨론으로부터 앗시리아를 구하기 위해서 원정 길에 올랐다. 그러나 이집트도 신흥 세력인 바벨론을 막지 못했다. 그때에 요시야는 바로 느고가 앗시리아를 도우려고 원정하는 일을 막았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요시야는 전사하고 말았다(주전 609년). 그리고 이때부터 이집트는 유다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했다.

3. 여호아하스

 

  요시야의 뒤를 이어 유다의 왕이 된 사람은 여호아하스(또는 살룸(22:11))였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종교 개혁 정책을 계승하지 않았다. 여호아하스가 유다의 왕이 된 지 얼마 후에, 바로 느고는 유다에 과중한 공물을 요구했다(왕하 23:31-33). 그러나 여호아하스는 이러한 요구에 대해 크게 반발했다. 그러자 이집트 왕 바로 느고는 여호아하스를 유배시키고, 유다를 이집트의 부속 국가로 삼았다. 바로 느고는 여호아하스 대신에 여호야김을 부속 국가의 왕으로 앉혔다(대하 36:2,5). 이로 인해 요시야가 죽은 지 3개월 만에 유다는 독립을 잃고 말았다(렘 22:10-12).

4. 여호야김과 여호야긴 때에 주어진 예언

 

  선지자들은 전부터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가 될 것이라고 예고해왔다. 여호야김이 다스렸던 시기에는(주전 609-598년) 유다의 멸망이 가까웠다는 징조들이 많이 나타났다. 예레미야는 그때에 바벨론이 유다를 점령할 것이라고 예언했다(25:1,8-11,15-25). 주전 605년에 느부겟네살은 갈그미스에서 앗시리아와 이집트의 연합군을 전멸시켰다. 이때부터 이집트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46:2, 대하 35:20).

이 사건으로 인해 앗시리아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으며, 이집트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바벨론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느부갓네살의 군대는 계속해서 진군하여 블레셋을 점령했으며(45:5-7), 유다에게도 바벨론의 부속국가가 될 것을 강요했다(주전 603년, 왕하 24:1).

 

  그러나 여호야김은 바벨론의 멍에를 벗어버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여호야김에게 바벨론에 저항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이로 인해 예레미야는 민족주의 정신을 가진 유대의 지도자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유대 백성과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유다를 지켜주실 것으로 확신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유다가 멸망할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언약과 성전과 왕권이 유다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7:1-8:3, 26:1-24). 그러나 유다 백성과 지도자들은 "여호와의 전!"이 자기들을 지켜줄 것으로 믿었다(7:4).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들을 향해서 성전을 마술적으로 믿지 말고, 즉시 회개하고 금식하라고 권고했다.

 

  후에 예레미야는 바룩을 지도자들에게 보내서 자신이 지난 23년 동안 전하고 기록한 말씀(36:2)을 낭독하게 했다. 그는 이 글을 통해서 유다 지도자들에게 여호와를 신뢰하고, 그들이 행한 악에서 돌아설 것을 권고했다(36:3). 바룩은 예레미야의 지시대로 유다 지도자들 앞에서 예레미야의 예언을 낭독했다. 유다 지도자들은 그 예언을 듣고, 바룩을 여호야김 왕에게 데리고 갔다. 바룩은 여호야김 왕 앞에서 큰 소리로 예레미야의 예언을 낭독했다. 그러자 여호야김은 유다의 멸망을 예고하는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듣고 분노하여 그 기록을 불에 태워버렸다(36:11-24). 하나님은 여호야김의 행위를 보시고 즉각적으로 반응하셨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유다와 여호야김에 대해 전보다 더 심한 심판을 두루마리에 기록하라고 지시하셨다(36:29-31).

 

  여호야김은 예레미야를 제거하려고 했다(36:26). 그러나 소수의 유력한 친구들이 적극적으로 예레미야를 보호했기 때문에 그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26;24). 이 시기는 예레미야에게 견디기 힘든 시기였다. 그는 박해를 받았으며(12:6, 15:15-18), 음모의 표적이 되었고(11:18-23, 18:18), 매를 맞고 투옥되기도 했다(20:2). 그는 대중의 반감과 적개심을 참아내야만 했다(26:10-11). 이러한 고난의 사건들은 예레미야 입에서 탄식과 고백이 터져나오게 만들었다.

 

여호야김은 예레미야의 경고를(27:2-11) 무시하고 바벨론에 반기를 들었으며(주전 598년), 바벨론 군대가 그를 진압하기 위해 쳐들어왔다. 그러나 바벨론 군대가 유다에 도착하기도 전에 여호야김은 죽고 말았다(22:18-19, 36:30). 여호야김이 죽은 후(주전 597년)에 그의 아들인 여호야긴이 유다의 왕이 되어 3개월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왕하 24:8). 그 때에 바벨론인들은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여 성을 공격하려고 보루를 쌓았다. 결국 예루살렘 성은 바벨론 군대들에 의해 점령되었고, 성전을 그들에 의해 약탈당했다. 바벨론 군사들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에 왕과 지도자들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갔다. 이로 인해 유다에 대해 했던 예레미야의 예언은 모두 성취되고 말았다(렘 22:2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