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문 날의 부부 일기 - 유선진
아이고, 아닙니다요!
나는 매주 목요일에 광진문화원 춤 교실에 나간다. 그동안 배운 것을 연습하기도 하고 새로운 춤을 배우기도 한다. 끝나는 시각은 오후 4시 30분경. 한 시 반에 시작했으니 티타임 제하고 2시간 50분 동안 춤을 춘 셈이다. 팔십 노인인 나에게는 힘에 겹다. 집으로 돌아가 저녁밥 지을 생각에 몸보다 마음이 지친다. 밖으로 나오니 회원 몇몇이 웅성거리고 서 있다.
“왕언니, 저녁 잡숫고 돌아가세요.”
한 회원이 말한다. 집에 가서 저녁밥을 짓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들이다. 남편이 먼저 타계했거나, 아직 현역이어서 회식을 하고 오는 사람이거나, 며느리하고 같이 살아서 조석에서 놓여났거나, 밥을 안 해도 좋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매번 저녁을 먹고 헤어진다.
나는 잠시 갈등을 한다. 먹고 들어가? 그러고 싶다. 그들 무리에 합류한다. 그러자 매 끼니 때마다 밥에 국을 꼭 먹어야 하는 늙은 남편이 발목을 잡는다. 남들은 아침을 빵과 우유로 때우기도 한다는데 꼭 밥이라야 되는 남자. 외식이란 그의 사전에 없고 꼭 집밥이라야 되는 남자. 사 먹는 밥은 밥이 아니라 사료라나? 집밥만이 밥이라나? 뭐라나? 내가 팔목에 골절을 입고 지냈던 동안에도 꼭 두 번만 외식을 했었다. 새삼스럽게 울컥하고 화가 난다. ‘아유, 짜증 나!’ 나도 모르게 이런 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순간, 한 소리가 귀에 들려온다. 익숙한 목소리다. 내가 속을 끓이고, 불평을 할 때마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음성만 들리는 그 소리.
자식들이 미욱해 보여 낙담할 때 “너, 자식 때문에 슬픈 게 어떤 건지 보여줄까?” 잃은 돈 때문에 가슴앓이할 때 “너, 다 잃어버리면 어떤지 겪어볼래?” 번번이 나를 겁박하던 그 목소리가 귀에 또 들리는 것이다. “오냐! 너 말 한번 잘했다. 정말 짜증이 뭔지 알게 해주랴?”
밥을 해놓으면, 맛이 있든 없든 꿀같이 먹는 사람. 소화를 쑥쑥 시키고, 배설도 잘하고, 제 발로 잘 걸어 다니는 사람, 한번 잠들면 둘러메고 잡아가도 모르게 깊은 잠을 자는 사람. 밥 좀 하는 걸 갖고 이런 사람이 짜증나고 힘들다면 정말 힘든 것, “한번 당해 볼래?”
나는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친다. 내 상상력이 비약을 한다. 그가 혼자 서지를 못해 부축을 해야만 일어난다. 입으로 흘러 넣어주지 않으면 음식을 먹지 못한다. 내가 24시간 시중들고 지키고 있어야 한다. 아니, 여든다섯 살의 그에게 밥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아주 없어질 수도 있다.
“아뇨, 아뇨, 아이고 아닙니다요. 밥하러 갈게요. 밥하는 것, 제엘루 좋아요.”
나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저녁밥을 지었다.
삽화 하나
어젯밤 11시 넘어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자정 가까이에 걸려오는 전화는 가슴을 철렁하게 한다. 그래서 긴장하게 된다. 큰아들이다. 목소리가 차분하니 일단 안심이다.
“어머니, 내일 12시 <삿뽀로>에 점심 예약했어요. 모레면 개학이잖아요?”
아들네 집은 잠원동이고 우리 집은 신사동이다. 아들은 방학이 아니라도 매주 거르지 않고 제 부모를 청하여 밥을 같이 먹는다. 장소는 주로 잠원역의 식당가, 아니면 신사역 주변의 먹자골목이다. 쉽다면 쉬운 일이겠으나, 일부러 시간을 내어 늙은 부모에게 자기를 보여주는 일이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다.
일식집 <삿뽀로>는 잠원역 근처의 음식 빌딩인 파스텔 건물 2층에 있다. 그리 과하지 않은 값이고 또 노인들인 우리 위(胃)에 부담이 없어 남편이 좋아하는 집이다. 아들은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해 나간다. 오늘은 중국 이야기. 인도 이야기, 티베트 그리고 달라이라마…. “저런, 저런…. ”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추임새를 넣는다.
파스텔 정문을 나서서 작별인사를 하고 나면 아들은 오른쪽 방향의 제집 쪽으로 걸어가고 우리 내외는 왼쪽의 지하철 잠원역을 향해 간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남편이 망부석처럼 우뚝 제자리에 선다. 아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178cm의 키에 떡 벌어진 어깨. 성큼성큼 걸어가는 모습을, 두 다리가 둥글게 휘어서 4cm가 줄어든 161cm의 단구(短軀)의 아버지가 명화의 마지막 장면을 감상하듯이 감동에 겨운 눈으로 하염없이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가물가물 마지막 모퉁이로 아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저 녀석은 어찌 아는 게 그리 많누?” 눌변의 아버지가 말을 한다.
“지하철 한 정거장. 우리도 걸어갑시다.”
내가 말했다. 무언지 모르게 가슴 먹먹한, 충만한 것도 같고 애잔한 것도 같은, 괜스레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질 것 같은, 아련한 애상 한 자락에 그대로 잠겨 걷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 한낮에? 더워서 나는 싫군!”
맞아요, 당신이 보행에 어려운 것을 내가 깜빡했네. 말을 하려다가 정색을 하고,
“당신과 나의 인생이 온통 실수투성이 시행착오였다 해도 건진 것도 있나 보오.” 말을 했다.
웬 일인지 오늘은 바람이 제법 시원하다. 보기에 따라서는 모두 실패한 것도 같고, 요즘 말로 루저 같기만 한데 또 보기에 따라서는 그것이 모두 축복 같기도 한 것. 그것이 인생인가?
MIRACLE
여름이 되면 제일 괴로운 것이 모기이다. 우리 집은 공원 밑에 있고, 집집마다 나무가 무성해서인지 모기가 많다. 모기약 가지고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모기장을 치고 잔다. 남편이 쓰는 안방에는 텐트 형을 세워 놓았고, 내 방 침대 위에도 모기장을 설치했다. 모기장을 치면 바람의 80%만이 통과된다고 하는데 그것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사정이다.
유난히 덥다. 에어컨도 켜지 않은 방의 모기장 속에서 잠결에도 더위에 몸을 이리저리 굴렸는지 그만 침대에서 쿵하고 떨어졌다. “큰일 났구나.” 가슴이 철렁했다. 나의 사촌 하나는 침대에서 떨어져서 쇄골에 금이 가 고생을 많이 했고, 여고 동창생 부군 역시 침대에서 떨어져서 대퇴골에 골절을 입고 그 이유로 세상을 떠났다.
침대로 다시 올라오는데, 몸에 별 이상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휴, 천만 다행이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이미 잠은 놓쳤고, 텔레비전을 틀어 스포츠 중계를 보다가 아침 녘에 곤한 잠에 빠졌다.
“여보, 일어나. 일어나. 아침밥 안 해?” 남편이 흔든다. “아침밥?”슬그머니 화가 난다.
이 염천에도 꼭 밥을 먹어야만 되는 그가 밉살스럽다.
“나, 오늘 새벽에 침대에서 떨어졌단 말에욧!”
“침대에서? 당신 친구 남편은 침대에서 떨어져 죽었잖아? 그런데 당신은 왜 안 죽었지?”
왜 안 죽었지, 라니? 어이가 없었다. 그럼, 마누라가 죽었어야 좋았단 말인가? 혼자서는 냉장고의 반찬도 꺼내 먹지 못하는 사람이면서?
“MIRACLE!” 내 입에서 나온 탄식의 소리다. 침대에서 떨어진 아내가 멀쩡한 것이 너무도 다행이어서 “천행이구나.” 하는 마음을 “왜 안 죽었지?”라고밖에 표현 못하는 그 언어 구사력을 가지고 네 아들들을 공부시키고, 마누라에게 어디 가서 돈 꾸어오게 하지 않고 살게 한 저 남자. miracle 그 자체가 아닌가?
나의 “miracle.” 소리를 듣자 이 남자 그제야 자기도 “miracle.” 하면서 멋쩍게 웃는다. 아내가 탄식했던 “miracle.”의 의미는 평생을 가도 모르리라.
-<에세이문학> 겨울호 -
'━━ 감성을 위한 ━━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웃 오브 아프리카 - 정성화 (0) | 2015.02.13 |
---|---|
폭설을 기다리며 - 구활 (0) | 2015.02.11 |
꿈꾸는 그릇 - 박은숙 (0) | 2015.02.08 |
역 - 황인숙 (0) | 2015.02.06 |
군불을 지피며 - 정원정 (0) | 2015.0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