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에세이

저물녘의 독서 - 최민자

Joyfule 2015. 7. 15. 13:08

    저물녘의 독서 - 최민자

 

 

스마트 폰이 부르르 떤다. 딸애의 호출이다. 외출할 일이 있으니 아기를 잠깐 맡아 달라 한다. ‘기본임무수행을 제한받고 명령에 의해 지정된 지역으로 즉각 출동해야하는’ 비상사태, 이쯤 되면 내겐 ‘진돗개 하나’다. 읽던 책을 던져두고 부리나케 일어선다.

 

  생후 6개월, 쌀 한말 무게도 안 되는 아기는 진즉부터 힘이 천하장사다. 삼십 년 가까이 한 동네 붙박이로 살던 나를 제 집 옆으로 끌어다 붙일 만큼 태어나기 전부터 괴력을 과시했다. 임신 후반, 예후가 좋지 않아 절대안정을 요하는 산모 때문에 왔다 갔다 하다가 이사까지 해버렸다. 사시장철 싸매 다니던 제 어미 젖가슴을 손 하나 까딱 않고 풀어헤치더니 멀쩡했던 내 팔목 인대마저 눈 한번 흘기지 않고 늘어뜨려 놓아 한의원 신세를 지게 했다. 한때는 분명 여성전용이었을, 늙도 젊도 않은 사내 하나를 얼렁뚱땅 유아용으로 전락시켜놓고 시시때때 헤벌쭉 웃게 만드는 녀석도 이 연약한 네발짐승이다.

 

  이제 한창 뒤집기에 재미를 붙인 녀석은 한시도 가만히 누워있지 않는다. 꾀부리지 않고 연습에 전념하는 운동선수처럼 내려놓자마자 고개를 외로 틀고 뒤집기 한판을 단숨에 시도한다. 기지도 못하면서 날기부터 하려는지 팔다리를 위로 치켜 올리고 끙끙거리는 모습이 젖은 날개 털어 말리는 햇 잠자리 같기도 하고 이륙을 꿈꾸는 비행물체 같기도 하다. 부릉부릉, 부르릉. 애써 용을 쓰며 기어를 넣어 봐도 바닥에 붙은 배가 떨어지지 않는지 머리를 짓찧고 칭얼거린다. 아기는 울고 나는 웃는다.

 

  얼핏 보기엔 노는 일 같아보여도 아기 보는 일만큼 힘든 노역도 없다. 해맑은 동심이니 천사 같다느니 하는 말은 과장된 오해이고 상투적 편견일 뿐, 아기들은 지독한 이기주의자다. 저에게만 집중하고 저만 바라봐 달라고 한다. 잠시 한눈을 팔았다가는 일껏 봐준 공은 고사하고 죄인이라도 된 듯 쩔쩔맬 일도 생긴다.

 

  아기가 장착한 최강의 무기는 무능력이다. 침묵이 때로 웅변보다 세듯, 무저항이 최고의 저항일 수 있듯, 철저하게 의존적일 밖에 없는 아기는 타고난 무능으로 온갖 권능을 제압한다. 공격은커녕 방어 능력 하나 갖추지 못한 벌거숭이아기가 사지를 버둥거리며 울어재낄 때, 해맑은 웃음 사이로 유리알 모음들을 옹알거릴 때, 어떤 간 큰 냉혈한이 모른 척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무능력이 초능력, 무위이무불위(無爲而 無不爲)다.

 

  아기를 안고 가만가만 어른다. 잠투정을 하듯 칭얼대던 아이가 거실을 몇 바퀴 맴도는 사이 제풀에 지쳤는지 그예 눈을 감는다. 바닥에 눕히려 내려놓으니 화들짝 놀란 팔이 허공을 휘젓는다. 꼬물거리는 손안에 내 손가락을 가만히 밀어 넣고 잠든 아기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하얗고 따스하고 여릿여릿한 손가락들과 투박한 내 손가락의 접지(接指). 뭉클하다. 아니 찌릿하다. 내 안에 축적된 시간의 입자들이 미세한 전하(電荷)로 활성화되어 아이의 몸속으로 흘러드는 느낌이다. 알 것 같다. 시간을 왜 흐른다고 하는지, 시간이 흘러 어디로 가는지.

 

  아기는 우유로 크는 게 아니다. 하루 대여섯 번 빨아 삼키는 허여멀건 소젖 몇 병이, 여물이나 배합사료를 되새김해 걸러낸 밍밍하고 슴슴한 송아지용 먹거리가 인간의 얼굴에 햇살 같은 웃음을 피워내고 태양을 향해 꼿꼿하게 마주서게 할 리 없다. 출하된 지 오랜 생명캡슐 안, 미토콘드리아인지 원형질 어디에 용해된 채 스며있던 장구한 시간의 침전물들이 안고 업고 재우고 다독이는 몸과 몸의 잇닿음을 통해 새 캡슐 안으로 흘러드는 걸 거다. 눈에서 눈으로,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이되는 열정과 욕망의 쿼크입자들이 울고 웃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의 꼴을 갖추게 하는 거다. 물이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흐르듯이. 타고남은 재가 기름이 되듯이.

 

  싹트고 자라 꽃피우고 열매 맺기. 사는 일이 거기까지인 줄 알았다. 가지에 달린 열매가 나무에게는 최종 소출이지만 땅에 떨어지면 그 또한 씨앗이 된다는 사실을 오불관언 간과하며 살았다. 씨앗 속에 열매가 있고 열매 안에 씨앗이 있다. 씨앗과 열매의 몸바꿈 속에 시간이 흐르고 지구가 돌아간다. 살아 숨 쉬는 존재들 사이를 관통하는 이 내밀한 시간의 낙차(落差), 마법이다. 신의 한 수다.

 

  종이책이 생겨나기 전부터 인간들은 태양과 달의 운행을 읽고 별자리와 바람 냄새와 계절의 변화를 읽었다. 생각에 깊이와 폭을 더하고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방편으로 책읽기는 여전히, 영원히 유효하다. 약해진 시력과 체력 때문에 책상 앞에 자주 앉지는 못하지만 크게 마음 쓰진 않으려 한다. 안으로의 깊이와 밖으로의 소통을 모색하는 인식이 활자들의 숲에만 있을 리 없다. 자연과 우주의 순환이치를 존재 자체로 각성시키는, 아기는 무자서(無字書)다. 숨 쉬는 경전(經典)이다. 돋보기 없이 읽히는 황혼의 그림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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