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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님과 막내동서 - 고정숙

Joyfule 2015. 7. 16. 11:35

겨울의 초입에 만난 시골길 걷기 여행...>전남 장성<  이모님과 막내동서 - 고정숙

 

 

내가 처음으로 전북 남원에 사시는 이모님 댁을 방문한 것은 60년 대 스무살 갓 넘은 나이에 겨울방학을 맞이하고서였다. 일찍 출발했으나 영암에서 광주, 순창을 거쳐 임실 오수 행 버스에 올라서니 이미 날이 저물고 있었다. 옆 좌석에 앉은 어른께서 걱정을 하시면서 오수에 도착하면 소재지에 있는 李씨 친척 이 의원으로 가서 자고 아침에 신기리 마을에 가야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 당시에는 전화도 택시도 마을버스도 없던 때라 이 밤중에 시골길을 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어른께서 일러주는 대로 이의원에 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간호사들 자는 방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요즘 같은 험한 세상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섬뜩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버스 안 에서 만난 친절한 그 어른이 아니었다면 어찌 할 뻔 했을까....


아침 눈을 뜨자마자 동네 앞으로 냇물이 흐르는 시골 뚝방길을 따라 십리쯤 걸어가서 동네 맨 윗집 이모님 댁을 찾아갔는데 마침 시어머님 상중(喪中)인지라 아침상식(上食)을 드리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이모님 댁에서 며칠을 지내게 되었다. 이모님의 막내 도련님인 지금의 남편이 서글서글한 눈매와 커다란 키에 한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 매우 듬직하고 젊잖아 보였다. 그는 사돈처녀와 내외(內外)를 한다고 안방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머뭇거리고 안채에 들어오지도 못하는 도련님을 보고 아직 어린애인데 무슨 내외냐고 하시며 들어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사돈 도련님은 안방으로 들어와 화롯불에 군밤을 구어 주기도 하고 머리를 맞대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는데 다 큰 처녀 총각이 그만 그 일을 시작으로 편지를 주고받다가 연인 사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후 2년이 지나 결혼 말이 오고 가고 시아버님께서는 어떻게 그런 혼인을 할 수 있느냐고 반대하실 때 이모님께서 부모 없이 컸으나 뼈대 있는 집안에 조부모님 밑에서 잘 큰 아이라고 중간역할을 잘 해주셔서 어렵사리 결혼이 성립되었다. 이질녀를 막내동서로 맞아들인 후 철없는 나를 감싸느라고 어려움이 많으셨을 터이고 나는 아무 두려움도 없이 이모님 곁에서 부모사랑을 받지 못한 서러움을 잊고 살아 갈 수 있었다.


남편 복이 없으면 자식복도 없다는 말이 있듯이 이모님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사업 실패를 거듭 하는 동안 그 조카가 남편에게 보증을 서 달라고 사정하는 바람에 보증을 서 준일이 월급 차압까지 당하게 되는 위기에 까지 가고 퇴직할 당시는 수 천 만원이 빠져 나가서 퇴직 후 집 한 채도 지니지 못하고 살아왔다. 이 조카와 나는 이종사촌간인지라 내가 나서서 보증을 서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 일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가세가 기울어 조카는 종갓집 땅과 집을 남의 손에 넘기고 육촌 당숙 덕분에 직장을 얻게 되었으나 불행하게도 근무 중 뇌졸중으로 쓰러져 평생 장애인으로 살게 되어 지고 말았다. 그러나 조카는 산재연금으로 질부는 단지 내 마트운영을 하면서 4남매를 잘 키워내고 있었지만 빚에 쪼들린 생활은 여전해서 항상 이모님은 자식 걱정만하고 살아오셨다.


내 아이들이 큰엄마라고 부르는 이모님, 결혼 후 6.25 사변이 터져 한 살 박이 아들만 남겨두고 생사도 모르게 이모부와 헤어지고 종갓집 맏며느리로서의 삶을 살아오면서 시할머니, 시고모, 시누이, 시동생 나중에는 홀로 되신 시아버지까지 모시고 살아오신 이모님,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노후에 혈압과 당뇨 합병증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요양병원에 가시기 전에 육 개월 동안 함께 모시고 있었던 것이 마지막이었던가 싶다. 요양병원에 가기 싫어하시는 걸 몸이 성치 않은 아들 곁에 며느리 눈치보고 있지 말고 요양병원에 가셔서 편히 계시라고 부추겨 드렸는데 마음 작정하고 가시더니 그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침대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그나마 일어나지도 못하고 85세에 돌아가셨다. 고생만 하시다가 떠난 자리엔 아들과 며느리 듬직한 손자 셋과 손녀딸 사위 등. 많은 후손을 남기고 가신 뒷모습이 결코 쓸쓸하지 않았다.

 
조카가 우리에게 손해를 끼친 일은 아버지도 없는 조카이고 사정상 별 수 없는 일이라서 우리는 이미 포기하고 있었지만 명절이 지나가도 어머니를 몇 개월 모시고 있어도 죄송하다 감사하다는 말 한번 없는 데에 평소 괘씸하게 여기면서 살아왔었다.

 

그런데 이모님 장례 후 조카와 질부가 어머니 마지막 가시는 때 참여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전화가 왔다. 말 한마디로 천량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듯이 이렇게 감사하다는 말, 죄송하다는 말에 괘씸하게 생각했던 응어리가 내 핏줄이기에 따뜻하게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을....,

이모님이 돌아가시면서 우리 부부에게 꼭 하고 싶은 말 “우리 아들 며느리를 용서해라” 이 말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니 울컥해 온다.

“네, 이모님, 이제는 용서했습니다.”

하늘나라에 계신 이모님께서도 이제는 편안하게 안식을 누리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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