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 장. 예수님의 기도생활 -
2. 하나님을 뵙는 생활
기도생활은 예수님의 일과로써 그가 일상 생활에서 항상 지나고 계시던 일면이었다. 이 사실에 대한 증거는 모든 복음서들의 거의 매 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온 세상이 아직 잠든 새벽 오히려 미명에 기도하시기 위해 일어나셨고,그의 영혼이 지치도록 쉴새 없는 고된 하루가 끝난 후에 하나님과 함께 온 밤을 지새우셨다(막 6:46). 또한 무리가 그에게 몰려와 그의 조용한 것을 방해하며 그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예수님의 도움을 받으려고 아우성일 때 예수님께서는 잠시나마 하나님 아버지의 손을 붙잡기 위해 그의 마음과 생각을 하늘로 향하셨다.(막 7:34).이러한 사실이 각 복음서의 매 장마다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기도생활 대부분이 열 두제자는 물론 가장 가까왔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까지도 모를 정도로 은밀한 것이었고, 따라서 어느 복음서에도 기록되지 않은 사실은 덧붙여 생각해 볼 때 예수님에게 있어서 기도란 단순히 그의 생활에 중요한 일부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생활 자체였으며, 바로 그의 존재의 호흡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사실은 우리 인간들의 기도를 방해하고 질식시키는 요소들이 그리스도 앞에서는 전혀 힘을 쓸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예컨대,예수님의 기도생활은 결코 기분에 좌우되지 않았다.물론 예수께서도 감정의 변화를 겪으셨다. 예수님은 결코 감정 없는 금욕주의자(stoic)는 아니었다. 예수님은 기쁨과 슬픔,웃음고,눈물,황홀한 기쁨이나 피로에 지치는 일도 겪으셨다. 그러나 그의 온 마음은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마치 지남침이 북쪽을 가리키듯 언제나 기도로 향하셨다. 기도는 천지간에 그가 가장 사랑했던 그분과의 교통을 의미했다.
예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열렬히 사랑했기 때문에 그와 떨어져 있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하셨으며, 밤이나 낮이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가 사랑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드리셨다. 감정에 움직이는 기도는 생활의 실패를 초래한다. 기도생활의 실패는 예수님을 본받지 않은데서 초래된다. 예수님의 기도는 한번도 실패가 없었으며, 감정이나 환경에 좌우되지 않았다. 즉 기도의 실패는 사랑의 붕괴를 나타내는 징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명하시기를 하나님께 나아가서 우리의 사랑을 바치라고 하신다.
보통 기도생활을 질식시키는 또 하나의 요소는 사람들의 분주함이다. 매일 매일이 할 일들로 가득차서 기도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이럴 경우 종종 일 그 자체가 기도라든지 혹은 성실기도 중 하나이며,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는 시간이 밀려나는 것쯤 그리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등의 변명을 구실로 내 세운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라. 우리의 나날이 바쁘고 할 일이 많은 것처럼 예수님의 나날은 더욱 그러했다. 마가복음의 처음 몇장을 읽어보라.거기서 예수께서 그 사역 기간중 보내신 전형적인 나날,즉 매우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나날의 모습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연구해 볼 때, 어떻게 한가지 일이 끝나면 또 한가지 일이 쌓이며, 병든 자와 상한 죄인들이 어떻게 밤늦게 그에게 나아와서 모두 도움을 받고 떠나갔는가를 살펴 볼때, 과중한 힘의 사용과 소모로 그의 힘이 그에게서 모두 빠져 나가는 것을 거의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된 날일수록 예수께서는 더 많은 시간을 기도로 보내셨다. 그 앞에는 구원해야 할 세상이 있었고, 그 혼자만이 구원자가 되실 것이었다. 인간의 사상과 도덕에 있어서 철저한 혁명이 이루어져야 했다.
그리고 그 혁명의 도구로는 그 자신의 몸과 영혼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꾼(toiler)이었던 그는 또한 시간마다 하나님을 뵙는 일에 있어서도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모범이 되셨다. 일 자체가 기도란 변명에 관해서 이야기 한다면 비록 그것이 조금도 틀림없는 말이기도 하지만 일로 하여금 기도를 대신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예수께서 결코 찬성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명령과 그 실천의 요점은 아무 것도 기도를 대신할 수는 없다는 이것이다. 사람의 생활이 아무리 바쁘다 할지라도 문을 닫고 무릎을 꿇을 시간을 만들어야 하며, 또한 분명히 그렇게 할 수 있다.
종종 기도를 방해하는 또 다른 요소는 인간의 조급함이다. 그들은 첫번째 노크에 문이 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문이 열리지 않을 때는 문두드기를 그치고 돌아서 버린다. 예수님의 경우는 이것과 얼마나 다른가!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에 대하여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과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말하고 있다(히5:7).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그 뜻 만은 분명히 나타나 있다. 즉 예수님에게 있어서 기도는 그의 마음과 뜻과 혼의 전힘을 기우리는 투쟁적이고 심각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한 밤중에 이웃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 관한 위대한 비유에서 비쳐나오는 것과 꼭같은 진리이다(눅11:5이하).예수께서는 그를[염치없는 자](5절)라고 부르고 있으나 바로 그 다음에서 그의 염치없음을 칭찬하고 계신다.
사실상 그는 [그러한 것이 바로 기도의 정신]이라고 말씀하신다. [거절하지 못하게 하라! 다시 두드리라! 하늘 의 문을 두드리라!] 물론 예수께서 하나님이 주시기 싫어 하신다거나 그의자녀들의 부르짖음에 대해 인색하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은 결코 아니다. 그가 뜻 하신 바는 마음 내키지 않는 냉담한 기도는 무익한 것보다 더 나쁜 것이며, 하나님의 응답은 때때로 인간의 극성스러움이 그의 진지함을 증명하는 때라야 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나아와 그로 하여금 거절하지 못하도록 간청하는 사람들 즉 떠나기를 거절했다 수로보니게 여인(막 7:25이하).어떠한 위협과 제지에도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외침을 그치지 않았던 길가의 소경 바디매오(막10:46),길이 막힌 것을 알고도 실망하여 떠나지 않고 지붕을 뜯었던 사람들(막2:4이하)에 대해 예수께서 항상 특별한 사랑을 가지셨던 것은 여기에 하나님께 통할 수 있는 바로 그 정신이 있었고 참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조급함은 기도에 있어서 금물이다.
끝으로 도덕적 난제(difficulties)들이 때때로 인간의 기도를 저해한다. 하나님과의 교통은, 우리 자신의 생활속에 우리가 직면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어떤 도덕적 결정이 미해결로 남아 있게 될 경우 필연적으로 약화되며, 비현실적으로 되어간다. 온전한 도덕적 순결의 배경은 기도의 첫째 가는 요소이다. 예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라야만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전기학자는 자동적으로 접촉을 단절하여 전류를 끊는다는 뜻으로 절연체라는 물질에 대해 말하고 있다. 죄는 하나님과의 접촉을 단절하는 절연체이다.
시편 기자는[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편66:18)라고 말하고 있다.이것이 기도 문제에 있어서 우리에게 생기는 대부분의 문제의 근원이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명백히 이것이 기도를 저해하는 요소라 되지 못했다. 모든 점에 있어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당하셨으나 예수님은 그의 영혼을 죄의 그림자에서부터 깨끗하게 지키셨다.마음의 순결은 하나님을 본다. 그리스도의 비교할 수 없는 순결이 항상 끊임없이 하나님을 뵈었다.
아무 것도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그리스도의 접촉을 끊을 수 없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의 기도를 방해하고 질식시키는 것들이 전혀 그리스도를 지배하지 못했음을 알았다. 기도는 그가 일상 생활에서 항상 지니고 계시던 면이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첫번째 중대한 사실은 이것이다. 이제 그 두번째로 넘어가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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