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엘 비키·랜들 페더슨,
청교도를 만나다(청교도인물&명저 백과사전), 부흥과 개혁사
1971년 청교도주의와 그 기원
로이드 존스가 청교도 신학에 젖어든 과정;
그는 웨일즈 칼빈주의 메소디스트 교회에서 자랐다. 그들의 역사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이 운동의 지도자들이 청교도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책을 대단히 열심히 탐독했다. 그들은 청교도들의 책을 인용했고, 때로는 그들의 설교를 뽑아 도용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진정한 관심은 1925년 우연히 리처드 백스터의 전기를 읽은 데서 비롯되었다. 그때부터 청교도와 그들의 저작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생생한 호기심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제까지의 사역 전체가 이것에 의해 좌우되어 왔다고 솔직히 고백한다. 이런 관심을 더욱더 부추긴 것은 조나단 에드워즈를 발견한 일이었다. 그분의 책을 읽으면 누구든지 그와 동일한 자료들을 다시 읽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어느 것도 청교도주의처럼 참된 말씀 사역을 격려하는 것은 없다. 그들은 그 면에서 뛰어난 모범이었기 때문이다.
청교도주의는 1524년 윌리엄 틴데일에게서 최초로 모습을 내러냈다고 주장한다. 내픈의 <튜더왕조 시대의 청교도주의>에 동조한 것이다. 청교도주의는 일종의 사고의 형태이다.
청교도주의는 태도요 정신이다. 틴데일은 감독들의 승인이나 재가를 받지 않고 성경을 번역하여 출판했다. 이것은 당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청교도주의가 쏜 첫 사격이었다. 그는 또 왕의 승낙 없이 영국을 떠났다. 이것 역시 비상한 행동이었고 당국자들의 눈에는 지극히 비난 받을 만한 일이었다. 성경을 번역하여 출판하고 싶은 열망에서 한 일이었다. 그는 독일로 가 루터 등의 도움을 얻어 위대한 일을 마무리했다.
이 두 행동들은 당국의 태도에 대한 청교도의 전형적인 자세로 계속 이어졌다.
이것은 전통이나 권위의 문제보다 진리를 앞세우는 것을 의미했다.
자기가 진리라고 믿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길 자유를 고집하는 것이었다.
틴데일 시대로부터 이 정신, 이 자세, 이 사조가 계속 드러났다. 헨리 8세는 오직 한 가지 일에만 관심을 쏟았는데, 그 일이란 아내와 이혼하고 재혼할 길을 찾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교황과 그 권위를 제거하고 자기 자신이 영국 국교회의 머리가 되기를 원했다. 헨리 8세의 카톨릭 형식으로 돌아가려는 변덕스런 여러 가지 조치들은 전형적인 청교도적 자세를 다시 한번 자극하여 드러나게 하였다. 이로 인해 프로테스탄트 신앙 진리를 확신했던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일었다. 크랜머 등은 잉글랜드에 머물면서 그 모든 조치에 복종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 조치에 불복하여 영국을 떠나 대륙으로 건너가야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일스 커버데일(성경 번역으로 유명한 사람)과 존 후퍼, 힐스 등이었다. 이 사람들은 대륙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그들은 불링거의 영향을 받았고, 취리히에서 가르치고 있었던 츠빙글리와 제네바의 존 칼빈 등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츠빙글리는 매우 급진적인 개혁자였다. 그는 의식 문제나 성직자의 복장 문제에 있어서 아주 결연한 자세를 보여 그것을 다 바꾸어 버렸다. 이 잉글랜드 사람들은 이러한 영향을 크게 받아 로마 카톨릭 교리에 반대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이 가르치는 교훈의 오류에 눈을 떴고 그것을 반대하고 배격했다. 그러나 이제 이 대륙의 영향을 받으면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종교적인 의식주의를 반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종교 개혁이 불완전하며, 단순히 교리를 바꾸고 거짓된 로마 카톨릭 교훈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은 실제 차원에서도 이행되어야 하며,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종교 개혁이 불완전하다는 생각,
이것이 바로 청교도주의의 핵심적이고 가장 특징적인 요점이다.
그들은 누가복음 9:62에 나오는 우리 주님의 말씀을 자주 인용했다. 쟁기를 손에 잡은 자는 뒤를 돌아다보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일을 완성할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고 강조한 데서 그들이 어떤 태도를 가졌는지를 명백하게 볼 수 있다. 이 사람들은 잠시 후 영국에 돌아와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헨리8세가 즉위하고 있는 동안 내내 큰 핍박을 받았으므로 대륙으로 오고가는 일이 많았다.
이 사람들의 영향력과 그 가르침이 보다 더 개방적으로 나타난 것은 에드워드 시대였다.
에드워드 통치 시기에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교회 정치관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국 국교회주의의 관점은 진보적인 관점이요 발전적인 관점이요 전형적인 “카톨릭적” 관점이다. 반면에 청교도의 관점은 이러한 것들은 신약성경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정적 관점이다. 국교회에서는 언제나 이 점진적이고 진보적인 사상, 즉 교회는 그 체험과 지혜로 계속 발전해 나가고 성경의 교훈을 새롭게 인식해 나간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 개념은 교회 정치와 의식의 문제에 있어서 발전과 첨가를 가져온다. 반면에 청교도들은 “아닙니다. 가르침은 신약성경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문제에 대한 의견 충돌은 필연적으로 특히 감독에 대한 관점에 차이를 가져왔다.
감독은 지금까지 행해 온 방식대로 계속 통치할 권한을 갖고 있는가? 청교도는 이것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면서 대륙의 교회 통치 형태를 선호했다.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사람들이 대륙에 갔었느냐 가지 않았었느냐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크렌머도 리들리도 래티머도 잉글랜드 밖을 나간 적이 없었다.
메리 여왕 시대로 오면 이것은 더욱 분명해진다. 그녀는 1553년부터 1558년까지 통치했는데, 참된 프로테스탄트들은 대륙으로 도망쳤고, 잉글랜드에 남아 있던 래티머 리들리 크랜머 같은 사람들은 사형에 처해졌다. 윌리엄 휘팅엄(William Whittingham)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잉글랜드 교회를 위한 예배 모범을 작성했다. 그는 연도(Litany, 일련의 탄원기도로 사제 성가대 등이 선창하고 신자들이 응답하는 형태임)를 빼고, 예배시에 중백의를 입지 못하게 했다. 사람들이 교회에 입교하려면 먼저 믿음을 고백하도록 한 하나의 훈련 체계를 도입했다. 그는 목회자나 감독, 설교자, 장로, 집사들을 임명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이 추방자의 교회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회집되었고 출석하는 거의 모든 예배자들은 이것을 받아들였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리처드 콕스였다. 휘팅엄은 이 계획서를 작성하였고 존 녹스는 이 교회의 목회자로 지명되었다. 문제는 콕스와 녹스 두 인물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콕스는 강한 사람이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반대하면서 “저들은 영국에서 행한 것같이 행한다. 저들은 영국 교회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 존 녹스는 “주께서 그 교회에 그리스도의 교회의 얼굴을 가지도록 허락했다.”고 했다. 여기서 영국 교회 대 그리스도의 교회, 여기서 국교도와 청교도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발견한다.
결국 존 녹스는 프랑크푸르트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어 제네바로 갔는데, 칼빈이 그를 받아들이고 인정했다. 그곳에서 그는 후에 스코트랜드 교회에서 꽃을 피우게 된 많은 교훈을 배웠다.
영국에서는 주목할 만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보편적으로 성직자 계층 밖에 있는 사람들이 런던에서 작은 교회들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런던은 특히 16-17세기에 매우 큰 도시였으며, 메리 여왕 때는 독립파 교회들이 일어났다. 이 교회들은 후에 미국으로 건너간 필그림 파더(Pilgrim Father) 중 한 사람인 윌리엄 브래드쇼(William Bradshaw)에 의해서 자주 언급되었다. 그는 뉴잉글랜드에서 하던 일은 메리 여왕 시대에 영국에서 있었던 일의 연속이라고 지적했다.
1558년 여왕 엘리자베스가 즉위했다. 새 여왕은 이복 자매인 메리 여왕과는 달리 참된 프로테스탄트였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들은 곧 깊은 절망에 빠져들었다. 엘리자베스는 곧 자기 주장을 하며, 자기는 영국 국교회의 최고 통치자이며 감독 지명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초기에 반대했던 의식들을 그대로 보존시킬 것을 주장했다.
대륙에 함께 있었던 프로테스탄트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전형적인 국교도인 파커 대주교 리처드 콕스. 에드먼드 린달, 존 주웰 등은 그들이 만일 공직을 거부한다면 엘리자베스는 그들 대신 로마 카톨릭을 취할 것이라고 했다. 자신들은 복음을 전파할 자유가 있고 교리도 바르므로 만일 이러한 의식들에 대한 태도 때문에 교회 내에 있는 공직들을 거부한다면, 자기들의 영역을 카톨릭교도들에게 넘겨주는 격이 되고 교회 전체는 참된 프로테스탄티즘을 버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청교도들의 견해는 달랐다. 토머스 샘슨, 마일스 커버데일, 존 폭스, 로렌드 험프리, 레버 등은 여왕을 반대했다. 그들은 “그 안에서 이겨내자”는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늘날도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수동적인 저항 자세를 취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은 잘못된 자세라고 생각했다. 의식들과 다른 문제들은 그들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들은 계속 투쟁해 나갔다.
1563년에 유명하고 중차대한 “성직자 회의”가 있었다. 청교도들의 주장은, 교회 예배 의식에서 제네바식 가운을 사용하고, 대신 중백의를 벗자는 것이었다. 중백의는 카톨릭의 유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반대한 것이다. 성찬식 때 무릎을 꿇는 것도 폐지하자고 했다. “성자의 날”도 폐지하고 세례받을 때에 십자가 표시를 하는 것도 폐지하자고 했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한 표 차이로 이 견해는 지고 말았다. 58:59로. 청교도들은 이 회의에서 정말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큰 패배를 맛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싸움을 하였다. 예복에 대해서 계속 투쟁했다. 그래서 1563년부터 1567년 사이에 예복 분쟁이 있었다. 이때부터 청교도(퓨리탄)이란 이름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까다로운 사람들(Precisians)이라고 불렀었다.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는데, 청교들은 “이러한 문제와 영역에 대해 세속 권세가 권위를 갖는 것이 옳은가?”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그들의 주장의 두 번째 논리적 단계였다. 교회의 일들은 누가 결정해야 하는가? “중립적인 일의 영역에 대한 공권력의 한계는 무엇인가?” 이것이 이제 대원리와 논쟁의 골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1563년부터 1570년까지 이 문제는 갈수록 더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패트릭 콜슨은 아주 재미있는 말로 국교회주의는 일종의 “개혁 카톨릭교로서 온건과 중용을 그 특징으로 한다”고 했다. 그들은 가능한 최선을 주장했다. 그러나 분명히 청교도들은 그렇지 않았다. 대륙의 제세례파로부터 들어온 영향들의 조짐이 보이기도 했다. 이것은 일부 청교도들로 하여금 극단에 빠지게 했던 것이다.
그 어려운 메리 여왕과 핍박의 시대에 그처럼 우정을 나누고 친구 사이가 되어 함께 동조했던 사람들 사이에 엄청난 분열이 생겼다. 어떤 사람들은 직책을 맡았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거절했다. 거절한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투쟁했다. 여왕은 감독들에게 이 사람들을 제어하라고 했다. 직책은 이들의 견해에 영향을 미쳤다. 직책을 맡는 것은 언제나 위험천만한 일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의무를 행하는 것이 마음의 첫 자리에 오기 쉽다. 그들은 점점 안주하기 시작했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매우 부자가 되었다. 감독들은 그때 부유했고 이 모든 것들이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망명자로서 함께 대륙에 있을 때 보여주었던 놀라운 의견일치를 망각하고 말았다. 규율이 최고가 되었다. 규율을 지키고 질서를 지켜야 했다.
1570년에 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것은 케임브리지의 토머스 카트라이트와 관련된 일이다. 그는 사도행전의 처음 몇 장을 강론하기 시작했다. 그는 교회의 본질에 대한 문제 전체를 제기했고, 이렇게 함으로써 영국 장로교회의 역사를 시작한 셈이다.
분리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 사람들은 국가 교회 개념 자체를 완전히 불식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왕과 정부 관련자들을 염두에 두고 “무엇을 위해서도 지체하지 않는 개혁”을 말하고 또 글을 썼다. 보다 근본적이고 참된 청교도주의가 장로회주의와 분리주의로 나누어졌다. 전자는 여전히 영국 국교회는 장로교회로 개혁될 수 있다고 믿었고, 후자는 영국 국교회를 포기했다.
1570년대말과 1580년에 들어와서 그러한 방법으로는 도저히 개혁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1590년대에는 더욱더 명백해졌다. 1593년에 존 페리와 헨리 바로우 등의 사람들이 분리주의적인 가르침과 행위 때문에 사형에 처해졌다.
드디어 1603년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고, 스코트랜드의 제임스 6세가 영국의 제임스 1세 왕이 된다. “일천 명의 탄원서”라는 대단한 탄원서를 작성하여 그에게 올렸지만 여지없이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는 엘리자베스보다 더 나빴다. 가련한 청교도들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떠났다. 어떤 사람들은 네델란드로 갔고, 1620년에 미국에 건너간 사람들은 필그림 파더가 되었다.
영국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계속 영적이고 도덕적인 교훈과 설교를 해나갔는데, 이는 리처드 십스, 존 프레스턴과 다른 많은 사람들의 저작집에서 볼 수 있다.
다음 왕인 찰스 1세는 순전히 영적인 싸움과 열정에 정치적인 요소를 개입시켜 청교도들로 하여금 다시 어떤 소망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만들었다. 이 싸움은 1640년까지 계속 되었다. 왕과 청교도들 사이에 공공연한 전쟁이 벌어졌다. 이것은 공화정치와 크롬웰의 통치 시기를 불러왔고, 이때 국교회 제도는 폐지되었고, 잠시 동안 장로교회가 공적으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주춤하던 회중교회가 다시 서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1662년에 대추방이 일어난다. 이것으로 인해 국교도적 청교도주의는 종식을 고하게 된다. 존 오웬은 독립파가 옳다고 확신하고 그 전해인 1661년에 떠났다. 1640년대에 코머스 굿윈은 독립파를 지지하고 나섰다.
대추방으로 2,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생활 터전에서 추방되는 일을 당하게 된다. 이제 공식적인 비국교도가 생겨난 것이다. 청교도주의는 영국 국교회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영국 국교회 속에 청교도주의를 심으려는 시도는 결국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 문제가 실제적으로 결론 지어진 것은 1663년이었다.
그동안 필그림 파더들은 지금의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들은 회중교회를 형성했다. 새로운 잉글랜드 방식을 세우는데 합의했다. 참된 청교도주의는 언제나 장로교회나 독립교회로 발전되어 나갔다.
요약하면, 청교도의 특징은 무엇인가? 국교도와 청교도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들은 다 프로테스탄트였으며 16세기 말엽까지는 사실상 모두 칼빈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들은 모두 프로테스탄트였고 칼빈주의자였으며 국가 교회를 믿었다. 이것은 그들의 공통점이었다. 그러면 차이는 무엇인가? 참된 차이는 그들은 모두 프로테스탄트였지만 국교도들은 언제나 “카톨릭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본질적인 차이이다. 그들은 모두 하나의 포괄적인 교회, 하나의 국가적인 연관을 가진 교회를 믿었다.
국교도와 청교도의 차이의 핵심
청교도와 국교도의 차이는 교회의 본질에 대한 관심의 문제였다. 그것은 완전하고 철저한 개혁에 대한 열망이었다. 그것은 의식들과 예복들을 반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으나 교회의 교리 전체로 발전되어 나갔다. 청교도는 부분적으로 개혁된 교회에 만족하지 않고 완전하게 개혁된 교회를 원했다.
청교도와 국교도 사이의 차이는 국제적인 시각과 한 국가적인 시각의 차이라 할 수 있다.
녹스와 청교도들은 국제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국교도들은 국내에만 있어서 국내적인 사고방식만 갖고 있었다. 리처드 콕스가 일차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것은 “영국 교회의 얼굴”이었다. 청교도는 언제나 신약으로 돌아가기 원했다. 국교도는 역시 전통과 관습과 계속성에 관심이 있었다. 언제나 계속성을 강조했다. 영국 국교회는 “중간 교회”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기들은 개혁교회일 뿐만 아니라 카톨릭 교회라고 언제나 주장해 왔다. 계속성과 전통!
청교도는 모든 것을 오로지 성경의 가르침에 기초한 반면, 국교도는 이성을 끌어들였다.
청교도들은 복음적인 관점만이 유일한 관점이라고 하는 반면에, 국교도는 복음주의는 하나의 관점이요 하나의 강조점이요 하나의 태도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강조점을 선포할 자유만 얻는다면, 포괄적인 교회의 부분이 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교도는 이렇게 하지 않으려 했다.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차이이다.
실제 영역에 있어서의 차이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청교도는 예배의 신령성을 강조한다. 국교도는 예배의 형식적인 면을 강조한다. 예배의 구성에 더 관심이 있다. 청교도는 교제에 관심이 있는 반면에 국교도는 보다 더 개인주의적이다. 모인 교회라는 개념은 청교도 사상에 있어서 핵심과도 같다. 그러나 국교도는 보다 더 개인주의적이다. 청교도는 죄를 색출해 내어버리는 것이나 엄격한 교회 훈육을 믿었다. 국교도는 외면적 일치에 만족하는 경향을 보인다.
1662년 이후 300년의 역사는 로마 카톨릭의 잔재로 여겨졌던 것에 복종하는 일보다 차라리 추방당하는 것을 택했던 사람들이 옳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준다. 청교도주의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정신 구조요 하나의 정신이다.
참된 청교도주의는 궁극적으로 장로회주의 안에서 발견된다고 저는 주장한다. 특히 존 녹스에게서 말이다. 토머스 카트라이트에게서도 발견된다. 분리주의적인 관점을 취했던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되며, 뉴잉글랜드 교회들에서도 발견된다. 또 비국교도와 독립파, 침례교도들 중에서도 발견된다. 그리고 토머스 굿윈이나 존 오웬에게서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바로 본질적인 청교도 정신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교회와 교회론을 중심적 위치에 두었기 때문이다. 스펄전에게서도 같은 방법의 본질적 청교도 정신을 보게 된다. 그는 청교도적 사고 방식의 완벽한 실례이다.
오늘날 국교회적 사고를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침례교 연맹, 영국 회중교회, 메소디즘과 청교도주의를 기원으로 하는 기타 교회들이다. 그들은 청교도가 아니라 국교도로서 생각함으로써 자신들의 기원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청교도는 일차적으로 순전한 교회, 진실로 개혁된 교회에 관심이 있다. 은혜의 교리를 크게 강조하고 목회 신학에 강조점을 두며 청교도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존경할지라도, 첫 번째 관심이 순전한 교회, 성도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에 관심이 없다면 자신을 청교도라고 부를 자격이 없다.
청교도주의는 철저한 개혁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여 교회의 교리 전체로 나아간다. 우리는 청교도주의의 다른 면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또한 그들이 교훈의 위대한 자료들이 되었던 것에 대해서도 감사한다. 만일 우리가 교회의 교리를 중심에 놓지 못하면 참된 청교도의 자세, 청교도의 사고방식, 청교도의 정신, 청교도의 이해를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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